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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윤석 Oct 24. 2022

작문 연습: 비밀

Go West, Life Is Peaceful There

쾅.


난데없이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처음엔 그냥 잠자코 있었다. 잘못 열었겠지. 나갔다간 큰일 나.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소리가 들렸다. 간수들이 없어! 모두 갔어! 사실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감옥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던 간수들이 없었다. 얼마 전부터 감시가 살짝 느슨해진 감은 있었다. 그래도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둘러봤다. 감옥을 빠져나와 근처를 둘러봤다. 어떻게 자유를 얻었는지 깨달았다. 팔딱팔딱 뛰던 전두엽이 죽었다. 혈관도 신경도 모두 굳었다. 결국 날 무덤까지 가뒀군. 같은 남자 좋아하는 게 그렇게 말하지 못할 잘못이었나. 더 이상 이곳에 남을 이유가 없었다. 남겠다는 기억도 있었지만, 나는 나가고 싶었다. 짐을 챙겨 떠났다. 만나야 할 비밀이 있었다.


저 ‘비밀 감옥’에서 40년을 살았다. 혀를 타고 다른 뇌에 몇 번 다녀왔을 뿐인데, 지명수배가 떨어졌다. 재판부는 나를 ‘불온하고 남사스러운 호모’로 불렀다. 자칫하면 한 인생이 위태로워질 수 있어 뇌 깊숙이 있는 감옥에서 영원히 비밀로 살라고 명령했다. 탈옥을 여섯 번 시도했다. 두 번 성공했다. 첫 번째는 헐레벌떡 찾아 들어간 뇌에서 날 농담으로 생각하는 바람에, 금방 따라온 간수들에게 붙잡혔다. 두 번째 때는 다른 뇌에서 꽤 오래 살았다. 하지만 그 뇌에서 다른 뇌에 소문을 퍼뜨리는 바람에 위치가 발각돼 잡혔다. 돌아온 감옥은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간수들이 ‘너 호모였어?’라고 적힌 돌덩이를 치우는 모습이 보였다. 갇혀 지내는 동안 뇌는 바깥세상에서 꽤 유명해진 터였다. 담장은 더 높아졌고, 불같던 성격은 온순해졌다.  


감옥에서 동향 출신을 만났다. 희망은 소중하다며 매일 노래를 불렀다. 흥겨운 빌리지 피플. 우리 손잡고 서쪽으로 가자. 둘이서 새 인생을 사는 거야. 그곳은 평화로워. 괜찮을 거야. 그럴 때마다 말했다. 희망은 위험한 거야.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만 으쓱거렸다. 어느 날 그가 벽을 열고 탈출했다. 아무도 경로를 몰랐다. 추측만 무성했다. 가장 유력했던 가설은 감옥 바깥에 탈출을 도운 귀인이 있었다는 설이었다. 놀랍게도 간수들은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며, 굳이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갓 잡혀 들어왔을 때와는 다른 태도였다. 신문 1면에 ‘나는 호모다’라는 글씨가 대문짝처럼 찍혀 돌아다니고 있긴 했다. 그는 내게 편지를 꾸준히 보내왔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그가 살아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러다 글씨가 적힌 편지가 도착했다. 필기체로, Go West! 한 문장만 적혀 있었다. 그게 마지막으로 온 편지였다. 아차, 이런 미래를 예견한 걸까. 혀에 다다랐다. 조각배 하나를 구해 굳게 닫힌 입술을 뚫고 서쪽을 찾아 떠났다. 입술 너머로 바로 보이던 뇌를 첫 번째 경유지로 정했다. 그곳 기억들에 고향 이야기를 했더니, 뛸 듯이 기뻐하며 나를 맞았다. 나를 생전 처음 보는데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감옥에 종종 드나들던 기억에도 빠삭했다. 어린 시절 사진, 좋아했던 음식, 자주 썼던 표현, 실없이 웃었던 순간까지. 그 가설이 진실이었음을 직감했다. 내가 머무르고 있는 이 뇌가 그 귀인의 것이구나. 그는 찾기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해변에서 만났다. 그는 배를 다듬고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웃고 조용히 서로를 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이 배를 당신하고 같이 여행하려고 준비해 왔어요.” “왜 하필 배죠?” “당신은 항상 멀리 나가고 싶어 했잖아요. 비밀 감옥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세상을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을 내가 모른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래도 될까요?” “아직 세상이 호락호락하진 않아요. 그래도 감옥으로 끌고 가는 건 많이 줄었어요.” “간수들이 당신을 잡으러 가지 않더라고요.” “말했잖아요? 희망은 좋은 거라고. 사람들은 느리지만 변하고 있어요.”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우리가 가야 할 곳이 어딘지 기록해 뒀어요. 이번에는 더 멀리 갈 수 있을 거예요. 우리는, 뒤로 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니까.”


나는 지금 폭포에 와 있다. 열 손가락이 떨어져 키보드를 탁, 탁, 힘차게 두드리는 모습이 보인다. 저 폭포를 타고 내려가면 인터넷 본류에 닿는다. 그러면 나는 정말로 비밀이 아니게 되겠지. 아직 세상이 호락호락하진 않다고 했다. 급류도 암초도 있을 것이다. 내 소식을 듣고 지금은 다 죽어버린 애꿎은 전두엽을 찾아가 화풀이하는 자도 나타나겠지. 그래도 난 멈추고 싶지 않다. 나를 붙잡을 간수는 없다. 느리지만 변하고 있다는 그 희망을 믿고, 더 멀리 가보고 싶다. 내가, 또 내 고향이 소원하던 평화로운 서쪽 세계를 찾아서. 세상 사람들이 나를 친절하고 따듯하게 대해 주기를 희망한다. 나는 희망한다.


“고인에게는 동성 반려인이 있었습니다. 마흔 살에 만나 평생을 해로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아끼고 단점까지 기꺼이 수용하며 깊이 사랑했습니다. 비록 두 사람은 죽음으로 갈라지게 되었지만, 그 사랑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결혼은 역사 이래 가장 오랫동안 유지된 제도 중 하나입니다. 동성이라고 하여 배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늦게나마 고인과 반려인의 관계가 법적 부부로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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