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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윤석 Jul 22. 2022

작문 연습: 숨

잊을 수 있는 건 모두 잊었다오, 안전불감증

 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칠 때까지 매일 저녁 아홉 시가 되면 나를 텔레비전 앞에 앉히고 뉴스를 같이 보곤 했다. 가끔은 오전 여섯 시에도.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게 세상이 어떤 곳인지 보여주려고 하셨던 것 같다. 다섯 살 때쯤인가. 비행기가 건물에 부딪히는 걸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다만 그때는 무언가를 또렷이 기억할 능력이 없었다. 제대로 쓸지 않으면 무심코 밟게 되는 작은 레고 조각 같은 기억으로 남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날을 2주 앞둔 어느 겨울 저녁. 뉴스는 지하철 입구에서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텔레비전은 말했다. 누군가 열차에서 불을 붙였다. 삽시간에 온 차량을 다 태웠다. 문을 연 사람도 있었지만 못 연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은 매캐한 가스를 마시고 계단에서 쓰러졌다. 옆 선로로 들어온 차량으로 불이 번졌는데 알리지 않아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가스를 마셨다. 전기가 꺼졌다. 사람들은 숨이 막히고 기도가 타 죽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머리도 키도 조금 더 자라 이제 기억을 아주 잘하는 아이였다. 백하고도 아흔두 명이 연기 사이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었다. 나는 상상했다. 유독가스가 내 코를 막으면 나는 어떻게 될까? 불이야. 도와주세요. 콜록콜록. 숨이 막혀요. 문 열어 주세요. 앞이 안 보여요. 콜록콜록.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상상은 그 정도가 한계였지만, 일곱 살 아이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공포였다. 나는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할아버지에게 소화기를 사 달라고 떼를 썼다. 포니, 브리사, 르망 같은 옛날 자동차 이름을 줄줄 꿰던 아이가 갑자기, 집에 불이 났는데 소화기가 없으면 어떡하냐고 캐묻는 아이로 바뀐 게 꽤 극적이었노라고 후일 엄마는 회고했다. 며칠 뒤 할아버지는 소화기를 진짜로 사 오셨다. 의외로 지하철에 들어가는 건 두렵지 않았다. 들어가면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저 빨간색 시트가 불에 잘 탄대요. 저게 비상 콕크래요. 불이 나면 잡아서 돌리래요. 그래야 살아요.


 얼마간 나는 소화기에 집착했다. 불은 나지 않았다. 내 주변 세상은 겉보기에 안전했다. 그 기간이 길어지자 나는 소화기를 잊었다. 나는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였고, 다른 즐거움이 소화기를 대체했다. 얼마 뒤 할아버지는 나와 같이 뉴스 보는 일을 그만두셨다. 학교에 다니게 되자 나와 할아버지는 저녁에만 드문드문 만나게 되었다. 게다가 내 머리가 더 굵어지자 더 이상 붙잡을 수 없다고 판단하셨을까. 할아버지는 소화기를 신발장 한구석에 넣었다.


 불은 나지 않았다. 나는 소화기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소화기는 한 십 년쯤 집에 있다가 액체형 소화기로 바뀌었다. 마치 유독가스를 닮은 먼지만 쌓여 가던 액체형 소화기는 오래 못 버티고 신발장에서 사라졌다. 그 사이 할아버지는 노쇠하고 초라해져 내게 만만한 존재가 되어 갔다. 어느 날 할아버지는 화장실에서 넘어지셨다. 엉덩이뼈를 심하게 다친 할아버지는 입원하셨고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셨다. 불은 나지 않았다. 내가 숨이 막히는 일은 없었다.


 얼마 뒤에 배 한 척이 침몰했다. 죽은 사람 숫자는 십 년 전을 우습게 비웃고 뛰어넘었다. 할아버지는 병원에서 아무 말이 없었다. 신발장은 비어 있었다. 그 앞에서 나는 아무 말 하지 못하고 그저 얼빠진 얼굴로 소화기를 버린 공간을 바라봤다. 노래 하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할아버지가 자주 듣던 노래였다. 어제는 어제. 지난 건 꿈이라오. 기억할 수 있는 건 모두 잊었다오. 나는 숨이 막혔다.


 목이 막혀 돌아가시기 며칠 전, 할아버지와 나는 6인실에서 말없이 같이 뉴스를 보았다. 불이 났다. 큰 건물이었다. 숫자는 이십 년 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소방관 한 사람이 불을 잡으러 들어갔다가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불은 사소한 곳에서 시작해 빠르게 잡지 못하고 번졌다. 침묵하던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저 봐라, 저.” 그는 연기 속에서 숨이 멎었다. 기억할 수 있는 건 모두 잊었다오. 노래는 또 나왔다. 나는 숨이 막혔다.


윤시내, "어제는 어제" (1980)


희생자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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