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연결’ / 아즈마 히로키
나는 문화인류학 전공을 시작으로 20대 때 주요 관심사가 ‘문화’였다. 문화란 상황에 따라 굉장히 다양한 정의를 하고 있는데, 나는 어떤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 않은 우리 주변을 둘러싼 모든 환경요소를 ‘문화’로 보았다. 그러다가 ‘문화예술’과 ‘행정’을 접목한 ‘문화예술행정학’ 석사 과정에 진학했고, 광범위했던 문화판에 ‘행정’이란 시스템으로 접근하는 필드에 잠시 몸 담을 수 있었다.
대학원을 다닐 때, 나는 낮일밤공(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며 소위 ‘문화판’이란 곳의 민낯을 보았다. 주최 측의 거창한 홍보와 달리 실제 사업이나 프로젝트는 실망스러운 경우가 많았고, 무엇보다 기획자의 마인드가 드러날 때 실소를 금치 못할 때가 있었다.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닌데 정작 중요한 예술인과 작품은 버리고 몇 푼 안 되는 예산과 자신의 위상에 집착하는 기획자를 본 경우가 많았다. (가령 000행사를 기획한 ***감독, ㅁㅁㅁㅁ사업의 ###담당자 이런 식으로 자기 이름 남기는데 열중한..) 지금도 그런 분위기에 고군분투하는 젊은 친구들, 또 개념 있는 윗세대도 많지만 아무튼 나같은 조무래기는 큰 의미를 찾을 수 없어 애증만 갖고 새로운 분야로 떠났다.
그래도 ‘문화’ 분야는 내가 20대 내내 짝사랑하듯 매료됐었던 분야이고, 운영 주체를 떠나 다양한 작품과 사업이 사람을 움직이는 무형의 실체를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을 위한 분야였다. 그래서 다양성과 존중, 배려, 이해라는 철학을 자연스레 배울 수 있었다.
이렇게 한 분야에서 기본 소양만큼은 단단히 다지고, 막연하지만 내가 가진 기술을 모두 활용해 콘텐츠 분야로 이직했다. 지금 직장에서 하는 일은 ‘문화’와는 결이 다르지만(소셜 미디어, 인공지능, 인테리어 등) 기획, 홍보, 마케팅 쪽으로 감을 쌓으면서 추후 문화 분야에 적용할 수 있겠거니 하고 일을 하고 있다.
아무튼 뒤늦게 진로를 바꾼 만큼 닥치는 대로 인사이트를 찾아 헤맨 요즘이다. 그러다 작년 말, 얇은 두께와 깔끔한 커버 디자인 때문에 끌린 ‘약한 연결’을 읽었다. 이 책은 작은 겉모습과 달리 누구나 활용하기 좋은 ‘벗어나기’의 기술을 알려주었다.
34page / 인터넷에는 정보가 넘쳐난다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중요한 정보는 보이지 않는다. 모두 자기가 쓰고 싶은 내용만 인터넷에 쓰기 때문이다. 배낭여행자는 배낭여행자가 본 인도에 대해서만 쓰고, 부자는 부자가 보여주고 싶은 자기 모습만 트윗한다. 일본에서 검색하면 그런 정보만 입수하게 된다. 이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것이 이 책의 주제다.
‘약한 연결’의 저자는 일본을 대표하는 논객이다. 그는 현대 사회에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를 사람들이 어떻게 접하는지, 검색어에 따라 개개인의 인생에 어떤 변화가 생길 수 있는지를 본인의 경험담을 빌려 이야기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변화’를 접하기에 좋은 경험인 ‘관광’을 주제로 이야기한다.
51page / 사회학자 딘 맥캐널은 ‘관광객’이란 책에서 관광은 여러 계급으로 분화된 근대 사회를 통합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사람은 관광객이 되면 평소에는 결코 갈 일이 없는 곳에 가고, 평소에는 결코 만날 일이 없는 사람을 만난다.
항상 똑같은 곳만 가는 사람에게 삶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문화’라는 장르가 주는 신선함, 새로운 발상이 같은 일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준다고 여겼다.(‘문화’가 꼭 예술 장르에만 한정 짓는 게 아니라건 앞에서도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많이 가고 자연스레 ‘관광’이란 분야와 자주 접한다. ‘문화-여행-관광’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영역인데 자유여행과 달리 저자는 ‘관광’에 좀 더 초점을 두고 어떤 걸 접할 수 있는지 아래처럼 얘기한다.
64page / 막대한 수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해당했다 .... 그러나 거기에서의 체험이 ‘표면을 접한’ 것 이상의 특별한 경험이었느냐면 결코 그렇지 않다. 나는 ‘지구를 걷는 법’을 한 손에 들고 크라쿠프에서 출발한 버스로 아우슈비츠를 방문한 평범한 관광객이었을 뿐이다. 특별한 가이드를 고용하지도 현지 주민과 교류하지도 않았다. 몇 시간 동안 아우슈비츠에 머물며 말 그대로 ‘표면을 접했을’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슈비츠에 관한 책을 몇십 권 읽은 것보다 강렬한 경험이었다.
저자의 경험과 유사한 경험을 나도 헝가리 여행 때 느꼈다. 부다페스트에서 우연히 ‘테러의 집’이란 곳에 갔었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참혹한 전쟁의 흔적을 적나라하게 담은 박물관이었다. 나는 그동안 인터넷이나 TV, 영화로만 봐왔던 유럽 역사를 온몸으로 느끼고 돌아왔고, 우리나라 역사와 항상 비교하는 습관이 생기게 되었다. 박물관 한 번 다녀온 게 뭐라고 이후 내 관점 자체가 바뀌며 '약한 연결'이 내 일상에 지속되고 있다는 걸 알았다.
80page / 아무리 객관적인 정보를 나열해도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의미 없다. 정보를 제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감정의 조율도 필요하다는 것이 체르노빌 박물관의 생각이다.
유물은 모든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지 않는다. 어떤 맥락에서 그런 물체가 만들어졌는지를 글로 설명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귀와 눈으로만 받아들이는 것 이상의 공기(atmosphere)가 형성되는 게 중요하다. 약한 연결이 곳곳에서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저자가 말하는 ‘약한 연결’은 사실 ‘온라인’에서 ‘오프라인’까지 이어가는 지점을 얘기한다. 그리고 키워드로 ‘검색어’를 계속 말한다. 어떤 검색어를 쓰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며 사용 주체의 삶도 바뀐다는 이야기다.
53page /세상에는 두 가지 인생론이 있다. 한 곳에 머물러 지금있는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겨 공동체에서 성공하라는 유형과 한 곳에 머무르지 말고 적극적으로 환경을 바꾸어가며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성공하라는 유형. 마을 사람 유형과 나그네 유형이다. 그러나 둘 모두 좁은 삶의 방식이기는 마찬가지다. 따라서 제 3의 관광객 유형이라는 삶의 방식을 권유한다. 마을 사람임을 잊지 말고 자신의 세계를 넓혀가는 노이즈로 여행을 이용하기. 여행에 과도한 기대를 갖지 말고 자신의 검색어를 넓히는 경험으로 삼아 쿨하게 대하는 것.
176 page / 자신이 원하는 정보만을 접하는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질지는 뻔하다. 자기 언어에 갇힌 인간이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아즈마는 독자에게 말이 아닌 것을 향해, 언어 외부로 떠날 것을 요청한다.
그런데 나는 주변 환경을 만드는 사람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본다. 이렇게 여행, 관광과 떼어놓을 수 없는 ‘문화’환경을 직접 만드는 제작자, 기획자들의 책임의식 말이다.
86page / ‘투어리즘(관광)’의 어원은 종교의 성지순례(투어)다. 순례자는 목적지에 무엇이 있는지 사전에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시간을 들여 목적지를 오가는 여정에서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고 사유를 심화할 수 있다. ‘관광=순례’는 그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여행지에서 새로운 정보를 만날 필요는 없다. 만나야 할 대상은 새로운 욕망이니까.
‘새로운 욕망’을 끌어낼 수 있는 약한 연결을 곳곳에 심어놓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연결지점을 만드는 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바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게 ‘문화’ 분야만이 가진 특권이자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는 내내 독자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만들어갈지에 대해 얘기해주는데 자꾸 난 떠났던 문화판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만 떠올랐다. 앞으로도 친절한 ‘벗어나기’ 기술을 알려주는 곳은 많아질 것이고, 수요자는 늘텐데 이를 받아들일 만한 넓은 그릇을 문화판이 부단히 준비했으면 좋겠다.
메인 사진 : 2차 세계대전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초상화, 헝가리 부다페스트 테러의 집,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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