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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엽여비소엽 Apr 02. 2017

짚어보기(外)

저주





정설이 아닌 내용이 언급됩니다. 주의 바랍니다.






  일부 뇌과학에선 숱하게 우리 곁에 밝혀진 '현상'에 대한 원인을 쫒아 그 가려진 베일을 벗겨내곤 한다.

그중 최근 내 이목을 끈 것은 뇌과학, '지능'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당연시하게 알고 있는 그 애매한 개념에 대한

나태함을 벗겨주는 등목 같은 시원함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허나 그 책의 내용에서 이자가 쏟은 시간과 노력이 깃든 '지능' 이란 주제보단, 그 지능에 대한 개념 파훼 

과정 중 언급되는 '기억'에 관한 부분이 더 충격적이었다.

'지능'이란 개념이 실존하기 위해선 '기억' 이란 메커니즘이 없을 수밖에 없다고.





  지능은 자신에게 발생한 욕구의 존재는 감지할 수 있으나 그 욕구가 무엇인지 모르는 1단계와,  무엇인지도 모르는 욕구를 처리하기 위해 해당 욕구를 추론하다 때론 다른 욕구로 착각하여  새로운 욕구를 창출하기도 하는 2단계가 합쳐진 개념이라 한다. 고로, '욕구 해결 능력' 이 아닌 '욕구 창출 능력'이었다는 결론. 생명체의 감정은 기억의 부재를 보완하기 위한 시스템이며, 인간의 생각은 생명체로써 상황을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한다. 즉, 우린 '기억' 이 없기에 '생각(신경세포가 활성되었던 정보)'으로부터 기반된 재현된 흔적이 기억으로써 작용한다는 것.


이일용 : 지능의 충격 






  일찍이부터 감정=호르몬 작용 이란 숱한 결과들 덕에 '감정'이 갖는 의미의 위상은 현대에 와선 이런 계통 학자들에게선 비교적 메몰 차져 있다. 그 위상이 낮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린 시시때때로 이 녀석에게 휘둘리고, 통제하기 위해 노력하며, 이것으로 인해 삶의 질이 윤택해지기도 한다.

  내가 쓰는 '짚어보기'의 목적은, 감히 누군가를 향해 쓰는 글이 아닌, 특정 상황이나 감정, 생각은 그마다의 모양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당연한 '보는 이에 따라 다름'의 효과를 나에게 강조하는 거였다.

  이를 통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글이 됐다면 기쁜 일이지만, 기본 맥락은 사실 쓰고 있는 나를 위한 글이었다. 내가 혼란스러울 때 주로 '모양을 깎아나가는 작업'을 통해 내 마음에 박힌 돌들도 빼냈었으니까.


  기억은 생각의 잔재, 신경세포가 활성되었던 정보라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정해진다 해도 사실 일반인들 생활에 크게 와 닿는 차이점은 아마 아닐 것이다. 기준을 두고 개념에 대한 정립을 요구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모든 이에게 모든 것들은 '짚어보기' 인 것이니까.


  난 커오면서 사람에 관련된 분야의 기억력에선 비교적 특이한 부분이 있다는 걸 알게 됐었다. 단순히 대상의 옷과 행동, 말투의 변화뿐 아니라, 그들의 인생의 조각들 마저도 기억에 기반된 내가 아는 다른 경우들과의 차이를 통해 알 수 있었으니까. 위의 책 내용에 따르면 이것은 내가 그 정보를 머릿속에 저장하기 위해 저장된 것이 아닌, 그 상황에 생각을 많이 했기에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이는 곧 내가 사람을 상대할 때 비교적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을 많이 한다는 것과 연결된다. 생각을 하게 되는 범주와 대상은 겪어온 인생에 따라 크게 달라 지곤 하는데, 아마 내 인생의 도입부엔 사람 관련 이야기가 많을지도 모르겠다. 




  누차 언급되는 '각개 각색'의 개념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이는 '생각'을 두고 말하는 상황에서 조차 마찬가지일 것이다. '생각' 이 많다와 적다는 사실 틀린 말이고, '생각'을 어떤 부분에 주로 많이 하는지에 대한 차이가 있는 것 일지도 모른다. 상황마다의 개개인의 대처와 대립에서 단순히 논리적/감성적 의 개념으로 애매하게 그들에 대한 정의를 내려버릴 것이 아니라, '원하는 상황'에서 만큼은 앞에 서있는 그 대상과의 관계를 발전시킬 실마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관계 발전은 곧 대상과의 심리적 거리가 좁혀진다는 의미로 이어질 수 있고, 이는 곧 내가 만든 나의 모습을 다시 확인하고 보수작업을 할 수 있는 계기로 이어진다. 데이터에 대해 필요로 하는 부분과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 개개인의 차이에 따라 또다시 효율과 역량이 갈리겠지만, 그 어떤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도 '사람'과 마주치지 않고 일하지 않는 일은 없고, 생활에 깊이 스며든 '온라인 세계'로 인해 사람 대면을 꺼리는 사람들 조차 어쩔 수 없이 다른 장소에서 다른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예상키 어려운 자극을 받게 된다. 자극에 대한 해석과정에서 우린 필연적으로 생각하게 되고, 그 과정은 고스란히 '흔적'으로 남게 되어 앞으로의 자극 대처에 강한 선입견이 발생하게 된다. 이 '나만의 대처법' 이 곧 내가 되고, 이것이 남이 보는 내가 된다.


  일적인 관계, 가족관계, 친구관계, 연인관계 등 변화무쌍하고 기준 없는 그들에 인생에 따른 행동과 말투에 우린 수십 년간 대처하고 수용하며 스스로를 바꾸고 보호하며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모습과 대처를 겪는 그들은 또다시 우리를 통해 조금씩 영향을 받아간다. 그 어떤 인간관계도 필연적으로 주고받는 양상이 되는 것이다. 그저 가볍게 그룹화하기 위해 때때로 우린 그 당시 처리하기 어려웠던 자극을 특정 개념과 단어로 축소시켜 정리하려곤 하지만, 사랑, 웃음, 행복, 분노조차도 사람에 따라, 심지어 그 사람이 누구를 상대하느냐에 따라, 시간에 따라, 그 상황이 있기 전 그 사람이 감정 소모를 얼마냐 했느냐에 따라, 심지어는 내가 오늘 입고 있는 옷이 갖는 모양과 색깔이 그에게 어떠한 무의식적 영향을 끼치느냐에 따라서 또다시 그 의미는 바뀐다. 말 그대로, 정답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린 그저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남들이 결론지어버린 개념에 몸을 맡겨 따라간다. 그것이 해당 집단의 규율이기에 지키지 않았을 때의 리스크가 발생시키는 '두려움' 도 있겠지만, 그 상황을 타개하고 본인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한 스스로의 행동에 또다시 발생하는 변수의 향연을 기피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이지만, 대상과 더불어 주변에게도 마찬가지인 일. 살아남기 위해 살아있다란 것이 주는 가장 큰 혜택을 스스로 져버리는 것은, 건너편을 보며 살아있기를 희망하는 나 스스로에 대해 끊임없이 걸고 있는 악순환의 저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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