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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라 Jun 20. 2024

꿈나라

Dreamland

꿈나라에 가본 적 있어? 미안, 너무 유치한 말이지? 꿈을 자주 꾸냐는 말이었어. 나는 종종 꿈을 꾸는 것 같아. 나는 종종 꿈을 꾸는데 주로 마차 타고 별나라 공주님들과 티타임을 갖거나, 쪽배를 타고 은하수를 건너서 어린 왕자를 만나거나, 회전목마를 타면서 즐겁게 빙글빙글 돌다가 꿈에서 깨거나하는 진짜 꿈나라로 갔었거든. 유치하고 아름답고 반짝거리는 꿈나라말이야. 


나는 자꾸 죽이는 꿈을 꿔. 그건 끝내주는 꿈이기도 하지만 진짜로 죽이는 꿈이기도 해. 누군가를 죽여본 적 있어? 아니, 누군가를 죽이는 꿈을 꿔본 적 있어? 꿈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죽이는 대상은 다양해. 죽이는 방법도 다양해. 나는 다양하게도 죽였어. 목매달아 죽이고, 칼로 난도질내서 죽이기도 하고, 이 세상에 없는 독극물로 죽이기도 하고, 돌을 던져서 죽이기도 하고. 너무 현실적인 살인 방법이야. 가끔은 현실인가 꿈나라인가 싶을 때도 있어. 나는 꿈나라에서 정말로 다양하게도 죽였어. 누군지도 모르지만 죽어 마땅한 존재들일 거야. 음, 죽여 마땅한 존재들이었어. 뭐야, 내가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죽이면서 해방감이나 만족감을 느꼈던 것 같아. 


처음에는 곰젤리 공장 사장이었어. 나는 알록달록한 젤리를 하나씩 집어 먹으면서 일하는 걸 좋아했거든. 곰젤리 공장의 유명한 제품은 곰젤리젤리곰이었는데, 젤리마다 색도 다르고 맛도 다 달랐어. 빨강색은 딸기 맛, 주황색은 오렌지맛, 노랑색은 레몬맛, 초록색은 사과맛, 보라색은 포도맛… 하도 많이 먹어서 충치치료도 분기별로 했었다고. 그런데 어느 날 뉴스를 봤어. 사실 그 공장에서 만드는 젤리들은 태평양의 어느 젤리젤라젤로젤리섬에서 작은 젤리 곰 가족들을 납치해서 혹사시켜 만든 거야. 사실은 그냥 젤리 곰들인데 강제로 딸기와 오렌지와 레몬과 사과와 포도만 먹여서 투명한 젤리 곰이 색이 차오르면 분쇄기에 넣어 잘게 갈고 펄펄 끓이고 다시 젤리틀에 부어서 젤리를 만들었단 거야. 젤리 곰들은 색이 변할 때까지 과일을 먹으면 죽게 된다는 걸 알아서 과일 먹기를 거부하고, 하얗게 겁에 질렸는데 사장은 하얗게 겁에 질린 젤리들만 모아서 분쇄기에 갈고 펄펄 끓이고 다시 굳혀서 다이어트 제로 곰젤리를 만들었어. 제로가 유행이었거든. 하얀 곰젤리는 달고 아무 맛도 안 났어. 씨발, 곰 모양으로 젤리를 만들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는데. 그동안 내가 좋아하던 곰젤리젤리곰이 사실은 작고 귀여운 젤리 곰들로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무지갯빛 구역질을 해댔어.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작고 귀여운 젤리 곰들이 학살당하는 걸 볼 수 없던 나는 곧장 공장으로 달려가서 “사장 나와!”를 시연했지. 사장은 더 많은 젤리 곰을 만들기 위해서 젤리곰의 인공수정을 위한 논문을 읽고 있었어. 나는 곧장 사장을 고무줄젤리로 둘둘 포박해서 공장으로 끌고 갔어. 가엾은 젤리곰들이 부서지고 쪼개져서 주황색 큰 냄비에서 펄펄 끓었지. 얼마나 달큰한 냄새가 났는지. 나는 사장을 높고 높은 에펠탑 젤리에서 사장을 떨어뜨렸어. 그리고는 풍덩! 펄펄 끓는 형광 주황색 젤리통 안에 빠져 죽었어. 원래 젤라틴은 동물의 피부와 뼈로 만드는 거 알아? 탱글탱글하게 굳은 사장 젤리에 설탕과 구연산 가루를 뿌리는 것도 잊지 않았어. 나는 젤리곰들의 환호와 꽃밭 같은 헹가레를 받으며 꿈에서 깼어. 


나는 그다음에 퇴사한 전 회사의 동료를 죽였어. 아, 물론 꿈에서. 글쎄 텀블러에 따라둔 설탕물을 마시면서 야근하고 있는데, 대표새끼가 야근수당도 안 주는 회사에서 같은 노예들끼리 사이좋게 초과 근무하는 주제에 까다롭게 이래라저래라 하잖아. 같은 노예인데 주제 파악도 못하고 나보다 1년 일찍 일어났다고 텃세질 하는 것 같았어. 그래서 텀블러를 그대로 들어서 그 새끼의 대가리에 꽂았지. 정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어. 하필 텀블러를 거꾸로 들었다가 박아서 그런지 텀블러의 반짝이는 별 장식이 동료의 머리에 꽂힌 거 있지. 그 별 장식은 사실 텀블러의 부속품인 빨대였는데, 조그만 버튼을 누르면 노래가 나오기도 했어. ~ 살아 있어서 ~ 괴로운 거야 ~ 삶은 ~ 언제나 ~ 우리를 ~ 괴롭게 ~ 만들지 ~ 나는 그걸 에어팟으로 연결해서 야근하는 언젠가 종종 그 노래를 듣기도 했어. 근데 지금은 동료의 더듬이 사이에 박혀서 둔탁하고 어그러진 노래가 흘러나왔지. 스피커 속으로 피가 흘러들어 갔는지. 아, 그 꼴을 네가 봤어야 했는데

“어머, 어머! 죄송해요! 하도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시길래! 퍽! 그럼 니가 처 일하시지 훈수만 두고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조언은 안 주길래! 퍽! 아니, 진짜로 니가 일을 처하는 게 더 빠르지 않겠어요? 퍽! 일을 넘길 거면 설명이라도 잘해서 넘기든지, 퍽! 귀찮고 번거로운 일들만 퍽! 시켜놓고 한숨만 푹푹 쉬면 뭐가 달라지냐고요. 퍽! 니가 처먹는 건 아카시아고 니가 만드는 건 토종꿀이야? 퍽! 어차피 너나 나나 설탕물 먹고 컸고, 사양벌꿀이나 만들고 있고 퍽! 다 같이 최저시급도 안 되는 월급에 야근 수당도 못 받으면서 일하고 있는데, 퍽! 관두면 또 고분고분한 직원 구하느라 대표가 고생하는 척하는 동안 당신은 내 몫까지 두 배는 더 일해야 할 텐데! 퍽! 하루빨리 퇴사하려다가도 내가 나가면 다들 고생할 것 알아서 참고 있는데 정말 이러기예요? 퍽! 서로 퍽! 예의 퍽! 지키면서 퍽! 일하면 퍽! 얼마나 퍽! 좋아! 퍽! 이 퍽! 씨 퍽! 발 퍽! 새 퍽! 끼 퍽! 야!” 퍽! 퍽! 퍽!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동료한테 하고 싶었던 말을 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벚꽃이 지고 장미가 피는 여름이 온 것처럼, 분노로 가득 찬 말을 토해내고, 그대로 동료의 머리에 꽂힌 텀블러를 빼야 하는데 오히려 동료의 대가리를 계속해서 텀블러로 내려치고 있더라고. 텀블러는 언젠가 별모양 요술봉이 되어 있었어. 내려칠 때마다 요술봉을 감싸고 있던 쉬폰 재질의 리본 장식이 함께 팔랑팔랑거렸지. 정팔각형 파티션을 넘어서 그리고 파티션 너머로 피가 튀고, 창 사이로는 달빛이 비쳤어. 동료의 머리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는데 그건 마치 불꽃놀이를 지켜보는 것 같았어.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피가 펑펑 튀면서 포물선을 그리고 파방! 파방! 하고 알록달록 터졌거든. 놀이공원의 황홀한 퍼레이드를 보는 것 같았어. 대표는 아무 말 없고, 나도 동료의 피를 뒤집어썼는데 혀로 쓱 핥자 썩, 기분 나쁘지 않았어. 비릿하고 어째서인지 기분 좋기도 했어. 프로폴리스 캔디 같은 맛이 났어. 처음에는 못 먹겠다 싶은데 먹다 보면 나쁘지 않은 거야. 어쩌면 건강에 좋을 지도 모르겠는걸? 대표새끼, 건강에 하도 관심이 많아서 법인카드로 홍삼도 사고, 이상한 아로니아 즙 같은 거나 노니 비누 같은 것도 쓰고 그런 새끼였거든. 카드를 받아다가 내가 사서 바쳤지. 아, 그래 유통기한이 다가오니 직원들에게 명절선물로 돌린 그 아로니아즙 맛이 났던 것 같아. 뭐? 직장 동료의 피가 그렇게 상큼했다고? 씨발! 좆됐다! 그리고 나는 꿈에서 깼어. 냉장고를 열어 꿀물을 마셨는데, 병에 그렇게 써 있더라. 


이 제품은 꿀벌을 기르는 과정에서 꿀벌이 설탕을 먹고 저장하여 생산한 사양벌꿀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기분 나빠서 바로 토종꿀을 샀어.


라 플뢰르(La fleur)이야기를 안 할 수없지. 가장 인상 깊은 꿈이었거든. 라 플뢰르는 의외로 꽃가게가 아니라 케이크를 싫어하는 사람도 케이크를 사랑하게 만드는 아홉 평 남짓한 전문 스위츠샵이었어. 디저트는 물론이고 식기까지 모두 주인장이 만들었다고 말하며, 동물성 원료만을 사용하는 것에 유독 자부심을 느끼는 케이크샵이었지. 색감은 또 얼마나 기가 막히게 쓰는지, 모든 디저트들이 쨍하게 화려하고 아름다웠는데 그중에서도 만개한 작약꽃 모양의 젤리 케이크가 라 플뢰르의 시그니처 메뉴였어. 젤리 케이크의 작약꽃잎은 포동포동하고 쫄깃한 식감이었어. 입 안에서 잔뜩 굴리며 먹다가 삼키는 걸 좋아했지. 모두가 독특한 식감을 좋아했어. 운이 아주 아주 좋다면 라 플뢰르 안에서 케이크를 먹고 갈 수도 있었어. 라 플뢰르의 식기는 가볍고 매끈하고, 새하얬는데 마치 고급 본차이나 같았어. 본차이나는 사실 만드는 과정에서 소뼈를 갈아 원료로 사용하는 거 알아? 그래, 마치 뼈처럼 순백의 새하얀 - 사실 이건 중복 표현인데 - 접시 위의 쨍한 색감의 디저트는 무엇을 올려도 주목받게 만들었지. 유일한 단점이라면 운영일이 적었다는 거야. 한 달에 이틀 정도 열까 그랬으니까. 주인장은 재료 수급 때문에 자주 가게를 여는 게 어렵다고 했어. 예약은 일절 받지도 않으면서 언제 오픈하는지, 어떤 메뉴가 준비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모두가 라 플뢰르의 주인장이 불규칙적으로 SNS에 올리는 오픈 소식만을 기다렸어. 가게를 열 때마다 매번 화려하고 아름다운 스위츠로 꽉꽉 채운 장식장을 보자면, 조그마한 가게 안에 어찌나 알차게 스위츠들을 채워 넣었는지, 다람쥐가 한 해동안 도토리를 숨긴 곳간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니까.

그런데, 이상하잖아. 컵케이크나, 젤리 케이크, 푸딩 쉐이크, 에클레어 같은 걸 만드는데 재료수급이 어려울 게 뭐가 있냐고. 장담해. 프랑스산 고급 버터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제철 과일을 사용하기 때문에 발로 뛰면서 발품 파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특별한 재료를 사용하는 것 같진 않은데 왜 모든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탐닉하게 만드는 걸까. 도대체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거냐고.
라 플뢰르를 처음 발견한 날이 생각나. 그냥 내 눈에 들어왔어. 카페인지도 몰랐어. 라 플뢰르는 까만 새틴 커튼이 쳐져 있어서 뭘 하는지 밖에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거든. “영업해요?”하며 호기심에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고급스럽고 화려한 앤티크 장식장과 인테리어를 만날 수 있었지. 주인장은 어떤 암울도 사라질 만큼 해사하게 웃으면서 미안하지만 피오니 젤리밖에 없다고 그랬어. 플레이팅 되어 나온 새빨간 젤리를 처음 보고도 그 모양에 놀랐는데, 하얗고 매끈한 식기로 한 입 떠먹고는 놀랐던 것 같아. 처음 먹어보는 식감과 맛이었어. 상한 건가 싶어서 맛이 조금 이상하다고 하니 주인장은 다른 걸로 바꿔주겠다고 했어. 조금 더 짙고 어두운 작약을 받았지. 너무 맛있게 한 접시를 비우고 나는 라 플뢰르의 운영일만을 기다리는 손님이 되었어. 그러다 언젠가 운영일도 아닌 어떤 날에 그 젤리가 너무 먹고 싶어서 라 플뢰르에 갔어. 출입문 종이 울리는 것도 모르고 주인장은 부엌에서 열심히 작업하는 것 같았어. 그리고 나는 마침내 재료를 알게 됐지. 전에 꿈꿨었잖아. 젤리를 만드는 주재료인 젤라틴은 뭘로 만든다고? 




나는 자꾸 죽이는 꿈을 꿔. 죽여야만 라 플뢰르에 갈 수 있어. 그건 끝내주는 꿈이기도 하지만 진짜로 죽이는 꿈이기도 해. 어떻게든 죽여서 끝내주려고 해 꿈을? 생을? 누군가를 죽여본 적 있어? 아니, 누군가를 죽이는 꿈을 꿔본 적 있어? 꿈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꿈이어야만 해.  죽이는 대상은 다양해. 죽이는 방법도 다양해. 나는 다양하게도 사람들을 죽였어. 진짜로 죽인 거라면 어떡하지? 목매달아 죽이고, 칼로 난도질내서 죽이기도 하고, 이 세상에 없는 독극물로 죽이기도 하고, 돌을 던져서 죽이기도 하고.  진짜로 사람을 죽였다면?  너무 현실적인 살인 방법이야. 가끔은 현실인가 꿈나라인가 싶을 때도 있어. 시체가 없으면 살인이 아니잖아. 나는 꿈나라에서 정말로 다양하게도 사람들을 죽였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죽어 마땅한 존재들일 거야. 음, 죽여 마땅한 존재들이었어. 죽어야만 식재료로, 재료로 의미가 있으니까 뭐야, 내가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사람들을 죽이면서 해방감이나 만족감을 느꼈던 것 같아. 라 플뢰르에 가야 해!


나는 사람을 죽이면 라 플뢰르에 데려가. 그리고는 꿈에서 깨. 내가 계속해서 누군가를 죽이는 꿈을 꿨던 이유는 라 플뢰르에 가기 위해서였나 봐. 갈 때마다 찬장에 본차이나 식기가 많아져. 사장님은 계속해서 새로운 스위츠들을 선보여. 기다렸다는 듯 스위츠를 내어줘. 라즈베리 잼인지 피인지 모를 끈적한 시럽이 포크를 타고 흐르고 꿈에서 깨. 내가 운이 좋다면 또 라 플뢰르에 가는 꿈을 꿀 거야. 마차 타고 간 별나라에 공주님들은 이제 없고 먼지 쌓인 티팟과 컵들만 보고 오거나, 쪽배를 타고 은하수를 건너서 시든 장미만 만나거나, 회전목마를 타면서 빙글빙글 돌다가 꿈에서 깨. 유치하고 아름답고 반짝거리는 꿈나라말이야. 그런 꿈나라는 다음번에 다시 갈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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