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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Jul 24. 2018

1904, 흐르는 섬 가덕도_김천대님

남중마을 김천대님

인터뷰 영상 링크


https://youtu.be/HR0C27TC0bM








남중 김천대(83세) / 여성 _ 할배, 와 먼저 갈라카노

     

어르신 자기소개 좀 해보시겠어요?

천성살고, 천성중에도 남중, 이름은 김천대예요. 올해 83세. 1936년생이에요. 어릴 때는 일본서 나서 컸어요. 우리 엄마가 아버지하고 일본 가가지고 내를 낳아가지고 5살 먹어서 일본서 가덕도로 나왔어요. 그 때만 해도 살기가 참 곤란하지요. 일본에서 오니 더 그랬어요. 내가 17살 먹어서부터 해녀질 해가지고 먹고 살았어요. 그때만 해도 배 많이 곯았어요. 밥도 톳나물 밥 먹고 쑥도 캐서 먹고. 고생했어요. 우린 때를 잘 못 태어났어요.

     



그래도 가덕도엔 먹을거리가 많지 않았나요?

그거는 그렇지예. 산에 가면 나물 뜯어 먹고 바다가면 또 해녀질 해가지고 미역도 하고 홍합도 해가지고, 용원 어판장 가서 팔고, 그거 가지고 쌀 사가지고 먹고. 가덕에서 용원까지 가는 통통배가 있었어요. 아침에 가면 저녁에 오는. 뱃삯주고 타고 용원 가서 장도 봐 왔어요. 구청에서 내 준 배라고 기억하고 있어요. 마을에서 운영하는 배가 아니라.

     

용원 어판장에 뭘 가져가면 돈을 좀 줬어요?

해삼 같은 거 가져가서 수요일마다 넣었지요. 해삼만 잡으면 돈이었어요. 물에 가면 홍합도 있고 미역도 있고 오만 거 많이만 하면 돈이었어요. 그때는 그런게 제법 많이 있었지요. 지금은 없지만. 해삼 같은 걸 잡아가지고 물에 망살을 해가지고 담궈서 살려놨다가, 아침에 가서 팔아 오고 그랬지요.

     

어머니도 어릴 때 소학교 다니셨나요?

나는 야간 다녔어요. 그때만 야간(야학)이 있었어요. 글을 모르니 야간 다녔지. 우리 친구들이 졸업 한 사람이 몇 없어요. 이차연(0000000)이만 고등학교까지 했지. 사실은 아무도 없어요. 혼자만 했지. 그땐 전부 야간 다니는 애들이야. 밤에 한글 배우러 가면, 학교 선생님이 공부 시켜주대요. 그 선생은 낮에는 학교 학생 가르치고 밤으로는 우리 가르쳐주고. 동네 처이(처녀)들이 다 가서 배웠어요. 이름 쓰는 거부터.

     

처녀 때 무슨 일 하셨어요?

살림도 하고, 낮에는 물에 들어가서 일 하고, 일찍 일어나면 나무도 하러 가고. 그때는 나무를 땠어요. 전기도 없고 뭐도 없는데. 아이고 우리가 그래 살았소. 전기불도 없제, 수도도 없제. 빨래도 고랑 가서 하고. 우리는 클때 고생 많이 했어요. 클 때, 우리 고생한 걸로 치면 말도 못해요. 수도는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겠네요. 전기 들어온 때는 알아요. 우리 아들이 40살이거든요. 3월에 낳았는데 2월에 전기가 들어왔어요. 그거는 내가 기억을 하는 기라. 그라이께 딱 40년 됐지요. 그래가 텔레비전도 사 넣고 했지요. 텔레비전 들고 오는 것도 무슨 소개를 해가지고, 텔레비전 파는 사람이 가져와서 놓아 주데요. 지금은 전화하거나 컴퓨터로 하지만. 사람이 댕기면서 팔았어요. 그 사람들이 와가지고 다 넣어주데요. 처음에 흑백 텔레비전을 보는데, 아이고, 너무 좋았지(웃음). 텔레비전에서 오만거를 다 하는기라.  

     

어르신 부모님은 어떤 일을 하셨어요?

그때만 해도 아무것도 할 게 없는 거라요. 그래서 배 탔지. 숭어 같은 거 잡아가지고 팔고 그래 살았어요.

     

결혼을 몇 살 때 하셨지요?

24살 때, 김길수라고(수줍어하심) 여수사람인데, 사촌 동생이 같이 배를 탔어요. 동생이 엮어줘 가지고 같이 살았어요. 사촌동생이 가덕도에 누나 있다 해가지고 델꼬 와가지고. 그래가지고 여서 산 기라요. 5년 전에, 76

살에 돌아갔어요.



 



처음에 할아버지하고 살림 시작할 때 생각나세요?

기억나지. 그때만 해도 못 먹고 사니까 자기도 배타고, 나는 작업하고. 그때는 다 배 탔어요. 회사도 없고. 다들 배를 타가지고 먹고 살았어요. 신혼집도 매한가지고 마. 저 밑에 조그마한 집에 살았어요. 방하나 정지(부엌)하나. 우리 친정엄마 데리고 살다가 두 분 다 돌아가셨어요. 자식을 낳아 공부 시킬라카니 돈이 있어야지요. 아들 고등학교 졸업해가지고 가덕도 나가서 회사 다니고. 우리 애들이 다 머리가 좋아요. 즈그가 벌어가지고 고등학교 다니고, 야간 대학 댕기고. 그래가지고 애들 괜찮게 살고, 그렇지요 지금. 1남 4녀를 낳았어요. 지금 이 집에서 막내아들하고 같이 살아요. 다섯 살 먹은 손자 하나도 있고요. 아들 하나죠. 큰 딸한테서 증손자 봤어요. 딸 하나 아들 하나씩인데, 아들이 장가를 가서 아를 낳았어. 또 딸 하나 아들 하나. 명절에 다들 와요. 우리 영감이 초이튿날 돌아갔기 때문에 초하루날 저녁에 아침에 밥 떠놓고 혹은 저녁에 떠 놓고 하거든요. 설이 되면 다 옵니다.

     

어르신 젊었을 때 해녀 하던 얘기 좀 해주세요.

나중에는 고무로 된 옷을 입었는데, 옛날에는 그게 없어서 아무거나 바지 입고, 저고리 입고, 수경 쓰고, 등짐 지고. 결혼하고 나니까 한 3년 있다가 고무 옷이 나왔지요. 훨씬 좋아요. 안 춥고. 납도 차고, 오리발도 신고. 얼매나 좋아요. 수영도 잘되고. 겨울에 추워도 고무 옷을 입으면 물이 안에 안 들어가거든요. 그라고 작업하러 댕겼어요.

지금은 나이가 많아서 그렇지만.


애들이 다섯이나 있었잖아요. 어째 다 키우셨어요?


아이고, 내가 우째 키웠는지 모르겠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가덕도를 나갔어. 돈 벌러. 그래 고등학교 졸업해가지고 즈그가 벌어가지고 야간 대학 다 가고 그랬다하대. 딸내미들이. 막내딸하고 아들은 내가 시켰으이, 아 스이(3명)는 즈그가 벌어서 했어요.

     





할아버지하고 사이는 어떠셨어요?

우리는 사이 좋았어요. 참 좋았지요. 참......참......좋았어. 살림도 도와주고. 참 좋았지요, 참.

너무 잘했어요. 지금도 생각이 나요. 손자를 보니 더 생각이 나네. 아들 결혼하고 한 5년 까지는 손자를 못 봤거든요. 영감이 내가 손자가 당하나(가당키나 하나), 와 내가 손자를 못 보노, 그러드만 어느날 반지하고 팔찌하고 들고 있던 걸 다 모아다가 언제라도 낳거들랑 손자를 줘라, 하대요. 그러고 돌아갔어요. 애가 지금 다섯 살 먹거든요. 다 줬지요, 그거를. 인자 좀 있으면 여섯 살 아니가. 그 애를 볼 때마다 난 영감 생각이 나요, 참 애들을 또 좋아했어, 우리 애들을.

영감하고 같이 한번 씩 놀러도 밖으로 갔거든요. 그때가 제일 좋았지요. 강원도도 가고, 설악산도 가고, 지리산도 가고 많이 다녔어요. 자꾸 같이 가자 캐. 지리산 옆에 흑돼지 있대요. 내가 그걸 좋아하니깐 먹으러 지리산엘 많이 갔어요. 다른 사람들은 평생 못 나가봤다카는 사람도 많은데, 나는 많이 댕겼어. 영감하고 참 많이 댕겼어. 영감하고 많이 댕겼어. 작업할 때는 또 작업하고. 물질할 땐 물질하고, 갈 때는 또 가고.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생각이 나세요?

영감이 간이 안 좋아 가지고, 병원을 늘 다녔거든요. 간이 너무 안 좋아놓으니까 당뇨도 오대요. 자꾸 어지럽다고 해샀대. 동아대 병원에 우짜면 한 달에 두 번도 가고, 돈도 많이 들었어요. 그래 멀리 댕겨도 너무 아프니까, 우리 아들이 고마 동아대 병원을 가지말고, 가까운데 가자고. 거서 퇴원하지 말고 병원에 있으라 하대. 그래서 있었어요. 나는 또 먹고 살려고 아침에 버스 타서 용원까지 가가지고 병원 가고, 또 와가 작업하러 가고, 갔다가 또 어휴, 또 저녁에는 영감한테 가고, 또 거기서 자고 또 오고 그랬어요. 어느 날, 한번은 설이 다가오는데 집에 가자 하대요. 그래가 집에 왔어요. 애들하고 있다가, 우리 큰 딸이 그믐날 왔다가 갈라하니깐 ‘하룻밤 자고 가면 안 되나’ 하데요. 그때 우리 배가 있었는데, 그거를 타고 아픈 사람이 온 천지를 다 댕기대요. 사람이 갈라고 그랬는가, 그래 댕기다가 딸이 오니깐 자고 가면 안되나...... 아버지 내가 가야됩니다. 하고 딸이 가고 나니깐 사람이 그만, 약을 먹을 시간인데 늘어지는 거라요. 이불을 뒤집어 보니, 오줌을 눈기라, 옷에다가. 119 불렀어요. 병원가니까 전에 다니던 동아대 병원 응급실로 가라 하대요. 응급실에 있는데 막 피를 토해요. 그러고 갔어요. 병원에서는 급성 폐렴이 와서 그렇다 하대요. 말도 한 번 못해보고. 그게 나는 제일 억울해요. 뭐, 내하고 만나가지고 고생했다 라는 말도 못 들어보고, 간다라는 말도 못 들어보고, 생각해보면 어째 그런 말 한 번 못 들어 봤는고 싶으고, 그렇지요.

     

어머님, 만약에 그 때로 돌아가신다면, 아버님에게 뭐라고 말하고 싶으세요?

날 고생시켜놓고 와 벌써 갈라하노. 같이 살긴데. 병원에서도 내가 그랬어요. 팔십 묵도록 살자, 할배. 그러니까 그게 마음대로 되나, 그러대요. 그것도 목에 걸리고, 오만 개 다 목에 걸려 지금. 딸네들이 뭐를 해가지고 오고 그러거든요. 옷도, 잠바 같은 것도, 메이커 있는 것만 사다주고. 내 팔순이라고 40만 원짜리 잠바 사주고, 그런데 그것도 못 보고 갔어. 이래 생각해요. 내가 살았기 때문에 오만 거 다 누린다고, 이런 꼴 저런 꼴 본다고.

     

가덕도에 생겼으면 하는 게 뭐가 있을까요?

-저는요, 목욕탕이 생겼으면 제일 좋겠어요, 목욕탕. 나이 먹은 사람 안 그렇겠어요. 다른 거 나뚜놓고, 목욕탕이 생겨야 할 것 같아요. 목욕 한 번 할라하면 용원까지 가야하거든요. 목욕탕이 생기면 제일 좋겠구마.

     

                         

    

 

     

     

 

     

  

  

  

   

     





1904, 흐르는 섬 가덕도

     

기획  부산광역시 강서구 문화체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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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김유리

원고  김유리

영상  문창현

사진/업로드 박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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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에 딸린 텍스트는 저자, 부산광역시 강서구청,

다양성출판사 키스더북스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이 영상의 모든 인터뷰는 인터뷰이와의 동의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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