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부단함도 훈련으로 고쳐진다
나는 나라는 사람에게 적응하는 데에 시간이 꽤 걸렸다. 30대가 돼서야 스스로가 조금은 편해졌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을 내가 조금이나마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면에서 스스로를 좀 더 좋아하게 된 것 같다. 물론 이 감정은 왔다 갔다 하고, 남들처럼 나를 더 좋아하는 날이 있고 그렇지 않은 날이 있다.
나를 다룰 때에 가장 어려운 부분은 내가 원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는 원하는 것이 분명한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원하는 것이 구체적인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삶의 만족도가 대체로 높아 보였다. 친동생과 유럽여행을 갔을 때 그 차이를 크게 느꼈다. 여섯 살 어린 여동생은 여행 일정을 짜거나 길을 찾는 일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아말피 해변에서 비키니 입고 썬텐을 하고 싶다던지, 인터라켄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하고 싶다는 몇 가지의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요청사항만 잘 챙겨주면 온전하게 만족하는 것 같았고, 나 역시도 여동생이 원하는 것들을 들어주면서 큰 성취감을 느꼈다. 나중에 보니 함께 다니기 가장 편한 여행 동반자 중 하나였다.
나는 어떠한 의견을 낼 때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 편이라 나 자신의 목소리가 그 사이에 묻혀서 안 들릴 때가 많다. 카페에 갈 때마다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습관적으로 시키는데 어느 날 내가 시킨 아아를 앞에 두고는 별로 땡기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와 비슷한 예로 20대 때는 친한 친구 따라 프랑스 영화를 2-3년 봐오던 어느 날 내가 프랑스 영화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내가 원하는 것을 친구에게 솔직하게 표현을 못했나 보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면도 아예 없진 않았겠지만) 잘 생각해보니 내 취향을 스스로도 몰랐던 부분이 더 컸다.
원하는 것이 아예 없다면 문제가 될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원하는 것이 사실 있는데도 그것에 귀를 기울이는 훈련이 되어있지 않아서 모르는 경우에 문제가 됐다. 구독하는 유투브 심리상담채널에서는 이런 우유부단한 사람들이 큰 결정을 오히려 섣부르게 내리는 경우들이 생긴다고 했는데, 그 말에 크게 공감했다. 카페에서 주도적으로 음료를 선택하지 않고 옆 사람이 시키는 것을 따라 시키던 나태한 버릇으로 결혼이나 취업과 같은 인생의 큰 결정들도 그냥 내려버리는 것이다. 이런 성향으로 인해 돌이키기 힘든 결정을 내버릴 뻔한 경험도 있었다. 그때는 내 인생의 핸들을 쥐고 있는 주체가 아무 곳에나 차를 박아버리는 '나'라는 사실이 무서워졌었다.
작년에 처음으로 내 나름 큰 쇼핑을 했다. 집을 리모델링하면서 소파와 테이블을 샀다. 정말 잘 사고 싶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검색을 했고, 열심히 찾다 보니 남들과는 조금 다른 내 취향을 조금씩 발견하게 되었다. 작은 집이 너무 작아 보이지 않도록 가구의 너비와 높이에 신경을 많이 썼고, 그러면서도 살짝 레트로 하고 따듯해 보이는 스타일을 오랜 검색 끝에 겨우 찾았다. 모두가 선호할만한 스타일이 아닌 나만의 것이라서 더 좋았다. 테이블은 코로나로 인해 운송이 어려워, 반년을 기다려야 했지만 그 기다림까지도 좋았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당연하고 흔한 경험일지 모르겠으나, 이런 경험이 많지 않은 나로서는 특별한 깨달음이 있었다. 살면서 너무 많은 결정의 순간들이 있고 그 결정의 순간들은 더 나은 무엇을 위한 기회가 된다. 그 전환점에서 온전히 나를 위한 선택을 내릴 수 있도록 오늘도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아메리카노인지 신중하게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