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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리 Apr 05. 2017

“박사 논문 엎고, 스타일링 도와드려요!”

옷으로 내 정체성 찾기, 그리고 타인과 함께 하기

#1 "저... 논문 그만 두겠습니다."


나는 2003년부터 박사과정 학생이었다. 입학 후 열심히 공부했냐. 그건 아니었다. 무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등 떠밀려 들어간 거였으니. 한 학기를 겨우 다닌 후 일단 휴학했다. 근데 아무 생각 없이 살다 보니 최대 휴학 기간인 3년이 휙 지나가버렸다.


난 학교로 돌아와야 했다. 그래도 시험 쳐서 어렵게 입학한 학교에서 제적은 안 당하고 싶었으니까.


매 시간 수업 따라가는 게 참 버거웠다. 겉으론 도태되지 않으려 열심이었지만, 난 학교에 어떠한 소속감도 느끼지 못한 채 겉돌기만 했다.


입학 후 10년째 되는 해, 오랜 방황을 정리하고 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아무 것도 해놓은 것 없이 나이만 먹고 있는 모양새가 맘에 안 들었으니까. 그 후로 난 거짓말처럼 처음부터 공부 체질인양 논문에 내 모든 걸 쏟아 부었다.


그러다 난관에 부딪혔다. 돌아보면 그건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것이었는데. 그때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나의 정신과 육체가 마비된 것처럼 우울함의 늪에 자꾸만 빠져들었다. 죽을 것 같았고 죽고 싶었다. 그러다 뭔가 좀 억울했다. 대체 난 왜 그렇게 된 거지. 매일 머리가 터지도록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또 물었다.



최선생, 지금은 그렇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때가 아니야.


논문 프로포절까지 통과한 마당에 그러고 있는 내 한심한 꼬라지를 보고 지도교수님이 하신 말씀. 그러나 내가 누구인지 생각하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책 쓰기를 권했다.


“에이, 내가 무슨. 책을 쓰냐? 내 전공, 교육학? 내가 그거 젤 싫어해.”


그렇게 부인할 땐 언제고, 이상하게 그날부터 글이 쓰고 싶었다.

 

‘맞다. 나... 싸이월드에 글 쓰는 거 좋아했었는데. 까짓 거 아무 생각 없이 하고 싶은 거나 해볼까? 그럼 뭐에 대해서 쓰나... 그래! 옷에 대해서 써볼까? 최유리, 너 박사과정 내내 옷만 봤잖아.’


그렇게 난 내가 평생 좋아해온 대상인 옷에 대해서 좋아하는 행위인 글쓰기를 시작했다. 몰래 좋아해온 것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니, 묘한 해방감이 찾아왔다. 그런데 옷에 대한 글에서, 나는 자꾸 옷이 아닌 옷을 좋아하는 내 얘길 하고 있었다. 나는, '억지로 모범생' 내 인생 전부를 돌아보았다.


글을 쓰며 정신분석 치료라는 것도 받았다. 그러나 정작 나를 건져내준 진짜 밧줄은 ‘에니어그램’이란 성격 유형 모형이었다.


유레카!


나는 내가 왜 쇼핑중독에 빠졌었는지, 내가 왜 교사였을 때나 시간강사였을 때 수업보다 패션에 더 신경 썼는지 이유를 알았다. 가장 큰 소득은 이 모든 과정에서 내 정체성을 찾았다는 거다.


조용한 말괄량이



정체성을 찾고 나니 모든 것이 심플해졌다. 내가 인생에서 해온 모든 의사결정이 ‘조용한 말괄량이’에 비추어 보았을 때 본질적인지 아닌지 그것만 생각했다. 옷도 마찬가지였다. 꿈에서 깬 듯 난 내 옷이 아닌 옷들을 옷장에서 쫓아냈다.


‘조용한 말괄량이’를 옷장 컬렉션의 컨셉으로 취하자, 내 옷장은 심플하면서도 풍성해졌다. 옷장을 열고 옷을 입을 때마다 조금씩 즐거워졌다. 그러자 내 삶도 점점 긍정적인 뭔가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건강한 의생활’이 무엇인지 알아가게 되었다.


나는 이 과정을 블로그에 덤덤히 썼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내 글을 읽는 독자들이 하나 둘 생겨나고 있었던 거다. 누군가에게 꼭 듣고 싶은 공감의 한 마디를 들은 것 같다는, 고해성사 같은 긴긴 댓글. 아! 가슴이 뛰었다.


2015년 봄. 글이 모이자 난 몇 군데 출판사에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몽땅 거절당했다.


“왜 옷 얘기 하면서 본인 얘길 쓰셨나요?”

어느 출판사 편집부장님의 애정 어린 충고가 나를 더 자극했다.

‘아무도 그런 얘길 안하니까, 제가 해야죠.’


참 신기했다. 학회지 논문 출판에 도전했다 먹은 리젝트엔 그냥 무너져버린 내가 출간에 도전했다 먹은 리젝트엔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더 웃긴 건 이거다. 난 아무 대안도 없는 상태에서 교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저... 논문 그만두겠습니다.

죽음까지도 생각했던 난 나머지 내 인생이 너무 소중했다. 내가 아닌 삶에 내 인생 1분 1초도 쓸 수 없었다.





#2 “힐링을 위한 옷장 컨설팅, 용감한 분들 손들어 주세요!”


2015년 9월 어느 날 학교 캠퍼스를 거닐다 졸업 앨범 촬영 중인 학생들을 목격했다.

‘아이고! 우리 때랑 패션이 어쩜 저리 똑같을까. 쟤네들 내가 좀 도와줘야겠는데?’


내 평생 존재하지 않았던 실행력이 샘솟던 순간이다. 내가 이런 발칙한 이벤트라니. 포스터를 캠퍼스 곳곳에 붙일까 했는데 연구실 후배가 뜻밖의 제안을 한다.


“언니, ‘○○라이프’에 올려보세요.”


학교를 그렇게 오래 떠돌았지만, 난 ‘○○라이프’가 뭐하는 곳인지 몰랐다. 그곳은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이 잠들기 전 꼭 한 번은 들여다보는 알짜 커뮤니티였다. 필력 좋은 애들이 익명으로 쓴 글을 읽는 재미가 그렇게 쏠쏠한 곳이라나. 졸업증명서를 요구하는 까다로운 가입절차를 거쳐, 드디어 10월 중순. 그곳에 이런 글을 올렸다.


박사 논문 엎고, 스타일링 도와드려요!


제목 덕을 봤다. 내 글은 베스트 게시판에 올라갔으니까.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신청자가 몰렸다. 몇 명까지 하겠다는 것도, 얼마나 오래 하겠다는 것도 내 계획엔 없었다. 그냥 체력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하고 싶었다.


컨설팅의 절차 역시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블로그에 1년 간 썼던 내용을 중심으로 ‘커리큘럼’을 급조했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자신감의 뿌리는 내가 버린 전공인 ‘교육학’과 10년의 티칭 경험이었다.


연령대는 20대와 30대가 대부분이었지만, 40대도 한 분 계셨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특정학교 출신들을 한 덩어리로 본다. 그러나 이 덩어리 내엔 다양한 세계가 공존한다. 나는 한 분 한 분이 각자의 세계를 조심스럽게 꺼내 보일 때마다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경청했다. 그분들의 불안, 우울, 고독 저 너머엔 아침 바다에 반사된 잔잔한 햇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내가 이 컨설팅에서 가장 주력했던 건 ‘정체성 입기’이다. 난 내 최고의 장점인 관찰력과 기억력을 총동원하여 그들이 누구인지 파악했다. 이 컨설팅에는 숙제가 있다. 그건 다음 질문에 답을 해오는 것이다.


‘오랫동안 좋아해온 나만의 곡은?’

음악은 어느 누구의 시선도 고려하지 않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사적인 영역이다. 좋아하는 음악에 그 사람이 있다. 나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기 힘든 옷이라는 영역에서 자기 것만 남기고 아닌 걸 덜어내는데 음악이 도움을 줄 거라 생각했다.


다음 질문은 ‘왠지 끌리는 룩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네타포르테, 매치스패션, 파페치 등 토털룩을 제공하는 패션앱 혹은 사이트에서 각자의 마음을 끄는 룩을 찾아서 캡쳐해 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왠지 끌리는 룩’을 통해 ‘입어도 되는 옷’이 아니라 ‘입고 싶은 옷’을 끌어내고 싶었다.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표현하면서도 소통에 방해가 되지 않는 옷을 권하는 것. 그게 내 목표였다.


세 번째 질문은 ‘만약 3개월 안에 죽는다면 무엇을 하겠는가?’이다. 다른 말로 ‘버킷 리스트가 무엇인가?’이다. 이 질문은 ‘별칭’을 찾기 위해서 내가 던진 질문이었다. ‘내 인생이란 여행에서 나는 어떤 여행자인가?’에 대한 답을 두세 어절로 표현하면, 그게 ‘별칭’이다. ‘별칭’은 옷장의 컨셉이 되어준다. 나는 옷장이 인생이란 여행의 여행 가방이라고 본다. 각자 다른 여행지를 향해 간다면, 우린 나이, 성별, 직업에서 벗어날 수 있고, 각자의 여행지에 맞는 옷을 입게 된다. ‘별칭’은 정체성 입기를 돕는 강력한 준거가 되는 것이다.


컨설팅은 다음과 같은 4단계를 포함하는 과정으로 5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1. 용감한 성찰자
자신의 성격 유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옷장의 컨셉이 되는 ‘별칭’을 정하는 단계

2. 냉정한 감상자
스타일링의 네 가지 법칙 <반대의 법칙> <여백미의 법칙> <색상 조화의 법칙> <빼기의 법칙과 더하기의 법칙>(당시에는 내 블로그에 소개되어 있었고, 지금은《오늘 뭐 입지?》에 보다 체계적으로 소개되어 있음)을 숙지하고, 패션 앱의 토털룩 사진을 감상하며 안목을 높이는 단계

3. 명민한 컬렉터
자신의 정체성인 ‘별칭’, 그리고 버릴 옷과 남길 옷을 고려하여 쇼핑하는 단계

4. 창의적 작가
‘별칭’과 스타일링 법칙에 따라 옷장 속 옷을 스스로 조합해서 입어내는 단계


컨설팅을 받은 분들은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그동안 쇼핑이 두렵기만 했는데 이제 정말 재밌어요!”
 “제가 마네킹 그대로 벗겨서 쇼핑했거든요. 지금은 마네킹의 스타일을 분석하고 있더라구요.”
 “전 그냥 살기 위해 옷을 입던 이oo이었어요. 근데 이젠 옷을 입을 때 생각할 줄 아는 이oo이 됐어요.”
 “옷장에서 70퍼센트를 덜어냈거든요. 근데 더 좋아요.”
 “지금까지 움츠렸던 어깨를 펴게 됐어요. 저 이제 ‘악동’으로 날뛰는 게 안 두려워요.”
 “제가 나이 들면서 여자로서 자신감이 없었어요. 근데 제가 별칭 생긴 이후에 남편을 꼬시고 있더라니까!"

물론 대부분의 분들이 별칭 정하기에서 꽤 어려움을 겪었다. 스스로가 정하기도 했지만 내 도움을 받기도 했으니. 과정이 어찌됐든 비난이나 놀림의 산물이 아니라 스스로 정체성을 탐구하여 결정한 별칭의 위력은 컸다. 그것은 본질적이지 않은 다른 것들을 배제할 줄 아는 심플 라이프의 시작이 된다.


이 컨설팅은 이제 ‘패션 힐링 컨설팅’이라 불린다. 그리고 이것은 새 삶을 살기로 한 나의 새로운 업이 되었다. 물론 2015년의 이 프로젝트에 비해 지금의 것은 훨씬 체계가 잡혀있다. 그러나 당시 나의 시작을 함께한 분들과의 이 과정이 개인적으로 참 소중하다.


전반에는 2015년에 만난 분들과의 스토리가 소개되고, 후반에는 내가 학교를 완전히 떠난 후 뵙게된 분들의 스토리가 소개된다. 후반으로 갈수록 체계가 잡혀가는 내 컨설팅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도 읽는 재미를 드리지 않을까 한다.


참, 남자 분들 얘기가 더 재밌는 건 부디 참고하시길!









최유리 작가의 목소리로 패션힐링컨설팅 스토리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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