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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리 Apr 16. 2017

“마른 몸을 가려줄 옷이 필요해요.”

<박사 논문 엎고, 스타일링 도와드려요> 네번째 컨설팅 스토리


#1 “마른 몸을 가려줄 옷이 필요해요.”


안녕하세요 게시판에 남기신 글 보고 컨설팅 신청을 해봅니다. 저는 작고 마른 몸과 황인종의 전형적인 옐로우 톤 피부를 가지고 있어요. 몸이 너무 말라서 항상 스트레스인데, 처음엔 운동을 해서 몸을 키워 보자! 싶었지만 지금은 어떻게 옷으로 잘 커버해 볼 수 없을까 고민 중입니다.
공부하느라 사회 진출이 늦었던 편인데, 사실 공부 하는 동안 옷이나 꾸미는 데 거의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친구들은 다 각자의 스타일을 찾아서 이쁘게 하고 다니는데 혼자 뒤처진 느낌이 많이 드네요.
주중엔 집-회사-집 생활을 하는 게 보통이고, 주말엔 또래 동성 친구들을 만나요. 취미 생활은 종종 공연 보러 가거나 맛집 다니는 정도에요.
제 체형에 맞는 옷 고르는 법을 배우고 싶어요. 지금 옷에 대한 안목이 거의 없는 상태라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지 막막하네요. 다른 것보다 제 마른 몸을 잘 가려 줄 수 있는 옷을 찾고 싶어요.
정장은 그래도 까망 까망 차려 입으면 어쨌든 '장소에 맞는 옷차림' 정도는 갖출 수 있는데, 친구들 만나거나 소개팅할 때 지나치게 포멀하지 않으면서도 꾸민 느낌을 주는 게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부족한 기럭지가 조금 아쉽기도 하구요.
일단 까맣게 입으면 웬만한 자리에선 TPO에 어긋나지 않으니 옷장에 점점 무채색 옷만 늘어가고 있답니다. 재킷과 치마는 9할이 검정. 블라우스도 8할이 아이보리. 나머지는 네이비/회색/갈색 정도? 그나마 원피스는 좀 알록달록한 것들이 있네요.
제 취향은, 아마 저랑 잘 어울리지 않을지도 몰라요. 화려하고 알록달록하고 번쩍번쩍한 거 좋아해서, 촌스러워지기 쉬운 것들 좋아합니다. 제 자신도 그 점은 잘 알아서, 뭔가를 '제 취향에 맞게'는 거의 사지 않는 편인데, 그러다 보니 더더욱 뭘 사야 할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실제로 입는 건 상당히 올드하게 혹은 보수적으로 입는 중이구요. 일 처음 시작했을 땐 20대라, 그저 '어린 여자'로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옷장이 더 저렇게 되어 버린 것 같기도 해요.
옷에 크게 관심을 가져 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기도 해요. 그 자리에 어울리기에 큰 문제 없이 입으려 했을 뿐이지, 다른 사람 눈에 '예쁘게' '멋지게' 보이고 싶다는 생각 자체를 별로 안 해 봤달까요. 그 때는 저한테 그보다 중요한 일이 많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요즘 머리도, 메이크업도, 옷도, 조금씩 조금씩 이것 저것 시도해 보고 있는 중인데, '뭐든지 한 번에 되는 건 없구나..' 하는 걸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에요. 가끔씩 '어차피 가지고 있는 자원에서 너무 차이가....'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들도 있지만,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노력해 보고 싶어요.

염치 불구하고 도움 요청 드립니다.



□□양(30세)은 법대와 로스쿨을 거쳐 2년째 로펌에서 일하고 있는 변호사이다. 그녀의 사연을 읽다보니 여러 가지 점에서 그녀가 누군지 알고 싶어 얼른 만나보고 싶었다.


우선 그녀는 ‘공부하느라 사회 진출이 늦었던 편이다’라고 밝혔다. 가만히 그녀의 나이와 그녀의 직업을 생각해보니, 29살에 변호사로 일을 시작했으면, 결코 늦진 않았다. 그런데 왜 그녀는 자신의 사회 진출이 늦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녀는 키 153센티미터에 38kg 정도의 아담한 체구의 여성이다. 그녀는 ‘나이가 들수록 부족한 기럭지가 아쉽다.’, ‘몸이 너무 말라서 항상 스트레스이다.’, ‘마른 몸을 잘 가려줄 수 있는 옷을 찾고 싶다.’라고 밝혔다.


키는 좀 작지만, 신장 대비 체중을 고려해본다면 모델 정도 몸매인데 자신의 슬림한 몸에 자신을 갖지 못한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잘만 꾸미면 남들이 소화 못하는 옷도 소화할 수 있는 몸이지 않나? 나는 그녀가 왜 자신의 슬림한 몸을 자신 있게 드러내지 못하고 자신감을 상실하게 되었을까 궁금해졌다.


그녀가 소개한 자신의 옷장에는 극과 극의 스타일의 옷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일을 할 때는 검은 옷 위주로 입는데, 레이스와 둥글린 칼라, 꽃 디테일이 많은 파스텔톤 블라우스 혹은 알록달록 원피스를 갖고 있다.


여기서 내가 포착한 그녀의 흥미로운 특징들 몇 가지가 있다.

1. 빈센트 반 고흐의 유명한 작품명을 필명으로 쓰는 만큼 아름다움을 동경하는데, 자신의 나이와 직업 때문에 형성된 상황이 자신의 취향을 억제하도록 했다는 점, 2. 자신의 취향을 세련되게 갈고 닦을 기회를 만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그녀의 옷 구매 패턴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그녀가 몇 년간 성취 지향적인 삶을 살아왔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로스쿨을 다니는 지난 몇 년간 그녀의 삶이 어떠했을지는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았다.


마지막으로 내 눈길을 끌었던 건 그녀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염치 불구하고 도움 요청 드립니다.” 이미 도움을 주겠다는 마음을 내가 표현한 상태인데. 다른 사람들은 감사함을 표현하면서도 도움을 요청하면서도 떳떳한데 그것과는 달리 그녀는 왜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에서 더 나아가 ‘염치’까지 언급하게 되었을까.


그녀를 만나기 전 그녀의 ‘나만의 곡’을 들어보았다. 그녀의 ‘나만의 곡’은 ‘오페라의 유령’ 메인 테마곡이다. 나는 평소 잔잔하고 조용한 음악을 좋아하는데, 압도하는 듯한 오르간 소리로 시작하는 ‘오페라의 유령’을 듣고 있자니 나까지도 암흑 속에서 절규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음악의 드라마틱함을 견디기가 힘들어 그녀의 ‘나만의 곡’은 한 번 밖에 들을 수가 없었다. 천천히 그녀의 내면세계를 추측해 보았다.


‘변호사’라는 직업 정체성과는 별개로 그녀의 내면세계는 극적인 감정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뭔가가 억제된 것이 아닐까. 억제된 만큼 극적으로 표출된 음악에 빠져 사는 건 아닌가.


드디어 그녀와 약속한 날이 되었다. 청담동에서 만나 브런치를 먹기로 했다.


그녀는 약속 장소에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녀는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며 브런치를 먹는 사람들 속에서 혼자 고개를 푹 숙이고 책을 읽으며 골똘히 생각하느라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내가 왔음을 알게 된 그녀는 소녀 같은 해맑은 미소와 브레이크 없는 연속적인 웃음소리를 들려준다. 연어와 수란, 그리고 샐러드가 예쁘게 자리 잡은 에그 베네틱트를 먹으며 그녀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의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S브랜드인 것으로 간주되는, 끄트머리에 꽃과 나비가 수놓인 검정색 코트에 엉성한 핏의 바지, 비비드 톤의 빨간 스웨터, 그리고 금색 줄무늬가 있는 검정 운동화 차림이었다.


 

음악 얘길 안할 수가 없었다. ‘오페라의 유령’이 주는 그 느낌 그대로 그녀는 자신의 감정이 상당히 극과 극을 오가는 편이란다. 평소 ‘법대생스럽지 않다’는 말을 자주 들어왔다고 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세계에서 감정 선이 역동적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듯하다.


그녀를 만나기 전 나는 미리 과제를 내주었다. ‘내 인생이라는 여행에서 나는 어떤 여행자인가?’, ‘내 인생의 여행가방인 옷장에 무엇을 넣고 싶은가?’를 생각해오라는 것.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녀 자신의 ‘인생’을 여행이라고 상정했을 때 자신의 여행 가방엔 옷이 거의 없다. 자신의 그 여행 가방에 어떤 옷을 넣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란다.


그녀는 그 여행에서 늘 단출하게 청바지에 티셔츠만 넣고 버티는 느낌이다. 그녀에게 지금까지 뷰티나 패션 같은 건 아예 자신의 삶 밖의 영역이었을 뿐이다.


만약 넣는다면, 옷 대신 그림을 넣겠단다. 어떤 그림이냐고 물었더니 역시나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모네의 그림이 좋단다. 그녀의 음악 취향이나 그림 취향을 듣고 있자니 영락없는 낭만주의자다.


그런데 낭만주의자라고 보기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다.


일을 할 때 그녀가 어떤 변호사인지 궁금했다. 그녀는 ‘용병’이라는 표현을 썼다. 자신은 대신 싸워주는 사람이라는 그 역할에 충실하려고 한단다. 그래서 옷도 까맣게만 입고 다니는 것 같단다. 그녀가 로스쿨에 다닐 땐 자신이 속했던 집단(그녀의 말에 따르면, 법대생 집단이 꽤나 보수적이란다)에서 요구하는 ‘여성성’에 맞추려고 했다.


그렇게 외부에서 요구하는 자신의 ‘지위’에 맞는 ‘역할’을 따라왔지만, 운전할 때 꽤나 와일드해서 스스로도 놀랄 때가 있다고. 온전히 혼자 있을 때 그녀의 본 모습이 불쑥불쑥 튀어오는 것이겠거니 싶었다.


어린 시절에 대해서 물어봤다. 그녀의 어린 시절, 이런 저런 상황이 딱히 불우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 힘든 감정을 경험해온 듯 했다. 그녀의 스토리를 듣고 있자니 나의 어린 시절과 사뭇 닮았다. 그녀는 그 어린 소녀의 슬픈 감정이 떠오르는지 눈시울이 잠시 붉어졌다.


어린 소녀였을 무렵, 그녀의 감정은 지지되기보다는 저지당하는 일이 많았다. 지금껏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사람을 남자친구로 만난 적이 없기도 하다. 지금까지의 남자친구는 자신이 좋아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건 아마도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스스로에게 허용된다는 확신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만나는 사람에 대해 잘 모르면서 그녀 스스로가 맘대로 설정한 이미지를 좋아하는, 현실이면서 가상인 사랑을 경험한 것 같다고 밝혔다.


‘오페라의 유령’은 DVD로 소장하고 있으면서 여러 번 볼 만큼 좋아한단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갖고 싶어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뤄지지 않는 안타까운 자신의 심정과 극의 스토리가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며.


나는 그녀가 감수성 풍부한 예술가형 개인주의자(에니어그램 4번)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성격테스트에서 ‘예술가적 기질이 있다’는 결과가 나온 적도 있었다고 하니.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물어봤다. 사연에서 ‘염치 불구하고’는 왜 쓴 표현이냐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상황이 익숙하지 않단다. 미숙할 수밖에 없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독립심을 강요받던 어린 소녀가 언뜻 보여서 마음이 아팠다.


그녀에게 다음 시간까지 숙제를 내줬다. 자신을 어떤 여행자로 보는지, 별칭을 정해오라고. 그리고 패션 앱의 사진을 ‘감상’하며 ‘왠지 끌리는 룩’을 캡쳐해 오라고 했다.



#2 ‘시니컬한 소녀’냐 ‘얌전한 악동’이냐


일주일이 지나고 그녀는 두 개의 별칭을 가져왔다. ‘시니컬한 소녀’와 ‘얌전한 악동’이었다.


일단 ‘시니컬한 소녀’. 어떻게 탄생한 별칭인지 궁금해졌다. 그녀의 ‘시니컬함’은 가령, 정치나 시사 이슈에서 풍자로 웃기는 블랙 조크를 좋아하는 것, 고등학교 때 촌지를 대놓고 요구하는 선생님들을 바라볼 때 느끼는, 사회의 불공정성에 대한 시니컬함이라고 한다.


어떤 부분에서는 아이 같이 이상주의를 추구하면서도 일반적인 불의에 분노하기보다 본인이 경험해 본 불공정함에 대해서는 ‘원래 세상이 다 그렇지’라며 대단히 시니컬하다. 그렇다고 뭔가 액션을 취하진 않는단다. 그녀는 속으로만 뚱하지 한 마디도 말 하지 않는다. ‘나만 입 다물면 평화로울 테니까.’


나는 그녀의 냉소주의가 패션에도 적용된 결과 패션을 외면하는 걸로 드러난 게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패션 잡지를 접하면서는 항상 자신과는 너무 먼 세계라고 생각했단다. 그녀에게 옷 입는 것은 고등학교 때 수학 같은 거란다. 싫지만 필요하니까 해야 하는 것.


‘소녀’는 어디서 온 말이냐고 물었더니 자신에게 아이 같은 면이 있단다. ‘뇌가 청순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며 스스로에게는 철들지 않은 해맑음이 존재한다고 스스로의 뇌를 묘사했다.


석 달 내로 죽는다면 무얼 하겠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영락없는 소녀다. 당장 프랑스로 날아가서 맛있는 거 실컷 먹고 예쁜 거 실컷 볼 거란다. 아무리 스스로가 시니컬하다고 할지라도 소녀같이 겁이 많아서 스스로의 삶은 평탄하고 굴곡 없는 걸 좋아한단다.


그녀의 ‘왠지 끌리는 룩’에서도 소녀 같은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꽃무늬 원피스 드레스에 밀리터리 재킷을 매치한 룩, 뭔가 예쁜 디테일이 들어간 블라우스에 쇼츠를 매치한 룩, 허리가 잘록한 백색의 원피스 드레스에 여성스런 힐을 매치한 룩, 보헤미안 무드의 블랙 원피스 룩.


그녀가 자신의 별칭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시니컬한 소녀’라고 하고 보니 2%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단다.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다른 별칭은 ‘얌전한 악동’이었다.


어떤 면에서 ‘악동’이냐고 물었더니 예술 작품 속 뒤틀린 아름다움, 때로는 광기로조차 보일 수 있는 아름다움을 즐긴단다. 도스토예프스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오페라의 유령’을 좋아하는 취향이 떠올랐다. 특히 운전할 때 자신의 숨겨진 ‘악동’스러움이 고개를 쳐든다고.


그녀는 법원에 재판하러 갈 때는 항상 ‘완전히 까맣게’ 입고 간다. 그러나 다른 모든 사람들이 드는 까만 서류 가방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그 까만 서류 가방이 그렇게 들기 싫더라구요.” 그러면 뭘 들고 가냐고 물었더니, “와인색이요!” 그녀의 그런 삐딱함이 나는 반가웠다.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머리를 단발로 자르고 웨이브 펌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러자 돌아오는 답. “그건 단정하지 않아요.” 단호했다. 그녀의 ‘얌전함’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그녀는 늘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역할에 맞게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내면에서는 격정적인 무언가가 끓고 있지만, 그것을 결코 현실에서 표현해본 적이 없다.


왜 그런지 이유를 물어봤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꾸민다는 것을 죄악시하는 가치관을 학습 받았다. 화장하면 안 예쁘다, 머리는 짧아야 좋다, 귀걸이 하면 고급스러워 보이지 않는다는 식의. 그녀의 표현을 빌자면 주위 사람들의 꾸밈에 대한 가치 기준이 ‘얌전한 중딩’을 선호하는 레벨이다.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시니컬한 소녀’보다는 ‘얌전한 악동’이 그녀의 삶을 더 포괄한다는 인상이다.


우선 ‘악동’이라는 표현에는 이미 ‘시니컬한 소녀’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천진한 아이 같은 그녀는 자신의 타고난 기질을 제대로 펼치기 보다는 적당히 숨죽이고 ‘얌전히’ 움츠리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가정환경과 ‘변호사’라는 직업 정체성 때문에 ‘얌전한 중딩’을 강요받으며 살아왔지만, 자신의 내면을 스스로에게까지 감추지 못한 그녀는 실상 ‘얌전한 악동’인 셈이다.


결정적으로 만약 ‘시니컬한 소녀’가 자신을 100% 포괄하는 표현이었다면, 애당초 ‘얌전한 악동’은 등장하지도 않았을 터. 그녀가 그런다. “그러면 ‘시니컬한 소녀’는 자동 파기되는 건가요?” 나는 그렇다며 크게 웃었다.




#3 “제 욕망에 솔직해진다는 것이 좋네요.”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후 그녀와 Mango 앱을 켜두고 사진을 보며 토털룩을 하나씩 분석하는 훈련을 시작했다.


사실 패션 전문 사이트에 업로드된 모든 사진 속 룩이 완벽한 건 아니다. 어떤 것은 매우 스타일리쉬하지만 어떤 것은 그냥 막 입혀놨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스타일리쉬하기엔 부족한 룩도 있다.


스타일리쉬한 룩에는 ‘반대의 법칙’, ‘빼기의 법칙과 더하기의 법칙’, ‘색상 조화의 법칙’ 중 어떤 법칙이 숨겨져 있는지, 부족한 룩은 어떤 법칙을 어겼고 스타일리쉬한 룩으로 보완하기 위해 어떤 아이템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이야기했다.


그녀가 대뜸 이런 말을 한다. “제 옷장 속의 옷들은 다 갖다 버리고 싶네요.” 그녀가 스마트폰으로 찍어서 내게 보여준 옷장 속 옷들은 죄다 디테일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레이스 들어간 칼라가 인상적인 블라우스, 꽃 들어간 어깨 봉긋 카디건, 플라워 프린트가 화려한 원피스 드레스, 검다고는 하나 칼라는 흰 색이고 주머니 부분은 하얀색 테두리가 들어간 재킷, 꽃 들어간 아이보리 니트…….


그녀의 옷장은 10년 전 내 옷장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옷장 속 옷들이 소리 없는 절규를 하는 듯했다. ‘아무리 변호사라도 난 예쁜 게 좋아.’ ‘난 보수적인 세상에 살고 있지만, 사실은 속은 악동이거든.’ ‘낮은 자존감을 디테일로 가리고 싶어.’


그녀의 사연 속 ‘염치’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아무도 도움을 요청하며 그런 비굴한 표현을 쓰지 않았다. 그건 그녀의 자존감이 그녀의 존재 그 자체와 너무 다르다는 인상이다.


그녀는 자존감이 정말 낮았다. 내가 본 그녀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주옥같고 반짝반짝하는 총명한 여성이다. 그러나 그녀에겐 자신의 그런 면을 그다지 지지받으며 살아온 경험이 적었다.


어릴 때 뭔가를 잘하면 칭찬을 듣기 보다는 그건 ‘남들도 다 하는 것’이라는 반응을 접하며 자라왔다. 그래서 그녀는 아직도 자신을 향한 칭찬에 매우 멋쩍어하고 칭찬에 ‘감사합니다’라고 답하며 그걸 순수한 칭찬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가 않단다.


그녀의 그런 면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나도 누군가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라 할 때가 많았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 그 자체로 사랑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없어, 뭔가를 성취하는 것 이외에는 자기 자신에게 아무런 가치도 부여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 자신의 모자란 자존감을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주입받아야 했기 때문에. 성취지향적인 삶을 살아왔던 지난 몇 년이 그러한 자존감과 별개의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가 성취자형 인간은 아니란다. 자신의 성취 지향에는 성취 그 자체로 인한 행복보다는, 성취와 사회적인 인정을 수단으로 부족한 자존감을 높이려는 진짜 목적을 달성하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그녀의 내면에는 언제나 날뛰고 싶은 악동의 성향이 존재해 왔다. 그녀의 성취 지향에는 성취의 끝에서 날뛰고 싶은 자유를 얻고 싶은 선망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그녀와 나는 일주일 후 한 번 더 트레이닝의 시간을 가졌다. 나는 그녀와 그녀의 취향을 파악하고 난 후, 네 번째 만남에서 쇼핑 약속을 잡았다.


내게 과제는 두 가지로 좁혀졌다.


첫 번째 과제. ‘악동’을 조금 더 세련되게 표출하는 방법을 안내해주는 것.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그녀는 와인색 가방 말고 또 다른 ‘쨍한 색’인 청록색 가방을 사길 원했다. 나는 그녀에게 ‘쨍한 색’ 말고도 ‘악동’을 표현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고 알려줬다.

그 예로 스팽글이 들어간 나의 바네사 브루노 토트백을 보여줬다. 이런 것도 ‘쨍한 색’을 원하는 내면의 심리를 표현할 수 있는 가방이 될 수 있을 거라며.


처음에 내 가방을 보고 반응이 시큰둥했던 그녀는 며칠 뒤 내게 고백했다.


왜 쨍한 색깔로만 ‘악동’인 저를 표현하려고 해왔었는지 모르겠어요. 제 생각의 폭이 좁았었네요. 그래도 어쨌든 제 욕망에 솔직해진다는 것이 좋네요.

지금까지의 그녀에겐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는 상황보다 욕망을 억누르는 상황이 더 익숙하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아직 자신이 좋아하는 게 뭔지,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조차 잘 모른단다. 심지어 고3때는 수능이 끝나고 하고 싶은 일이 생각나지 않았단다. 그 때는 오로지 수면욕밖에 없었다고.


두 번째 과제. 그녀의 낮은 자존감을 높여주는 것.

그녀는 앞서 밝혔듯이 키만 작았지 거의 모델 정도로 보기 좋게 말랐다. 난민 같은 몸매가 결코 아니었다. 그런 그녀에게 내가 했던 말.


“이제부터 우린 ‘악동’양이 키 작은 모델이라고 생각하기로 해요.” 내 말을 들은 그녀가 대답했다.


키 작은 모델. 그 표현 되게 좋은데요. 움츠러들었던 제 어깨를 펴주는 마법의 단어 같아요.
 

그녀의 반응에 나는 조금씩 신이 났다. 그래서 그녀에게 제안했다. “우린 남들이 못하는 거 해봐요. 화이트 스키니진 입기, 광택 소재 스키니진 입기. 이런 건 웬만큼 마르지 않고서는 입을 수가 없거든요.”


그리고 그녀에게 패셔니스타 김민희의 사진을 예시로 보여줬다. 사실 김민희는 ‘얌전한 악동’양보다 더 말랐다. 화이트 스키니진을 스타일리쉬하게 소화한 이 여배우의 사진을 보여주며, ‘악동’양에게 말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여자들이 김민희를 정말 부러워한다고.


‘얌전함’에 갇힌 그녀를 연이어 설득했다. 찢어진 화이트 스키니진을 입어보자고. ‘얌전한 악동’양이 갖고 있는 공주 풍 블라우스는 찢어진 스키니진 같은 거친 느낌의 바지와 어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나의 이 제안에는 ‘악동’의 광기를 찢어진 바지로 표출해보도록 하고 싶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그리고 SPA 브랜드의 키즈 코너에도 가보자고 했다. 자기에겐 맞는 옷이 거의 없다는 약간의 패배감에 짓눌린 그녀였기에 그녀를 위한 옷은 세상에 얼마든지 존재함을 체험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가장 큰 사이즈는 성인이 입어도 되니 어른 옷 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어보자고.  체구가 작은 내게도 이미 아동복 쇼핑 경험이 있음도 일러뒀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쇼핑이 두렵다. 자신없어하는 그녀에게 나는 강력한 어조로 말했다. “‘무조건 입어본다.’에 선서하세요!” 그녀는 그런 강한 어조의 내 말이 싫지는 않은 가보다. “언니,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포스 작렬이세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악동’보다는 ‘얌전한 소녀’가 되려는 그녀를 나는 자꾸 억지로라도 ‘악동’을 향해 끌고 가야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자기다운 모습으로 빛이 날 수 있는 그녀인데. 그녀가 자꾸 할머니 바지와 아줌마 외투 속으로 자신을 가두는 게 안타까웠다.




#4 “아이보리 스웨터가 가장 마음에 드네요.”  


그녀와의 네 번째 만남. 첫 번째 쇼핑이었다. 그녀가 쇼핑을 시작하기 전 내게 말한다.

언니, 화이트 스키니진 얼른 입어보고 싶어요.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곧 반가웠다. 드디어 그녀가 정말로 어깨를 펴는 중이로구나.


그녀와 처음 쇼핑하러 들어갔던 곳은 자라 키즈(Zara kids)였다. 총장과 소매 기장 모두 그녀에게 꼭 맞는, 그리고 따뜻한 밀리터리 재킷도 입어봤고, 약간 어깨가 껴서 아쉬워했던 기하학적 패턴의 버건디색 원피스 드레스도 입어봤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쫙 달라붙는, 기장 수선도 필요 없는 스키니진도 입어봤다. 뭐라도 하나 구입했으면 하고 내심 바랐지만, 그녀는 입어 본 모든 옷을 내려놓고 피팅룸에서 나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다음 목적지를 향하며 그녀가 덤덤히 말한다. “쫙 달라붙는 청바지의 핏이 생각보다 괜찮은데요?” 그녀는 내가 권해준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드는 것을 구입해도 되는지 확신이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좋다고 표현하는 상황이 낯설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그녀에게 장난스럽게 호통을 쳤다. “뭐해요? 얼른 가서 도로 가져오지 않고!”


그녀는 그렇게 다시 돌아갔고, 자신이 벗어놓고 나왔던 스키니진을 되가져와 구입했다.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는 그녀가 스키니진을 계산하는 동안 자라 우먼에서 U자로 파여 가슴골이 보일락 말락 하는 아무 디테일 없는 화이트 티셔츠를 발견했다. 그녀에게 방금 구입한 스키니진에 그 티셔츠를 매치해 보라고 권했다.


그녀는 xs이 맞는 작은 체구의 여성이지만, 그 티셔츠의 경우 디자인 자체가 작게 나왔다. 나는 그녀의 원래 사이즈와 상관없이 L사이즈 티셔츠를 권했다. 스키니진과 세련되게 매치하기 위해선 탑이 헐렁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달라붙는 청바지의 핏과 헐렁한 티셔츠의 조화. ‘반대의 법칙’의 적용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입고 피팅룸에서 찍은 사진을 내게 보여주며, 소감을 말했다. 난생 처음으로 디테일 없이 핏의 대비만으로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심플한 게 아름답다는 걸 깨달았단다.


물론 소재가 다소 아쉬워 그 티셔츠는 구입하지 않았지만, 다음에 그런 티셔츠는 꼭 사야겠다고 말했다. 그녀도 점점 나의 스타일링 법칙을 몸으로 느끼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아서 내심 기뻤다.


자라에서 나와 망고로 향했다. 검은색 코팅진을 입어보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피팅룸에 들어간 사이, 매장에서 그 코팅진과 어울릴 법한 아이보리 스웨터를 발견했다.


피팅룸 커튼 사이로 내가 슬쩍 넣어준 아이보리 니트를 보자마자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


예뻐요!

아니, 이 반응은 뭔가? 디테일 중독자 같았던 그 아가씨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결국 그날 우리는 자라 키즈에서 스키니진, 망고에서 코팅진과 아이보리 스웨터를 구입했다. 쇼핑을 마치고(나는 그날 11시간 동안 그녀 포함 네 명의 쇼핑 동행을 강행했다) 지친 내게 그녀가 차 한 잔을 권한다. 마침 늦게까지 문을 연 카페를 발견하곤 들어갔다.


나는 그 날 저녁에 그녀를 만나기 전, 오전에는 ‘세련된 꼰대’군과, 오후에는 ‘젠틀한 얌체’군과 쇼핑을 했었다. 그 날 쇼핑하며 두 사람의 스타일을 체크하기 위해 찍었던 사진을 ‘악동’양에게 보여줬다. 다른 사람들의 사진에서 그녀의 눈에 가장 인상적인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녀는 ‘젠틀한 얌체’군의 아이보리 머플러라고 답했다.


커피가 나오자, 그날 산 것 중에 가장 맘에 드는 옷이 뭐냐고 질문했다. 그러자 그녀는 또 의외의 답을 한다.

아이보리 스웨터요. 아이보리 스웨터는 평소에 예쁘다고 생각한 게 아닌데, 입어보니까 예쁘더라구요. 그 느낌이 좋았어요.

아이보리 스웨터와 아이보리 머플러. 디테일을 좋아하는 그녀가 한 번도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아이템들이다. 그녀도 조용한 옷이 주는 여백의 미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나보다.


그녀가 소감을 잇는다.

그리고 검은색 코팅진을 입으면서 엄청 센 느낌이 날 거라고 기대했었는데 생각보다 센 느낌이 덜해서 좀 실망했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리 둘은 동시에 하이톤의 웃음소리를 남발했다. 나는 그녀의 ‘악동’스러움이 그렇게 표출되는 것이 흥미로웠다.


나는 그녀의 불만(?)은 두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첫째, 얼굴의 효과. 그녀 얼굴의 얌전한 분위기 때문에 코팅진의 센 느낌이 더해져도 결코 과해보일 수가 없는 것. 둘째, ‘반대의 법칙’. 바지의 센 느낌을 중화시키기 위해 내가 피팅룸에 슬쩍 넣어 준 옷이 바로 아이보리 스웨터였다. 상반되는 분위기의 옷이 만나 밸런스를 이뤄 전체적인 룩은 과하지 않았다. 만약 바지를 바이커 재킷과 함께 입었다면 전체 룩은 그녀 말대로 세보일 수도 있었겠다.


그러자 그녀가 증언한다. 바지와 스웨터 둘이 같이 입었을 때 정말 예뻤단다. 나는 웃으면서 말을 보탰다. 광택 소재의 스키니진과 헐렁한 니트는 ‘반대의 법칙’이 여러 번 적용된 거라고. 느낌도, 핏도 대비되지만, 차가운 소재와 따뜻한 소재 또한 대비가 되어서 둘의 시너지가 크다고.


스키니진과 헐렁한 화이트 티셔츠의 조화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다행히 그녀는 내가 의도한 바를 이해했다. 나는 그날 그녀가 그 조화에 대해서 이해를 못해도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을 거라고 말했다. 나 역시 그 헐렁한 티셔츠가 주는 미(美)를 받아들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날의 쇼핑에 대한 소감을 묻자 돌아오는 대답.


“생각보다 재미있네? 신선하네? 이런 느낌이었어요. 언니한테 배운 걸 직접 입어보니 더 와 닿는 거 있죠. 여전히 빨갛고 번쩍번쩍한 것에 눈이 먼저 가긴 하지만. 처음으로 뭘 몸에 걸쳐 봐야 하는지 깨달았다고나 할까요. ‘이 옷엔 저 옷을 걸쳐 보면 좀 어울리겠다, 이거 랑도 안 어울리면 이 옷은 좀 안 되겠다’ 하는 감각이 처음으로 들어서 신기했어요.”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저도 오늘 이 말을 하게 되네요. 고맙습니다.” 내가 조금 쑥스러워하자 그녀가 덧붙인다. “10년 단축시켜주셨잖아요!”



#5 파리지엥 같은 악동


다섯 번째 만남. 우리는 못다 이룬 과업을 성취하기로 했다.


첫째, 찢어진 화이트 스키니진 입기. 그녀는 화이트 스키니진과 함께 입어보고 싶어 지난 번 쇼핑에서 구입한 아이보리 스웨터를 가져와봤단다. 그녀가 피팅룸에서 나와 내 앞에서 포즈를 취해 주었다.



스웨터와 찢어진 화이트 스키니진을 입어본 그녀! 정말 멋있었다. 더 이상 나비가 날아다니던 공주 풍 코트를 입던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스타일 점검을 위해 찍은 사진을 바라보고 있자니 파리에서 온 여자 같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로 날아가서 예쁜 것 보고 맛있는 음식 먹고 싶다더니, 딱 이러고 돌아다니면 교포인줄 알겠구먼.’




그녀는 화이트 스키니진을 입은 자신의 사진을 나와는 다른 시각에서 바라봤다. 화이트 스키니진의 핏도 예뻤지만, 더 이상 자신의 다리가 예전의 다리로는 보이지 않았다고. 웨이트 트레이닝 개인 레슨을 받으며 몸에 변화가 없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운동의 효과가 가시적으로 확인되어 기뻤단다.


웬만한 여성들은 화이트 스키니진을 꺼리지만, 그녀에게 화이트 스키니진은 의미가 달랐다. 화이트 스키니진은 단지 별 것 아닌 옷일 수 있지만, 그 별 것 아닌 옷이 그녀의 다리를 바라보는 그녀의 관점을 새롭게 해주고, 그녀의 자존감에 영향을 준다는 점이 기뻤다.


둘째, 국선 변호사룩 완성. ‘악동’양이 한 번은 9월 즈음 재판에서 국선 변호사님 한 분을 뵌 적이 있는데 그녀의 룩이 정말 인상 깊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검은 슬랙스에 헐렁한 핏의 화이트 셔츠를 입었는데 단추 하나 풀고, 소매를 걷어 올린 것이 그렇게 멋있었다나.


그래서 우리도 그걸 한 번 시도해보기로 했다. 검은 슬랙스는 이미 소장하고 있다고 하니 그녀의 옷장에 없는, 아무 디테일 없는 화이트 셔츠를 입어보기로 했다.


유니끌로로 향했다. 유니끌로의 울트라 스트레치 앵클 진 검정색과 남성용 슬림핏 셔츠 스몰사이즈를 권해줬다. 유니끌로의 앵클진은 160 이하의 단신 여성들이 입기에 딱 적당한 길이의 스키니진이다.


앵클진은 22사이즈가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보기엔 충분히 잠기고도 남았을 테지만, 스키니진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는 23도 안 잠긴다고 엄살을 떨었다) 23사이즈를 입었다. 그녀에게 앵클진의 기장은 맞춤같이 딱 맞았다.



핏이 너무 타이트하지 않은 검정 스키니진에 헐렁한 셔츠를 입고 소매를 걷어서 입자 탄성이 절로 나왔다. 그러더니 늘 자신의 바지를 할머니 바지 같다고 놀리던 내게 말한다.


“언니가 왜 제 바지보고 할머니 바지 같다고 하셨는지 이제야 알겠어요.” 헐렁한 상의를 예쁘게 소화하려면 딱 맞는 핏의 바지가 필요하다는 걸 스스로가 깨달았나보다. 그렇게 ‘얌전한 약동’양은 심플한 옷이 주는 매력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제 그녀에겐 멋진 신발, ‘악동’스러운 핸드백, 순한 얼굴 분위기에 반전 매력을 더해줄 선글라스, 할머니 옷 같은 겨울용 외투를 대체할 멋진 외투가 남았다.


그 중 가장 급한 건 겨울용 외투. 우리는 SPA 브랜드 위주의 쇼핑몰에서 나와 그녀의 집 앞에 위치한 백화점으로 장소를 옮겼다.


외투를 보기 위해 여성 캐주얼 층으로 향했다. 그러자 그녀가 하는 말.


전 늘 여성 정장 코너에 가서 외투를 샀어요. 추위를 많이 타니까요. 아줌마들 코너에 가야 따뜻한 외투가 팔거든요.

여성 캐주얼 코너에 도착하자, 클럽 모나코 매장이 보였다. 나는 나중에 그녀가 쇼핑할 때 참고가 될 수 있도록 그곳에서 코트를 입어보자고 제안했다.


클럽 모나코에는 아무 디테일 없이 심플하고 멋진 코트가 있었다. 물론 그녀에겐 xs가 딱 맞았다. 그러나 나는 매장 점원에게 s 사이즈를 달라고 요청했다. 점원은 너무도 의아해했지만, 나는 단호했다.


외투의 경우 적당히 여유 있게 입는 것이 멋스러운데, 체구가 작은 사람들이 ‘오버 사이즈 코트’로 디자인된 옷을 입을 경우 엄마 옷을 걸친 아이 같아 보이기 십상이다. 딱 맞게 입는 용도로 나온 코트를 차라리 한 사이즈 크게 입으면, 체구가 작은 사람에게 과하지 않으면서도 멋스러운 핏이 나올 수 있는 것.


그녀는 다행히 내가 권해주는 대로 입었다. 자신의 사이즈보다 큰 코트가 적당히 어깨선이 쳐지는 오버핏 코트가 된다는 걸 체험했고, 내 의도를 이해했다. “나는 맨날 제일 작은 것만 입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입어보니까 정말 예뻤어요.”


물론 그녀에게 급한 건 멋진 방한용 외투였기에 코트는 내려놓고 나왔지만, 다음 쇼핑에서 내가 알려준 바를 참고할 것이다.


그날 그녀가 구입한 겨울용 외투는 밀리터리 재킷이었다. 그녀의 내피가 100% 토끼털로 구성된 멋진 그레이 컬러의 재킷이었는데, 무엇보다도 길이가 지나치게 길지 않아 작은 체구의 그녀에게 딱 멋지게 어울렸다. 작은 체구의 사람들은 겨울 외투의 길이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부피가 큰 옷이 길이까지 길면, 정말 꼴이 우스꽝스러워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재킷은 소재 때문에 꽤나 비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내게 말했다. 아줌마 털외투가 아니라 아가씨가 입을 멋진 털 밀리터리 재킷을 평소 너무나 갖고 싶었단다. “(자기가 입고 온 외투를 가리키며) 이건 안 예쁘지만, (밀리터리 재킷을 가리키며) 이건 예쁘잖아요!” 맘에 드는 옷을 확 지르는 모습.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모습이라 보기 좋았다.


외투 쇼핑 후, ‘악동’ 스타일의 화룡점정을 위한 선글라스를 보러 갔다. 운 좋게도 그녀 집 앞 백화점에는 내가 좋아하는 선글라스 브랜드인 젠틀 몬스터 매장이 있었다.


그녀에겐 양쪽 끝이 살짝 올라간 뿔테 선글라스가 어울렸다. 눈꼬리가 내려가 있고, 턱이 길어 전반적으로 얼굴이 긴 그녀가 선글라스를 착용하자, 그녀가 입고 있던 아줌마 털외투가 갑자기 럭셔리해 보였다.

   

그녀는 생애 최초의 선글라스 체험에 “선글라스는 신기한 물건이로군요!”라며 가까운 시일 내에 꼭 구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가방과 신발은 백화점에서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 인터넷 해외쇼핑몰에서 직접구매를 하기로 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비록 처음에는 홀로 쇼핑을 다소 두려워했지만) 내가 없어도 쇼핑을 잘 한다. 디테일이 있는 옷과 화려한 색상이 자기를 유혹해도 이내 그것이 세련되지 않다는 걸 알고 배제하는 모습이 신기했단다.


홀로 쇼핑 중, 그녀는 정말 맘에 드는 룩을 발견했단다. 코팅 진에 헐렁한 화이트 셔츠를 매치한 룩. 너무도 맘에 들어 그 룩에는 어떤 아우터를 걸쳐도 그보다 못할 것 같단다. 코팅 진이 ‘악동’스러움을, 화이트 셔츠가 ‘얌전함’을 잘 표현해주고 있어서가 아닐까.


그녀의 시선을 끄는 대상에서도 그녀의 관점이 바뀌고 있음이 확인됐다. “저 오늘 음식점에서 흰 상하의 입은 분 봤는데 엄청 눈에 띄던데요, 헤어는 보브컷 단발, 신발은 약간 애매한 카키색?” 드디어 그녀도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알랭 드 보통의 시각을 갖게 된 것.


하루는 그녀가 SNS로 이런 말을 했다.


언니한테 스타일링 받고 옷 고르는 눈 생긴 것보다 더 좋았던 거는요, 이제 날뛰는 게 무섭지가 않아요. ‘아 맞다 나 악동이지? 날뛰는 거 좋아하는데 좀 더 깝쳐볼까?’

그녀의 자존감이 정말 많이 회복된 것 같아 내가 다 신이 났다. 그래서 뭘 더 해보겠냐고 물었다. 동호회 활동이나 봉사활동을 해 보겠단다. 사람을 더 많이 만나서 새로운 일을 해 볼 기회를 모색해 본단다.


그리고 내년까지 목표는 자기 사건을 하나 만들어보는 거란다. 변호사 일에 대해서 일자무식인지라 네사건 내사건도 있냐고 물어봤다. 그녀의 말을 그대로 따오면 이렇다.


“법무법인이나 법률사무소는 음 그 왜 CEO가 있고 고용변이 있잖아요, 보통 사무실 주인을 파트너, 고용변을 어쏘라고 하거든요. 어쏘들 주요 업무가 파트너가 수임해 가지고 온 사건 처리하는 건데 가끔 어쏘가 직접 수임하기도 하거든요. 능력 좋은 어쏘들은 그렇게 수임하는 사건이 많은 경우도 있고. 대부분은 수임 능력이 없으니까 개업 안 하고 월급쟁이 하는 건데 그렇게 하다가 자기 사건 많은 어쏘는 개업하고 뭐 그런 수순? 그래서 얼굴에 철판을 깔고 명함이라도 좀 뿌리고 다니려고 합니다!”

그녀의 말에 대한 내 답. “세일즈를 직접 하겠다는 거네? 맘에 든다! 근데 그러려면 옷이 좀 받쳐줘야겠는데?” 우리는 히읗과 키읔을 남발하며 대화를 맺었다.


다시 옷이라는 주제로 돌아와서 글을 맺으려 한다.


그녀는 자신에게 이제 입고 싶은 곳과 사고 싶은 옷이 생겼다는 사실이 기쁘단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이제 그렇게 ‘악동’인 자신을 허용하는 마음, 자뻑이 의심될 만큼 도도한 표정, 당당한 걸음걸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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