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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리 Apr 18. 2017

“뭘 입어야 할지 몰라 까만 옷만 입어요.”

01 “꾸미고 나가면, 불편해서 늘 후회해요.”


안녕하세요, 저는 22살, oo학과 3학년 B입니다. 학교 게시판에 올리신 글을 봤을 때 꼭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하고 있는 고민들이 ‘옷’으로 표출이 되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자 하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무엇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옷으로 말해보자면 여성스럽고 단아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막상 쇼핑을 가거나 옷을 고를 일이 생기면 편하고 어두운 옷만 선택하게 돼요. 예쁜 옷을 입으면 단점이 부각되는 것 같아서요.
 제 상상 속의 저 자신은 항상 걸 그룹처럼 모든 것이 완벽 세팅된 상태인데 막상 옷을 입고 거울을 보면 그런 상상이 깨져버리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남을 많이 의식하는 성격도 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게, 타인을 정말 많이 의식하면서도 결국은 ‘편한 대로’하게 되고 그렇게 하나도 안 꾸미고 나가면 후회, 또 한껏 꾸미고 나가면 불편해서 후회, 어떤 선택을 해도 결론은 그렇게 되더라구요.
 저는 좀 더 밝은 사람이고 싶어요. 그리고 밝은 사람처럼 보이면 실제로도 밝아질 것 같아요. 피부는 하얀 편이고 키는 157 정도예요. 얼굴이 작고 머리는 어깨선을 약간 넘는 정도, 약간 통통한 편이고 다리가 좀 짧아요. 꼭 만나 뵙고 싶어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컨설팅을 신청한 분들의 공통적인 고민. 그건 자기를 모르겠다는 거다. 특히 B양에게는 이것이 시급한 문제 같다. 그러한 고민이 정체성에 맞는 스타일링을 돕는다는 나를 만나고 싶다는 열망으로 표출된 듯하다.


그런데 재밌는 건 그렇게 만나고 싶다고 해놓고, B양은 시험에 민감했다. 내가 학교 게시판에 글을 올린 시점이 딱 중간고사 기간이었는데, B양은 시험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달란다.


약속한 날이 다가오고, 그녀의 ‘나만의 곡’, 보이의 ‘Ever Ever’를 들어봤다. 가사의 화자는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는 어떤 여성이다. 아무렇지 않은 듯 시간을 흘려보내도 어딘지 모르게 남아 있는 그리움과 미련. 마이너의 멜로디와 쿨한 편곡에서 풍기는 음악의 세련됨이 화자의 감정과는 상반되는 느낌이다.


마침내 그녀를 만났다. 그녀가 저기 앉아있다. 헉... 예쁘다! 소위 남자들이 좋아하는 얼굴. 맑고 하얀 피부,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갈색 머리, 예쁘고 선한 눈매.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B양 역시 자신을 묘사한 글보다 훨씬 괜찮은 외모다.


그녀는 검정색 터틀넥 스웨터와 물 빠진 블랙 진을 입고 있었다. 내가 나타나자 ‘우와!’의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분명 스타일리시한데, 화려하거나 불편해 보이는 아이템 하나 안 걸치고 있는 게 신기하단다. 나는 씩 웃었다.



“그 비법, 다 전수해 드릴게요.”


B양은 어딘지 모르게 억눌려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예쁜지는 관심이 없고 자신을 감추고 싶어 하는 모습만 보인다.


나는 우리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건 체형이나 스타일에 대한 분석보다는 ‘나’에 대한 탐구라고 일러줬다. 난 내가 내 길을 찾아오기까지의 여정을 소개했다. 어느 순간부터 ‘억지로 모범생’으로 살게 된 과정, 그 안에 머물며 안전하다 여겨온 낮은 자존감, 그러다 우울증에 아무것도 못한 채 멈춰 있던 기간. 그리고 마침내 내 길을 걷기로 마음먹기까지.


그녀는 내 얘기로부터 성장 과정에서 온전히 자신이지 못했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중학교 시절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며 주위를 당황시켰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거듭된 칭찬으로 순한 양이 되어 갔고, 그 안에서 주위 사람들과 겉으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의 얘길 듣다 보니, 자기 외모에 대한 시각이 너무 부정적이다. 다리가 휘어 O자형이란 얘기, 하체 비만이란 얘기, 키가 작아 다리가 짧다는 얘기... 이렇게 예쁜 B양이 어쩌다가 부정적인 자아상에 갇히게 됐을까.


‘나만의 곡’에 대한 얘길 꺼냈다. 그 곡을 좋아하는 이유를 물으니 그냥 그 곡이 늘 좋았단다. 그런데 그냥 좋은 건 없다. 어딘가에 무슨 이유든 어떤 계기든 뭔가가 반드시 존재한다. 그것이 정신 분석 치료를 병행하며, 치열한 자기 탐구 과정을 거친 나의 결론이다.


어쩌면 자기를 찾고 싶어 하는 그녀가 원래의 자기를 그리워하는 무의식이 음악에 반영된 게 아닌지. 아무리 쿨한 척해도 그를 완전히 보내지 못했고 잊을 수도 없다는 가사. 아무런 문제 안 일으키고 아닌 척하고 살지만, 자신을 찾겠다는 B양의 마음 같다. 이제  헤어질 시간.


“오늘 정말 좋았어요. 제가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어요. 주변에서는 지금의 순한 제 모습이 좋다고 하지만, 그런 칭찬은 교묘하게 저를 조종하는 방법이었어요.”


지하철을 타고 다음 신청자를 만나러 가며 나는 생각했다.

‘B양이 어떤 옷을 입어야 될지 모르는 모습은, 어쩌면 아직도 온전히 ‘나’ 이질 못해 방황하는 후기 청소년기의 고민이 아닐까?’

며칠 뒤 그녀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B양이 얘기했던 그 고민들. 사실 온전히 스스로이지 못했던 자신을 찾아서 삶의 주권을 갖기 위해 필히 거쳐야 했던 과정이었어요. 지금부터 스스로에 대한 탐구를 하는 거예요. 그렇게 찾아낸 자신을 마주하면, 더 밝은 사람이 될 거라 믿어요. 너무 예쁜 B양이 자꾸 자기 단점만 부각해서 보는 자아상은 B양에게 지나치게 부당해요.”



02 그녀의 이중성


두 번째 만남. B양의 표정이 한층 밝아 보인다. 자신의 별칭을 소개하겠단다.


‘줄을 타는 아수라’


첫 상담 이후 B양은 스스로를 돌아보며 자신이 매우 이중적인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양 극단 사이에서 균형 잡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다. 그러나 ‘줄을 타는 아수라’는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젠틀한 얌체’, ‘조용한 말괄량이’ 같은 건 이중적이면서도 옷을 고르는 잣대가 될 수 있어요. 그런데 ‘줄을 타는 아수라’는 어때요? 이중성만 내포하고 잣대가 되어주진 못할 것 같네요. ‘아수라’를 떠올리면 옷을 고를 때 오히려 혼란만 주지 않을까요?”


우리는 그녀가 옷을 입을 때나 삶에서 중요한 선택을 할 때 중심이 되어 줄 ‘별칭’을 함께 찾기로 했다. B양은 누구일까?


우선, 그녀는 새로운 것 배우기를 좋아한다. 배움을 통해 시야가 넓어지는 게 좋다. 라틴어와 영어, 세법, 사격과 승마, 미술과 음악, 그리고 칵테일. 22살 맞나? 싶을 정도로 참 다양하다.


나는 B양의 배움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향하는지 궁금했다. 그저 즐거울 뿐이란다. 아무 이유 없이 스스로 늘 뭔가를 배우고 싶어 한다. 또 그 지식이 쓸모 있어지는 순간,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다.


한편 그녀는 커리어 욕심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공과 관련해서 다양한 동아리 활동이나 인턴 활동을 두루 경험했다. 또한 그녀는 의외로 인간관계 스펙트럼이 꽤 넓었다. 자기 영역을 벗어나고 싶었단다. 평소 그녀는 학과 사람들이 비슷한 진로를 택하고 비슷한 공부를 하는 모습이 답답했다.


그녀는 어쩌면 뭔가를 성취했을 때 가장 큰 만족을 느끼는 ‘성취자형 인간’이 아닐까. 확인을 위해 두 가지를 물어봤다.


첫 번째.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항상 플랜 B 혹은 플랜 C까지도 준비하는지. 그녀의 답은 Yes.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안 그런 모습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아 다그치기도 한단다.


두 번째 질문. 다양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자신을 바꿔 각기 다른 매력으로 다가가느냐고. 역시 Yes. 나는 그녀의 대답을 들으며 속으로 외쳤다.


‘빙고!’


나는 웃으며 B양이 성취자형 인간이라고 알려줬다. 그리고 다양한 상황에서 카멜레온같이 변신하는 그것이 성취자형 인간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말했다.


“그게 저만의 매력인 줄 알았는데 성취자형 인간의 매력이었군요.”


이제 그녀가 캡처해 온 ‘왠지 끌리는 룩’을 볼 차례.


출처 : Farfetch


오픈 백의 가죽 미니 드레스, 버건디 컬러의 백리스 원피스 룩. 그녀는 백리스의 반전 매력을 선망한다. 여배우의 시상식 룩에서나 볼 법한 벨벳 소재의 실버 색상의 드레스 룩도 포함되어 있었다. 역시. 성취자형 인간답게 돋보이고 싶은 욕망이 있다.


나머지 셋과 성격이 상반되는 룩도 있었다. 블랙 스키니 진에 흰 터틀넥, 흰 스니커즈, 그리고 오버 핏 그레이 코트를 매치한 룩. 편안한 룩에 대한 선망에서 휴식에 대한 필요도 엿보였다. 에니어그램에선 3번 성취자형 인간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9번 평화주의자처럼 귀차니즘의 성향으로 간다고 설명한다.


B양은 남이 뭐라 하지 않더라도 뭔가 열심히 해야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이다. 시험 기간이 아니어도 도서관에 가는데, 안 가면 불안하단다. 처음에 보여준 시험에 민감한 모습이 떠올랐다. B양에게 학점 관리는 스펙보단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하고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한 수단인 것 같다.




03 “저를 찾고 나니까 정말 좋아요”


세 번째 날. 그녀는 새 별칭을 가지고 나타났다.


치밀한 귀차니스트


B양은 늘 치밀하게 무엇인가를 계획하지만, 막상 실행을 하는 과정에서는 자신의 치밀함을 탓하며 귀찮아한다. ‘나는 왜 이렇게 늘 귀찮아하지?’라며.


“‘치밀한 귀차니스트’라는 별칭을 찾고 나니까 정말 좋아요. 제가 지난주에는 못 찾았잖아요. 내 안에 모순되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까지만 알고 있다가 이걸 딱 찾고 나서 마음이 편해졌어요. 이건 뭐랄까... 마치 어질러진 화장대 같은 느낌? 어질러져서 깨끗하진 않지만 난 어디에 뭐 있는지 아니까... 나 스스로는 불편한 게 없는 그런 느낌 있죠?”


‘치밀한 귀차니스트’라는 별칭에는 솔직함도 있고, 단점을 허용하는 건강함도 있다.


“그런데 이제는 어차피 그런다고 제가 막 살 것도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냥 귀찮아해도 스스로 허용하게 됐죠. ‘원래 나 그런 사람인데 뭐’ 하구요.”


어쩌면 그녀의 귀차니즘은 너무 욕심 내다보니 발생하는 부작용 같다. 그녀는 지나치게 치밀한 계획을 세워 뭔가를 추진하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경험할 때가 많았다. 그 말을 들으니 처음에 소개 글에서 아이돌 스타를 따라 입고 싶었다던 문장이 떠올랐다. 그 나이 대에 가장 성공한 사람들이 바로 아이돌이다. 그래서 아이돌의 화려한 룩을 따라 입고 싶었던 거다. 그런데 막상 똑같지 않으니 좌절감을 느꼈고, 따라 입으려 해도 귀찮아서 못했던 거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신경 써서 입는다’는 ‘타이트하게 입는다’를 의미했다. 그렇게 입으면 ‘나 오늘 신경 썼어’라며 심적으론 안도하지만, 점점 몸이 불편해져 자책할 때가 많았다.


이제 남은 건 치밀하게 계산했지만, 입었을 때 몸도 마음도 편안한 룩을 구상하는 것이다. 신경 써서 입어도 자신의 치밀함을 책망하지 않도록.


그녀를 위해 2가지 겨울 룩을 짜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려는데, 웬걸. 그녀의 노트에 나는 경악했다. 그 노트엔 옷장에서 ‘입는 옷’과 ‘입지 않는 옷’에 대한 빽빽한 분석이 작고 예쁜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크! 치밀하다.



그녀는 쿨톤의 하얀 피부에 여성스러운 얼굴의 소유자이다. 나는 먼저 그녀의 흰 얼굴을 더 환하게 빛내줄 아이보리 코트를 사자고 했다. 그걸 중심으로 토털룩을 짜는 거다. 아이보리 코트의 오염을 걱정하며 한사코 꺼리는 그녀. 나는 그날 내가 입고 갔던 오버 핏 아이보리 코트를 벗어서 그녀에게 권했다. 어색해서 어쩔 줄 모르던 표정은 마침내 소매에 팔이 완전히 들어간 순간,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급변한다.



다음으로 밀리터리 재킷 룩을 제안했다. 역시 한 번도 입어보지 않은 옷이라 망설인다. 나는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내가 평소 자주 구경하던 온라인 쇼핑몰을 띄웠다. 그곳은 정말 여성스러운 얼굴의 사장님이 운영하는 곳이다. 나는 사장님이 프릴 가득 원피스를 입은 사진과 밀리터리 재킷을 입은 사진을 비교해서 보여줬다. ‘귀차니스트’양은 후자의 세련됨을 이해했고,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역시 ‘반대의 법칙’은 위대하다.


이제 외투 안에 입을 하의와 상의를 결정할 차례. ‘신경 썼다’ + ‘불편하다’의 주범이 되었던 그녀의 타이트한 미니스커트를 대체할 것으로 A라인 미니스커트를 쇼핑리스트에 포함시켰다. 밀리터리 재킷에 헤링본 소재의 A라인 스커트를 매치하는 거다. 그러면 헤링본 패턴의 중후함과 스커트의 여성스러움이 아우터의 분위기와 대비되어 정말 스타일리시할 것이다.


그리고 심플한 아이보리 코트와 카키색 밀리터리 재킷에 에지를 더해줄 하의가 필요했다. 나는 버건디색 스키니진을 제안했다. 버건디 색은 우리가 사기로 한, 두 가지 아우터 모두와 색상 매치가 조화롭다. 뿐만 아니라 색상 자체의 강렬함 때문에, 화려한 디테일이 없어도 그녀의 ‘화려함’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다. 게다가 스키니진의 타이트한 핏과 아우터의 헐렁한 핏이 대비되면 조화로울 수밖에!


버건디 스키니진은 ‘여백미의 법칙’을 적용한 선택이기도 하다. 얼굴 주변의 뭔가가 화려하면 상대방은 왠지 피로를 느낀다. 다소 화려한 색상을 입고 싶은 분들은 강렬한 상의보다 강렬한 하의를 선택하는 게 좋다.


한편 ‘귀차니스트’양이 멋을 낼 때 착용하는 하이힐은 불편하다. 또 하이힐은 여성스러운 얼굴을 중화시키지도 않는다. 나는 발 전체를 감싸주면서도 작은 키를 커버할 수 있는 부츠 형태의 신발이 더 적합하겠다고 판단했다. 중성적 매력을 더해줄 워커 부츠를 제안했다.



마지막으로 중성적인 느낌이 나면서도 베이식한 갈색 스트랩 시계를 구입하기로 했다. 팔에 화려함을 더하길 원한다면, 화려한 시계를 사기보단 심플한 시계 옆에 팔찌를 보태면 되니까.


이 정도로 구상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며칠 후 그녀가 기쁨 가득 메시지를 보내왔다.


“컨설팅받으면서 저 자신에 대해서도 주변 환경에 대해서도 더 많이 깊게 생각해보게 됐어요. 앞으로가 더 기대돼요. 참! 오늘 쇼핑하면서 아이보리 코트, 카키 야상, 데님/화이트/그레이 셔츠를 샀어요. 오랫동안 얘기하고 생각도 많이 해서 그런지 딱 사려고 하는 걸 미리 알고 와서 고민 없이 골랐어요. 정말 좋아요!”


성취자형 인간답다. 보통은 쇼핑 일정을 잡으면 나와 함께 입어보며 법칙을 익히고, 그 자리에서 사지 못한 건 그 이후에야 혼자 산다. ‘귀차니스트’양은 유일하게 혼자 미리 쇼핑한 사람이었다. 빨리 자기 스타일을 완성하고 싶었나 보다. 그동안 어떤 변화가 생겼을지 궁금했다.


 



04 “이젠 쇼핑이 쉬워요!”


한 쇼핑몰에서 만난 그녀. 아이보리 스웨터와 오버 핏 아이보리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간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야상을 사서 야상을 계속 입고 다녔는데 야상 안에 입는 옷을 스타일링을 달리 했었어요. 저의 스타일링의 변화가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났던 날이 있었어요. 그 날은 오전에는 학원에 일하러 가야 했죠. 학원 원장님이 저에게 너무 학생처럼 입고 다니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 날은 셔츠 입고 검은 바지 입고 야상을 입고 갔었죠. 학원 안에서는 야상 벗어놓고 일을 했는데, 검은 바지에 흰 셔츠니까 그곳에서 일을 하시는 분들과 비교해도 때와 장소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옷차림이었죠. 일을 마치고 오후에 친구 만나서 놀 때는 답답해서 셔츠 단추를 풀고 있었어요. 그다음에 저녁에 친구들과 ‘클럽 갈까?’라는 말이 나왔는데 그냥 셔츠 단추를 몇 개 더 푸르니까 클럽에 맞는 복장이 되더라구요. 정말 ‘아 오늘 옷 정말 잘 입고 나왔다.’ 생각했었어요. 화장품 아이섀도 팔레트가 낮에는 연한 색상, 밤에는 진한 색상 모두 사용할 수 있고 하잖아요. 저는 그런 걸 옷에서 느껴본 것 같았어요.”


디테일 없는 옷들로 구성된 토털룩에 조금만 변화를 줘도 여러 상황에서 통할 수 있어서 좋았고, 스타일리시하기까지 해서 좋았단 얘기. 또 불편하지 않게 입고도 핏과 길이, 색상 매치만으로 멋있게 입을 수 있게 되어 좋았단 얘기가 이어졌다.


“물론 저는 처음에 아이돌 스타 얘기하면서 발랄하게 입고 싶은 맘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발랄하게 입는다는 게 저에게는 핑크색 맨투맨? 그 정도 범위에서 벗어나질 않았어요. 그렇지만 그런 건 입기 싫고 ‘아 나는 맨날 까만 것만 입어야 되나’라고 생각했었어요. 근데 이젠 그 타협점을 찾은 것 같아요.”


늘 어두운 색만 선호했었던 모습에 변화가 생긴 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제가 정말 검은색만 입었거든요. 색상이 좀 달라진 후 물론 주위 반응도 긍정적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제 모습을 제가 맘에 들어하는 게 정말 큰 변화예요.”


아마도 그녀가 어두운 색만 고집했던 것은 그녀 스스로 장점을 보기보다는 단점만 보려 했던 부정적인 자아상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젠 ‘난 치밀한 귀차니스트인 나를 사랑해.’라는 긍정적인 자아상이 그녀가 밝은 색상의 코트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내 피부가 하얀 편이니까 난 이런 코트를 잘 소화할 수 있어.’라고.


자신의 자아상이 긍정적이지 못해서였는지 과거엔 쇼핑을 즐기지 않았다고 한다.


“저의 지난 쇼핑이 어떤 모습인지 생각해봤어요. 일단 백화점 여성 캐주얼 코너에 가요. 한번 그냥 봐요. 형식적으로 한 군데씩 들어가서 옷을 봐요. 저한테 어울리는 게 없으니까 다른 매장에 가요.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왜 나한테는 어울리는 게 없지?’하며 지하 1층 식품 매장에 가서 맛있는 거 사 먹고 집에 가죠.”


그녀의 과거 쇼핑 패턴을 듣다 보니 재미있으면서도 이토록 예쁜 그녀가 그랬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나와 이야기를 나눈 후 홀로 했던 첫 쇼핑은 어땠을까?


“이번에는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니었어요. 일단 제가 생각하는 걸 찾는다는 느낌이 강했어요. 어떤 옷을 사야겠다 하는 목적의식이 있으니까, 일단 매장에 가면 내가 찾는 옷이 있는지 없는지 물어보고 찾으니까 엄청 시간이 짧아지고, 이상한 옷 뒤적거리지 않아도 됐죠. 만약 몇 가지 옵션이 있으면, 그 사이에서 이건 디테일 있으니까 빼고 이건 길이가 안 맞으니까 빼고. 그렇게 제가 진짜 쉽게 고르는 거예요. 그리고 가격도 ‘이건 이 정도 질은 있어야 되니까 이 정도 가격은 괜찮아.’ 그런 판단이 되니까 엄청 빨리 정말 맘에 드는 걸 다 골랐어요.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렇게 옷을 사봤어요. 집에 와선, 사실 그날 진짜 돈을 많이 썼거든요, 그런데도 하나도 후회가 안 됐죠. 재밌었어요, 처음으로. 집에 와서도 ‘아 아까 거기선 예뻐 보였는데 집에 오니깐 이상하네’라는 기분도 안 느껴지고, 확신이 드니까 집에 와서도 다시 안 입어봤어요. 이미 다 아니까요.”


쇼핑을 하며 가장 좋았던 건 무엇이었을까.


“제일 좋은 건 그거였어요. 어떤 것을 사지 말아야 할지를 확실히 안 거요. 뭔가가 사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아 이건 아니지’라는 판단을 해서 아닌 건 금방 배제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옷 살 때도 편하고 입을 때도 매치하기 편해서 정말 좋았어요.”    


과거의 쇼핑 패턴에 대한 고백이 이어진다.


“예전엔 가방 하나 사려고 하면, 검색을 해요. 일단 잘 모르는 상태니까 포괄적인 검색어, ‘20대 여자 가방’을 쳐요. 그러면 ‘20대 여자 가방 브랜드 추천’이 떠요. 그러면 그중에서 골라서 샀던 거죠. 제가 아마 이대로 계속 나이가 들었으면 다들 비슷하게 사는 그런 가방 샀겠죠.”


그러자 내가 맞장구를 쳤다.


“그렇죠. 구*, 루이뷔* 같은 데서. 물론 거기서 내 정체성에 맞는 가방 있으면 사도 돼요. 그러나 그게 누구나 ‘저건 구*이야’라고 알면 재미가 없어요. 안전하긴 하겠네요.”


아마도 과거 그녀의 선택은 그녀가 어려서는 아닌 것 같다. 상당수의 30대, 40대 여성들도 그와 비슷한 선택을 하니까. 이제 그녀도 자신의 가방을 ‘치밀하게’ 찾는 쇼핑을 할 수 있길.


우리는 이제 함께 구상한 룩에서 부족한 아이템을 채우는 쇼핑을 하기로 했다. 그녀는 빠른 실행력 덕분에 쇼핑을 정말 빠르게 끝냈다. 미리 혼자서 실습을 해봐서인지도 모르겠다.


자라에서 우연히 발견한 쫙쫙 늘어나는 진청 스키니진을 입어보자 마자 바로 샀고, 밀리터리 재킷에 매치할 헤링본 미니스커트 대신 그 비슷한 회색 글렌 체크 패턴의 프릴 스커트를 샀다. H&M에서는 버건디 스키니진을 구입했고, Fossil에서는 실버 프레임의 갈색 가죽 스트랩의 시계를 구입했다. 망고에서는 아이보리 스웨터를 구입했다.


쇼핑을 마치고 나는 이 컨설팅이 ‘치밀한 귀차니스트’ 입기에 도움이 됐는지 궁금했다.


“쇼핑이나 스타일링 계획은 치밀하게 짜는데, 막상 입는 건 편하게 입는 거니까 ‘치밀한 귀차니스트’에 딱 맞는 거죠. 저는 외출하면 슬슬 귀찮아지고 후회되는 게 늘 제가 불편한 옷을 입기 때문이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나중까지 불편하지 않고 귀찮지 않죠. 색상 매치만 잘하면 불편하게 입지 않아도 스타일리시할 수 있으니까요. 제가 컨설팅 신청 글 쓴 게 올해 제가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 같아요.”





05 ‘치밀한 귀차니스트’의 평생 과제


기말고사 기간이 다가와서 그녀와 2차 쇼핑을 하기는 어려웠다. 한동안 연락이 되지 않다 몇 주 후 마침내 그녀와 연락이 됐다. 기말 고사 기간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은 나머지 병이 왔고,  몇 주간 병원을 전전했다는 것이다. 기말고사는 완전히 망쳤다고 한다.


 다행히 어느 정도 회복된 그녀와 약속을 잡았다. 시간이 없다는 그녀를 만나러 그녀의 집 앞으로 갔다. 집 앞 놀이터에서 간단히 이야기를 나눈 후 헤어졌다.




차를 몰아 귀가하는데 조금 서운한 마음이 남는다. 나는 차에서 그녀의 곡, ‘Ever Ever’를 틀었다.


자신을 허용하고 인정하는 게 평생 과제라는 걸
‘귀차니스트 양’한테 말해줬어야 했나?


그러나 그건 말 한마디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를 알아차리는 것도, 답을 찾는 것도 결국 자신의 몫. 아무리 평생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도, 결국 자신을 허용할 줄 아는 용기와 지혜를 가질 때 우린 진짜 어른이 된다. 그걸 알게 된 지는 나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래서 내겐, 이제 막 자기 탐구를 시작한 20대 초반의 그녀에게 훈계를 늘어놓을 자격이 없다. 그녀가 찾고자 하는 밝은 자신은 스스로 뭔가를 증명해 보일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찾을 수 있을 거다. 몇 달 후 그녀가 소식을 전한다.


“작년 말에 기말고사를 그렇게 망치고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스스로 더 비참하고 초라해진 것 같고. 인정받는 걸 좋아하는 제가 공공연한 중도 포기자로 낙인찍힌 듯했으니 오죽했을까요. 지금은 괜찮아졌어요.  ** 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규칙적으로 생활하면서 운동도 하고, 공부 끝나면 마음 편히 쉬기도 해요. 옷에도 여전히 관심은 많구요. 적절히 계획해서 예쁜 옷을 짠 하고 입으면, 어린이 만화 속 평범한 여고생이 마법소녀로 변신한 것처럼 신이 나요. 이런 기쁨을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가끔은 여전히 힘이 들지만 선배님과 나눴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제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의외로 간단한 답이 나올 때가 많더라구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 걱정할 필요 없겠다. 다만 어른이 되는, 그 쉬울 수 없는 과정에선 절대 중도 포기하지 말길.

화이팅!










알짜 제품 소개는 물론 스타일링 팁까지
조근조근 속삭이는 <최유리의 쇼핑레터>.
감이 아닌 생각으로 옷 입기를 도와드려요.

http://blog.naver.com/sujy62/221803459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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