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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리 Apr 24. 2017

"고지식한 저, 아무거나 입지 않아요"

<박사 논문 엎고, 스타일링 도와드려요> 일곱 번째 컨설팅 스토리


#1 “고지식해도 전 스타일리시한 게 좋아요.”


내가 학교 게시판에 글을 쓰자, 세 명의 남성 회원들이 나란히 동일한 댓글을 달았다. “남자도 되나요?” 나는 세 명 모두에게 ‘남자 분들도 가능합니다. 연락 주세요.’라고 이름과 연락처를 남겼다. △△군은 세 명 중 유일하게 답장을 보낸 친구다.


우리가 주고받는 메시지의 내용의 배열은 다른 신청자들과 역순이었다. 보통은 내 블로그에 각자가 올린 자기소개 사연을 읽고 연락을 취하여 약속을 정하는데, 우리는 제일 먼저 만나자는 약속부터 정했다. 그러고 보니 그는 내 블로그에 사연을 남긴 것이 아니었다. 상대방에 대한 어느 정도의 사전 정보가 필요했던 나는 △△군에게 간단히 자기소개를 부탁했다.


△△군은 자연과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다. 키는 177에, 말랐고, 보통 연구실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이라고 해봤자 교수님, 대학원 동료, 그리고 친구들 정도이다. 남들이 보기에 하체에 조금 더 살이 있고, 팔이 길어서 체형이 특이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피부 톤은 좀 어두운 편이다. 그리고 음악은 멜로디 라인이 강한 신스팝 장르를 좋아한다고 밝혔다. 컨설팅을 신청하며 △△군은 기본적인 옷들을 고르는 게 어렵다며, 옷을 입을 때 자연스런 느낌이 나기를 원한다고, 그리고 편한 옷들을 알고 싶다고 했다.


만나기 전까지 내 블로그에서 몇 편의 글을 읽어줬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하자, 이미 내 블로그에 들어가서 글을 읽고 있다며 내가 알려준 글들도 꼭 읽어 오겠단다.  


약속한 날이 되어 그를 만났다. △△군은 평범한 듯 뭔가 예사롭지 않은 프레드페리 점퍼를 입고 나왔다 . 쌍꺼풀이 있는 눈매가 뭔가 예리하고 어딘지 모르게 세련된 사람이라는 인상이다. 물론 옷차림은 ‘스타일리쉬하다’고 평하기에는 다소 부족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그의 얼굴에서 풍기는 이미지로부터 ‘전 아무 거나 입진 않아요.’라는 어떤 고집이 보였다.


인사를 하고도 한동안 눈을 내리깔며 낯을 가린다. 자신이 원해서 나온 자리이긴 하지만, 표정도 약간 굳어있고 나와 눈 마주치는 걸 어색해 한다. 나도 낯을 꽤나 가리는 편이고, 지금도 대화 중 내가 대답을 해야 하는 입장이 되거나 내가 이야기의 중심에 서게 되면 그 자리를 굉장히 어색해하는 편이다. 그의 긴장을 풀어줄 필요가 있었다.


내 눈에 카페에서 음료를 주문하기 위해 그가 테이블 위에 꺼내놓은 장지갑이 포착되었다. 인상적이었다. 사피아노 가죽 재질의, 겉은 묘한 회색인데 내부는 하늘색이다. 보통의 한국 남자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을 은근 튀는 색감이다.


나는 △△군의 지갑에 매료되어 ‘오!’라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이리저리 구경했다. 그 지갑에서도 ‘전 아무 거나 입진 않아요.’라는 어떤 고집, 나아가 일종의 삐딱함이 느껴졌다. 뭔가 범상치 않은 미적 취향이 드러나는 물건이었다. 그의 삐딱함이 엿보인 지갑에서 뭔가 동질감이 느껴졌다. ‘딱 내 꽈잖아!’


내가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씩 웃으며 말했다. “맘에 든다.” 자신의 취향에 대한 칭찬을 들은 △△군. 갑자기 환하게, 그러나 쑥스러운 듯 웃으며 “고맙습니다!” 꾸벅 인사까지 한다.


미적 취향이 범상치 않은 그에게 성격도 그러냐고 질문했다. △△군은 신경도 예민한 편이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성격이 감성적이라고 밝혔다. 그런 성격 탓에 여성스럽다는 말도 듣는다며 살짝 우울해한다. 감성적이고 예민하다는 말에 또 내 마음이 움직였다. ‘역시!’


반가운 마음에 재빨리 난 그를 다독여줬다. 그건 여성스러운 게 아니라고, 그건 성별 기준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성향일 뿐이라고. 이 대목에서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의 세 부족의 성 역할에 대한 연구도 동원되었다.


사람 성격에 따라 여자라도 감성적이지 않고 둔한 사람이 있으니, 감성 = 여성성의 등식은 성 역할 고정관념일 뿐이라고 열심히 설명해줬다. “그런가요?” 그는 자신의 성향이 지지받는 것이 내심 좋은가보다.  


그는 평소 자신의 성격이 귀찮고 불편하단다. 다행히 군대에서 마초적 문화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해온 터라 전역 후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남들이 무신경하게 흘리는 것을 자기 혼자서만 담아두고 신경 쓰는 것이 불편하단다. 심리학 관련 책들이 도움이 되더란 말을 내가 건네자, 그러지 않아도 <미움 받을 용기>를 읽고 있다며 가방에서 책을 꺼내어 보여준다.    


예민한 성격 얘길 하다 부모님 얘길 듣게 되었다. 자신은 감수성이 예민하고 예술을 사랑하시는 소녀 같은 어머니와 닮았고,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단다. △△군은 어머니 덕분에 클래식 공연 관람과 같은 다양한 문화적 혜택을 누리며 자라왔다고 한다. 그 영향으로 지금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즐기게 되었고, 독립 영화 관람도 종종 한단다.   


△△군이 어머니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떤 연민이 느껴졌다. 그는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는 만큼 예쁜 패션 아이템을 누리지 못하시는 모습에 불편했었다. △△군은 일본에 교환학생으로 가 있는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어머니께 에르메스 스카프를 사드렸고 그걸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모습에 뿌듯했단다.


나는 △△군의 어머니가 되어 스카프 선물이라도 받은 듯 잔뜩 몰입해서 그 얘길 들었다. 나는 △△군의 세심함에 깜짝 놀랐다.


전공은 어떻게 선택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군은 어릴 때부터 자연과학을 좋아해서 어릴 때 경시대회, 올림피아드에 나간 이력도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지금의 전공을 택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본인이 이야기를 좋아해서 수식으로 풀어내는 분야보다는 말로 풀어낼 여지가 좀 더 있는 지금의 전공을 선택하여 대학원에 진학했다.


△△군은 자신에게 ‘애 같은 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그래서 아이들을 좋아한단다. 그런데 집에서 개를 키우고 부터는 아이들보다는 개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단다. 어떤 면이 좋냐고 묻자, 갑자기 표정에 해맑은 미소가 더해졌다.

“제가 집에 가면 일단 반겨주고, 꼬리 흔들고, 저한테 와서 쓰다듬어달라고 안기고. 그런 게 좋아요.”


본인의 요청으로 △△군의 동아리를 밝힐 순 없지만 그의 동아리 가입 동기도 참 재밌다. 동아리 가입 이유는 그저 예쁜 게 좋고, 예쁜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 좋을 뿐이라서이다. 아름다움을 좋아하고 감수성 예민한 내향적 인간. 나는 그가 ‘예술가형 인간(에니어그램 4번)’일 것이라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군에게 자신의 인생을 여행이라고 가정했을 때 자신을 어떤 여행객으로 그리고 있는지 생각해보고 다음 시간까지 별칭을 정해오라고 숙제를 내줬다. 그 숙제에 대한 설명을 조용히 듣고 있던 △△군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얘기했다.


그 말씀 하시니까 한 가지 떠오른 것이 있긴 해요. ‘세련된 꼰대’요.

아니. ‘꼰대’라니. 완전 신선하다.


1인칭 표현으로 다소 흥미로운 ‘꼰대’라는 별칭의 배경은 이렇다. ‘고지식하게 원칙을 지키는 자신을 남들이 아무리 아니꼽게 보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다면 남들이 뭐라고 하건 자기의 색깔을 유지하겠다.’라는 그만의 어떤 고집이 담겨있다.


1인칭 ‘꼰대’라는 명칭에는 자신을 향한 타인의 꼬인 시선과 그런 시선에 대한 아랑곳하지 않음이라는, 두 번의 꼬임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세련된’ 이라는 형용사를 ‘꼰대’ 앞에 붙여줌으로 인해서 ‘내가 그렇다고 미적 추구 욕망이 없는 건 아니거든.’이라고 말하듯 당당한 자신을 내포하기도 한다.


‘꼰대’군은 자신의 내면이 고지식할지언정 스타일리쉬하게 입고 싶고 그것을 배우고 싶단다. 스타일링 팁을 알려주는 정보야 인터넷에 널린 게 사실이지만, 이 고지식한 친구가 굳이 나에게 컨설팅을 받고 싶다는 결정을 하게 되었던 이유가 궁금했다. 그는 내가 트렌드를 따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힌 점을 결정적 이유로 꼽았다. 그에게 뻔한 건 기피 대상이다.


‘세련된 꼰대’군은 몰랐겠지만, 그는 스타일링 컨설팅에서 나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신청자이다. ‘세련된 꼰대’군은 직감이 뛰어나다. 그렇게 탁월한 별칭을 그것도 순간적으로 정한 것이 신선하고 좋았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별칭 정하기를 어려워하는 다른 신청자들에게 나는 늘 ‘세련된 꼰대’를 모범 답안처럼 제시했다. 컨설팅을 마친 시점에서 돌아보면, 다른 신청자들의 재미난 별칭은 ‘꼰대’군의 공이 크다. ‘세련된 꼰대’라는 두 번 꼬인 그의 별칭은 다소 심심한 내 별칭 ‘조용한 말괄량이’보다 예시로서 진일보한 면이 있으니까.


그리고 이 시점에서 밝혀야 할 사항이 한 가지 더 있다. 나는 그를 만나기 전 그에게 ‘나만의 곡’을 묻지 않았다. 사실 물을 수가 없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적확하다. ‘나만의 곡’ 전수(全數) 조사의 계기가 바로 ‘꼰대’군이었기 때문이다.


‘꼰대’군에게 ‘버킷리스트’와 ‘왠지 끌리는 룩’ 숙제를 내주고 헤어진 후,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꼰대’군과 나눈 대화의 여운이 길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즈음 ‘꼰대’군으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왔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숙제 열심히(?) 해 갈게요!”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아이를 재우던 내 머릿속에 ‘꼰대’군과 두 시간 동안 나눈 대화가 맴돌았다. 그러다 갑자기 그가 좋아하는 음악 ‘신스팝’이 어떤 것인지 호기심이 발동했다. ‘신스팝’을 검색창에 두들겨 보고 찾아낸 음악에서는 그날 내가 만났던 ‘세련된 꼰대’군이 없었다.


그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제일 좋아하는 곡이 뭔가요?”


글렌체크의 60‘s Cardin입니다. 글렌체크 노래는 거의 다 좋아해요!

음악을 찾아서 들어 보았다. 내가 어릴 때 ‘로라장’에서 듣던 팝 같기도 한데 그보다는 좀 더 모던하다. 처음 접하는 장르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 음악을 듣고 내 머릿속에는 ‘세련된 꼰대’가 클럽에 구석에 앉아 음악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그에게 어울리는 옷이 뭔지에 대해서 조금 더 입체적으로 파악하게 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신디사이저의 똥똥거리는 강한 사운드는 내 귓가를 맴돌았다.



#2 “중간은 없어요. 소년과 영감 둘만 존재하죠.”


일주일이 지나고, 두 번째 만남. 나는 어찌된 영문인지 두 번째 만남부터 그에게 말을 놔버렸다. 오래 만난 사이도 아닌데 첫 번째 만남에서 느꼈던 동질감이 그만큼 컸나보다.


먼저 ‘버킷리스트’를 확인했다. 역시 ‘꼰대’군은 나와 같은 과가 맞다. ‘이거 혹시 내가 쓴 거 아냐?’ 싶을 정도로 취향이 나와 비슷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이것이었다.

‘혼자, 바닷가 비싼 호텔에서 아무 것도 안 하기’

몸을 움직이는 건 싫은데 눈으로 아름다운 대상을 보는 건 좋다는 것. 어쩜 나와 비슷한지.


다음으로 ‘왠지 끌리는 룩’을 확인할 차례다. 그가 첫날 입고 온 프레드페리의 보머와 유사한 형태의, 그러나 어찌 보면 마오쩌뚱이 연상되는 점퍼류도 있었고, 제냐의 카디건도 있었고, 긴팔 셔츠와 반바지 차림도 있었고 장폴 고티에의 화려한 보색대비 프린트가 들어간 셔츠도 있었다.  

 

그리고 그는 ‘왠지 끌리는 룩’ 뿐 아니라 평소 자신이 좋아하는 패션 아이템이 담긴 사진을 잔뜩 가져왔다. 나는 일단 그가 준비해온 사진의 양에도 압도 되었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그의 검색을 거쳐 연달아 제시되는 사진들 앞에서 나도 모르게 당혹감이 들었다.


그는 다행히(?) 나의 당혹스러움을 눈치 채지 못했나보다. 아니, 어쩌면 앞으로 자신의 스타일링을 도와줄 나에게 자신의 취향을 더 열심히 알려야 원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그랬을 것이다.

 

아디다스 프린트가 잔뜩 그려진 빨간색 스웻셔츠, 반 클리프 앤 아펠의 알함브라 목걸이, 반 클리프 앤 아펠의 별자리 시계(Midnight Planétarium Poetic Complication Timepiece), 프레드페리 옷을 입고 장난기 가득한 소년 같은 모습으로 (‘꼰대’군이 좋아하는 아티스트인) 글렌체크가 찍은 사진…….




아……. 나는 여기서 어떤 일관성을 찾아야 하는 걸까. 어떻게 길을 찾아야 하는 걸까.  


노동자 점퍼와 회색 카디건 같은 룩은 나중에 ‘젠틀한 얌체’군에게 들은 표현을 좀 빌리자면, 일명 ‘노인간지(줄여서 ‘노간’이라고도 한단다)’룩이다. 어찌 보면 ‘꼰대’라는 정체성이 이렇게 표현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는 자신만의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을 설정해 놓고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고지식함이 있다. 그 예로, 문법을 지키는 것에 민감하다는 것(이것도 나와 똑같다!). ‘꼰대’군은 그런 자신을 ‘그래머 나치(Grammar Nazi)’라고 표현하며, 그것 때문에 친구들과 사이가 불편해진 적도 있단다.


학교에서 혼자 다니다가도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에 빈 강의실 불을 끄기도 하는 자기 스스로를 가리켜 오지랖이 넓다고 표현한다. 그에게는 자기만의 이상 세계가 존재한다.


팔이 길다며 소매 길이를 맞춰야 하는데 그게 어렵다고 고충을 토로하기도 하고, 바지 길이가 적당히 잘 맞아야 한다는 얘길 길게 하는가 하면, 구김 잘 가는 소재에 대한 반감을 표현하기도 한다. 나도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머리 길이를 유지하기 위해 3주마다 한 번씩 꼭 커트를 한다고 얘기하자, 반가워한다.


한편 어떤 아이템들에서는 장난스런 소년으로 회귀하고픈 욕망이 보였다. 반바지에 긴 팔 셔츠를 매치한 룩은 어떤 점에서 좋으냐고 물었더니, 반바지에 반팔 셔츠는 어딘지 모르게 식상 하단다. 여름엔 자주 이런 식으로 매치해서 입는다고. 글렌 체크의 사진이나 아디다스 스웻셔츠, 그리고 자신이 곧잘 입고 다닌다는 엔지니어 점퍼에선 모두 그런 소년이 보인다.


다른 한편에서는 예쁜 것이 좋다는 예술가형 인간다운 면이 보이기도 한다. 화려한 색감의 장폴 고티에 셔츠나 반클리프 앤 아펠의 액세서리가 그런 맥락이다.


‘꼰대’군은 SNS으로 대화할 때 종종 “오!”라는 감탄사를 쓰기도 하고 “행복하다”, “낭만적이다”, “정갈하다”와 같은 표현을 즐겨 쓴다. 아마 그의 오지랖은 세상이 아름다워져야 한다는 생각을 전파해야 한다는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꼰대’군의 고집스런 취향을 확인하고 난 나는 슬슬 걱정이 되었다. ‘꼰대’군의 이런 취향이 자칫 잘못하면 ‘세련된 꼰대’가 아니라 ‘노동자 꼰대’ 혹은 ‘유아적 꼰대’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보여준 많은 사진과 그의 고집 때문에 머리가 아팠던 나는 한 가지 일관성을 찾긴 했다. 내가 그날 받았던 인상은 ‘예술가형 인간’들이 ‘나는 특별하다’에서 얻는 일종의 존재감을 그가 옷으로 표현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다름’을 표현하기 위해 미술작품 같은 패션 아이템을 갖고 싶어 한다거나, 그 나이대의 20대 멋쟁이들이 입는 블레이저를 기본으로 하는 정답 같은 룩(그는 ‘최다니엘’ 스타일을 예로 들었다)은 너무 뻔해서 피하고 싶어 한다는 것. 그는 블레이저 대신 노동자 점퍼 같은 야구점퍼 룩을 택함으로써 자신의 특별함을 표현하고자 한다는 것이 내가 읽은 그의 욕망이었다.


‘꼰대’군과 헤어지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던 길에 나는 그에게 내 블로그에서 ‘놈코어는 패션 트렌드일까?’를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특별함(uniqueness)의 고수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일수록 편하고 평범해 보이는 옷을 입지만, 옷이 아닌 생각의 탁월함과 아우라로 자신의 특별함을 드러낸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나도 그렇지만 ‘꼰대’군은 너드 보다는 히피에 가깝다. 너드들과 죽이 잘 맞아서 너드와의 이야기가 너무도 즐겁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만큼이나 어떤 대상에 대해 깊이 파고드는 건 그들만큼 집요하지 못해서, 혹은 지겨워서 못한다. 그날 내가 확인한 건 ‘꼰대’군의 고집인데, 이제 내게 남은 건 어떻게 타협점을 찾아서 ‘꼰대’군을 쿨한 히피로 만들 것인지였다.


‘꼰대’라서 이해해주세요.

내게 양해를 구하는 꼰대군. 나도 안다. 그의 고집. 나도 뻔한 건 ‘꼰대’군 만큼이나 싫다.


나는 그에게 쉽지 않겠지만 찾아가는 재미가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의 반응이 마치 유약한 소년 같다. 그런 자기를 좋게 생각해줘서 고맙다며, 그만큼 결과가 보람 있어야 할 거라며 내 걱정을 한다.


그의 그런 모습은 예민한 감수성이 지지받은 경험이 적었던 예술가형 인간들의 낮은 자존감이 공허한 배려로 표출된 것임을 나는 알아봤다. 나는 정색하고 그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자꾸 남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진 말구. 그러면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것 같지만, 나는 공허해지는 거지.”


그러자 그에게 이런 답이 온다.

“좋은 지적이에요. 조심해야겠네요.”       

두 번째 만남 역시 여운이 길었다. 첫 번째 여운이 동지를 만난 반가움에 의한 것이었다면, 두 번째 여운은 내게 남은 과제가 난제(難題)임을 깨달음에 의한 것이었다.



#3 그는 왕자가 되어본 적이 없었다


다음 날 나는 목사님 설교 말씀에 전혀 집중할 수 없었다(나는 비교적 앞자리에서 목사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설교에 집중하는 편이다). ‘꼰대’군의 스타일링 때문에 글자그대로 골치가 아팠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꼰대’군을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예배가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꼰대’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예배에 집중을 못하고 꼰대군의 스타일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네. 그러나 약간 결단과 설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어. 각오바람. 아름다움을 포기하자는 게 아니라 아름다움의 고정관념을 좀 탈피하자는 거야.”


잠시 후 그에게 답이 왔다. “네. 저도 변화를 위해 노력해 볼게요!”


이 시점에서 내 역할은 ‘꼰대’군이 내가 20대 때 저질러본 실수를 경험하지 않고도 이해하고 피해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경험이란 것은 본인이 직접 부딪혀보고 스스로 깨닫는 것이 좋다.


그러나 옷은 다르다. 버리는 돈, 버리는 옷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옷, 신발, 가방을 버려온 나였기에 컨설팅 신청자 개인에게는 그것을 점프할 수 있는 지혜를 전수해주고 싶었다.


며칠 후. ‘꼰대’군과 만나기로 한 날 이틀 전이었다. 나는 ‘꼰대’ 군에게 부탁을 했다. 내 블로그에서 ‘패션으로 힐링하려면’을 세 번 정독하고, ‘누구나 한 번은 공주가 되어야 한다’도 읽어달라고. 내 눈에 그의 소년적 취향은, 내가 어릴 때 존중받지 못했던 소녀적 취향을 내 20대 교사 시절에 마구 표현하였던 모습과 본질이 같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만남. ‘꼰대’ 군은 마치 자신의 소년적 취향이 바로 이거라는 듯이 엔지니어 점퍼를 입고 나타났다. 눈이 빠른 나는 이미 그가 앉아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그걸 캐치했는데, 그는 “이게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그 엔지니어 점퍼예요.”라고 굳이 알려준다. 나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알아. 봤어, 이미.”


내게 그 옷을 보여준 그에게 미안한 얘기지만, 그날 내 당면 과제는 그의 그런 취향을 점프하도록 그의 생각을 전환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약속 장소에서 커피를 주문하자마자 ‘꼰대’군이 내 글을 읽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물어봤다.


그는 내 글을 읽으며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단다. 자신도 취향이 억제된 경험이 있었단다. 고등학교 때까지 ‘꼰대’군은 (아마도 자신이 동일시하는 글렌체크의 음악처럼) ‘날티’나는 옷보다는 전형적인 ‘모범생’ 룩을 입어왔단다. 이를테면 폴로나 빈폴의 통 넓은 치노팬츠 + 피케셔츠룩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단다.


그 땐 어릴 때라 자신에겐 아무런 결정권이 없어 어떤 옷이 좋다/나쁘다에 대한 부모님의 가치관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단다. 물론 부모님이 한 번도 강요하신 적은 없었지만, 자신의 취향을 존중받은 경험은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어릴 때 자신의 예민한 감수성과 다소 특이한 취향을 존중 받은 경험이 없는, 그런 의미에서 ‘왕자’가 되어본 적이 없는 ‘꼰대’ 군에게 나는 이 말을 꼭 해야만 했다. “꼰대군! 그 취향, 내가 존중해 줄게.” 그렇지만 아디다스 스웻 셔츠, 장 폴 고티에 셔츠 같은 옷을 갖고 싶다는 욕망을 옷을 입은 몸으로 표현해 버리면 ‘세련된 꼰대’라는 이미지와 멀어질 수 있다고 일러줬다.


‘꼰대’군에게 물어봤다. 혹시 영화 <프란시스 하>를 봤는지. 보진 못했단다. 30대 후반에 그 영화를 본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지나간 나의 20대를 조우하는 것 같았다. 이 영화로부터 내가 느낀 감정은 공감보다는 부끄러움이었다. 내 과거 굴욕 사진을 보는 듯한 오글거림에 가까운 부끄러움.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에서 영화를 짧게 소개하자면 이렇다. 이 영화에는 아직 미처 어른이 되지 못한 청춘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을 법한 이런 저런 거친 감정들이 여과 없이 그려져 있다. 그 뿐이 아니다. 이 영화는 미숙하고 불안한 한 개인이 그 모든 찌질함을 직접 체험해 보고 나서야 온전한 자아를 가진 어른으로서의 관문에 진입하기 시작한다는 결론도 포함한다.


내가 그 영화를 보며 부끄러움을 느꼈던 이유는 나도 그 시절 딱 그랬기 때문이다. ‘꼰대’군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그 시절을 이미 다 겪어낸 내가 그 영화 속 주인공을 바라보는 시선과 같았다.  


나는 그에게 글자 그대로 ‘굴욕’이라고 할 수 있는 10년 전 내 과거 사진을 보여줬다. 지금보다 10킬로는 더 나가는 통통한 몸, 안 어울리는 화장을 과하게 한 모습, 핑크색 꽃무늬 카디건, 레이스 티셔츠, 과한 프린트 가득한 원피스 드레스를 입은 내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그런 내 사진들을 숨김없이 보여주며, 나는 내가 그를 바라보는 심정이 어떠한지 얘기했다. 똑똑한 ‘꼰대’군은 내가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내 말의 의도를 빠르게 이해했다.


나는 그의 취향은 내가 충분히 이해했고, 존중하지만, 취향의 중심에 있는 ‘남들과 다르고 싶다’는 욕망을 그의 ‘왠지 끌리는 룩’과는 다른 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그에게 그 점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남과 다르다’든 ‘날티’든 그게 뭐가 됐든 그건 얼마든지 스타일리쉬하게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래야 그는 ‘노동자 꼰대’ 혹은 ‘유아적 꼰대’가 아니라 ‘세련된 꼰대’가 될 수 있다. 나에게는 그가 진정 ‘세련된 꼰대’가 되도록 도울 의무가 있었다.


내 얘길 듣고 ‘꼰대’군도 호응을 해줬다. 쉽진 않겠지만, 나를 믿고 자기도 변화를 위해 노력해 보겠단다. 아마도 과거의 취향으로 회귀하고 싶어 고집을 부리는 모습도 간간히 튀어 나오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What not to wear’ 출연자들처럼 그 때 잠시 피팅룸에서 울며 버티는 모습일 것이란다. 그러나 나아질 거란다.  


나는 ‘꼰대’ 군에게 ‘남과 다름’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그의 취향을 표현할 새로운 방법을 제안했다. 옷은 심플하게 입되 호피 무늬 뿔테 안경을 쓰자는 것. 소년스러운 취향을 표혀내줄 장난스런 속옷을 구입하자는 것. ‘꼰대’ 군은 흔쾌히 내 말에 동의했다. 여자들이 야한 속옷 사는 심리가 이해된단다.


이후 우리는 ‘꼰대’군만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 리스트를 만들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함께 랩탑 컴퓨터를 켜고 패션 사이트에서 토털룩을 열심히 분석했다. 어떤 룩은 왜 스타일리쉬한지, 어떤 룩은 왜 그렇지 않은지. ‘반대의 법칙’, ‘빼기의 법칙과 더하기의 법칙’, ‘색상 조화의 법칙’, ‘여백미의 법칙’ 등을 토털룩에 적용시켜 꽤 긴 시간동안 트레이닝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 ‘꼰대’군은 자신만의 룩을 완성하기 위해 자기 옷장의 아이템 하나하나를 묘사해주었고, 그것을 스타일리쉬하게 소화하기 위해 필요한 아이템 리스트를 만들어 갔다.


그는 자신의 옷장 속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템으로 네이비 하이넥 반코트를 꼽았다. ‘피코트도 아니고, 무릎 정도 길이의 보통의 기본 겨울 코트도 아닌 코트라. 역시 전형적인 룩을 피하겠다는 것이로군.’라고 생각하며 나는 그 반코트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리는 다가오는 겨울을 위해 그 코트를 기본 아우터로 전제했을 때 그것과 함께 매치할 수 있는 룩을 구성해 보았다. 그레이 헤링본 슬랙스, 아이보리 니트, 스카이블루 셔츠, 브라운 스니커즈, 생지데님, 버건디 셔츠, 화이트 스니커즈, 호피무늬 안경 정도가 우리가 구입해야 할 아이템의 리스트다.



#4 ‘특별함’의 새로운 표현 방식


여의도의 쇼핑몰에서 ‘꼰대’군을 만났다. 그날 쇼핑은 ‘스키어301’군과 함께였다. 내향적 인간인 ‘꼰대’군은 다른 사람과 함께 쇼핑을 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인지 다소 불안한 표정으로 약속 장소에 서 있었다. 약속 장소 옆 망고 매장에서 미리 구경을 하느라 신이나 있었던 ‘스키어301’군을 불러와 서로 인사를 시켰다.


우선 그날 구입해야 할 리스트를 점검했다. 물론 나는 그와 함께 기본 아이템 중심으로 리스트를 구성하긴 했지만, 나에게는 그의 정체성을 잘 표현해줄 아이템을 찾아줄 의무, 그래서 그를 ‘왕자’로 대해줄 의무가 있었다. 물론 그가 그렇게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맨 처음 우리는 망고에서 매우 촉감이 좋고 부드러운 플란넬 재질의 스카이블루 셔츠를 봤었다. ‘꼰대’군은 피부가 민감한 편이라 섬유의 재질을 중시했다. 망고의 셔츠는 흠잡을 데 없이 좋았지만, 가격대가 다소 높았다. ‘꼰대’군은 그 셔츠를 세일 기간에 구입할 거란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우리는 유니끌로로 향했다.


유니끌로에서 플란넬 재질의 스카이블루 셔츠를 발견했으나 사이즈가 없었다. ‘꼰대’군은 그 셔츠의 촉감이 맘에 든다며 같은 걸로 다크 네이비 색상의 셔츠를 구입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말렸다. 촉감은 좋은데, 색상이 문제였다. 거의 블랙에 근접한 다크 네이비의 셔츠는 어두운 편인 ‘꼰대’군의 얼굴빛을 더 어두워보이게 했다.


그 때 유니끌로의 셔츠 코너에서 내 레이더망에 포착된 데님셔츠가 있었다. 블루와 네이비 사이의 색상의 데님셔츠인데, 네 개의 흰 도트가 모여 마름모를 이루는 무늬가 전체적으로 균일하게 퍼져있는 디자인이었다.


‘꼰대’군의 얼굴을 어두워보이게 하지 않으면서도 특별한 것을 좋아하는 ‘꼰대’군의 정체성과도 맞을 것 같았다. 그러나 ‘꼰대’군은 내가 추천하는 그 셔츠를 보고 셔츠에 무늬가 들어간 옷을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내가 가르쳐준 ‘빼기의 법칙’을 언급하며 디테일이 있는 옷은 피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우리가 하지 않았냐며 꺼렸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그런 디테일은 다른 옷과 어울리기에 방해가 되는 디테일도 아니고, 아이보리 스웨터와 함께 매치했을 경우 ‘감추기의 법칙’에 따라 셔츠 칼라와 소매 끝만 살짝 보이기 때문에 충분히 절제되면서도 멋 부린 룩을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신반의하며 데님셔츠를 입어 본 ‘꼰대’군의 소감, “입어보니까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유니끌로에서 적절한 아이보리 스웨터를 발견하지 못한 우리는 지오다노에서 옮겨서 아이보리 스웨터를 구입했다. 꽈배기가 들어간 스웨터는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도 않고 추천도 하지 않지만, 과하지 않은 꽈배기가 들어간 스웨터라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역시 꽈배기는 꽈배기. 나중에 ‘꼰대’군은 이 스웨터 말고 다른 걸 샀어야 했다며 약간 후회를 했다. 옆에서 엄마같이 좀 더 옷에 트집을 잡아가며 골라줄 걸 후회가 되었다.


우리는 ‘세련된 꼰대’의 정체성을 잘 표현해줄 다소 과감한 호피무늬 안경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쇼핑몰 내 안경점으로 들어갔다. 여러 가지 안경을 다 써봐야 과감한 것도 고를 수가 있는데, ‘꼰대’군은 마냥 수줍어만 했다. 열심히 안경을 바꿔 써가며 거울 앞을 떠나지 않던 ‘스키어301’군과 대조적이었다.


내가 그의 수줍음을 깨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뻔뻔한 표정과 자세로 과감한 디자인의 선글라스를 쓰곤, ‘꼰대’군에게 물어봤다. “어때?” 내 얼굴을 보더니 ‘꼰대’군은 다 잘 어울린단다. 그래서 내가 질문했다. “왜 다 잘 어울리는 줄 알아?” ‘꼰대’군은 그럴싸한 답을 못했다. “내가 쓰면 다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고 쓰기 때문에 잘 어울리는 거야. 자신감이 제일 중요해!” 내 말을 듣고 알았다고는 했지만 그는 안경점을 떠날 때까지 몇 개 써보지도 못했고 어색해 하기만 했다.


스니커즈를 보기 위해 신발 매장으로 향했다. 디테일이 없는 화이트 스니커즈, 그리고 다소 포멀한 룩에 부드러움을 가미할 갈색 스니커즈를 찾기 위해서였다. 평소 프레드 페리를 좋아하는 ‘꼰대’군답게 다른 브랜드의 스니커즈는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가보다.


그러고 보니 ‘꼰대’군은 소년 같은 옷과 영감 같은 옷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프레드 페리를 (게다가 글렌체크가 프레드 페리를 입고 뮤직비디오 촬영까지 하였으니) 안 좋아할래야 안 좋아할 수가 없다. 그 날 ‘꼰대’군은 프레드 페리의 월계수 로고가 예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슬랙스를 찾으러 우연히 들어간 H&M에서 ‘꼰대’군은 또 야구점퍼처럼 생긴 모직 점퍼를 발견하곤 입어봤다. ‘꼰대’군은 그 옷이 정말 맘에 든다며, 나중에 꼭 구입할 거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 정도로 쇼핑을 마무리짓고 저녁 식사를 하고 헤어졌다.


집으로 오는 길. 내가 그의 ‘노동자 점퍼’ 사랑을 몰랐던 건 아니지만, 재미있었다.


뭐 하나 맘에 들면 그것만 구입하는 경향이 내게도 없는 건 아니라 그런 것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가 좋아하는 ‘노동자 점퍼’는 상체가 마른 ‘꼰대’군의 몸을 보완해주지 않는다.


‘꼰대’군에게는 아직 자신의 몸까지 토털룩의 일부로 포함시켜 객관화하는 눈이 부족해 보였다. 나에게도 그 눈이 장착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 이해하기로 했다. 이렇게 되면 설득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나는 그에게 야구점퍼류의 아우터는 어울리지 않으니 그만 구입하자고, 대신 블레이저를 구입하는 건 어떠냐고 물어보니, 블레이저는 종종 입는다며 이미 세 개나 있단다. 나와 정체성에 맞는 옷을 찾는 작업을 하는 상태라 ‘꼰대’군은 블레이저를 일부러 피하는 눈치다. 그에게 확인해보니 뻔한 모범생 같은 룩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블레이저를 피하는 것이 맞댄다.


이런 저런 학회 일로 바쁘다는 그를 기다려 몇 주 후 이전의 쇼핑을 보완하기 위해 오전 10시 반 잠실의 쇼핑몰에서 그를 만났다. 오후에 ‘젠틀한 얌체’군이 합류할 것이라고 하자, 지난번에 ‘스키어301’과 함께여서 너무 민망해서 혼이 났다며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오기 전에 꼭 일을 다 끝내고 갈 거란다. 그의 낯가림이 별꼴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해하기로 했다.


우리는 먼저 안경을 보러갔다. 지난번의 안경 착용 시도가 너무 소극적이었다며 이번에는 제발 뻔뻔하게 착용해 보자고 당부를 했다.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꼰대’군에게 나는 의도적으로 가장 말도 안 되게 뺀질해 보이는 사각의 호피무늬 안경테를 골라 권했다.


이번에는 ‘꼰대’군도 여의도에서와는 달리 안경을 쓰고 나를 당당히 응시한다. 그랬더니 다소 과해보이는 그 안경이 글렌 체크의 ‘60’s Cardin’을 연상시키듯 ‘세련된 꼰대’라는 이미지와 딱 맞아 떨어졌다.

 

나는 그가 안경 쓴 모습을 나중에 다시 확인할 수 있도록 사진을 찍어줬다. 처음엔 안경이 너무 ‘날티’난다며 주저하던 ‘꼰대’군도 점점 아무렇지도 않게 이것저것 다 착용해 보았다. 우리는 나중에 함께 사진을 확인해본 결과 처음에 써본 과감한 안경이 ‘세련된 꼰대’라는 사람의 이미지에 가장 맞을 것 같다며, 처음의 호피무늬 뿔테 안경으로 결정했다.  


안경점 건너편에 에이랜드(Aland)가 보였다. 온갖 유니크함이 다 모여 있을 것 같은 그 곳에서 ‘꼰대’군의 소년적 취향을 표현해줄 아이템이 있지는 않을까 생각하며 일단 들어가 보기로 했다. 다양한 아이템을 자유롭게 구경하다가, 무릎길이의 야상 코트가 눈에 띄었다.


원래는 그런 옷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힌 그는, 입어보더니 맘에 들어 했다. 내가 보기엔 그의 피부톤과 잘 어울리기도 했지만, 모범생 같은 ‘댄디함’에서 살짝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 옷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보았다. 게다가 노동자 점퍼보다는 훨씬 더 스타일리쉬했다.  ‘꼰대’군은 그 옷을 구입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찍어준 사진 속 자신의 룩을 보며 나중에 구입하고 싶단다.


유니끌로에서는 마침 청바지가 2만원 세일 중이었다. 그는 생지 데님보다는 착용감이 더 편한 다크 네이비 색상의, 아주 살짝 워싱이 들어간 청바지를 구입했다. 코모도 매장에서는 스키니한 핏의 헤링본 소재의 슬랙스가 아주 맘에 들었는지 두 번 고민 하지 않고 바로 구입했다. 그는 제대 후 지인의 권유로 생애 최초의 스키니 핏의 바지를 입어본 뒤로 스키니 핏의 바지를 좋아하게 되었단다.



갈색 슈즈가 필요한 그에게 나는 첼시 부츠의 매력을 소개하고 싶었다. Cos 매장에 들러 다크 브라운 첼시 부츠를 착용해보길 권했는데, 실제로 착용해본 ‘꼰대’군은 정말 예쁘다며 탄성을 질렀다. 비슷한 디자인으로 직구를 하든, 다른 브랜드에서 사든 조금 더 합리적인 가격의 것을 구입하기로 하고 매장에서 나왔다.


마지막으로 H&M에 들러 버건디 셔츠를 입어보기로 했다. 매장에 가 보니, 가지색에 가까운 셔츠와 다크 레드의 약간 광택 소재의 셔츠가 있었다. 나는 아주 많이 톤 다운된 다크 그린 치노 팬츠를 발견하고, 다크 레드보다는 조금 더 차분한 느낌이 나는 가지색 셔츠와 함께 매치해 볼 것을 권했다.


초록과 보라색 계열은 채도가 높을 경우 매우 강렬한 조합이지만 톤이 차분할 경우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화려한 느낌을 줄 수 있다. 아무런 무늬도 디테일도 없는 바지와 셔츠였지만, 나는 그의 ‘왠지 끌리는 룩’에서 보았던 욕망을 그런 방식으로 접근해도 좋겠다고 판단했다.


다소 모험적인 시도라며 약간 겁을 냈지만 피팅룸으로 순순히 들어간 ‘꼰대’군. 잠시 후 피팅룸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는 탄성을 질렀다.

이 바지! 바지가 정말 굉장한데요? 그런데 저희 부모님은 날티 난다고 별로 안 좋아하실 것 같아요.

지금은 부모님 눈치를 보지 않는다고 부인하면서도 자신의 룩에 대한 감탄에 연이어 부모님이 자신을 바라볼 시선을 걱정하는 걸 보니, 그가 아직 완전한 성인이 되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가보다. 나는 얼른 강한 어조로 그의 생각을 흔들었다.

“우리가 여기서 그런 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잖아!”




#5 새로운 특별함, 가장 높은 경지


2주 후, 그의 인터넷 쇼핑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고, 변한 모습을 사진으로 담기 위해 만났다. 나는 ‘꼰대’군의 연구실이 위치한 건물로 갔다. 연구실에 있던 ‘꼰대’군은 다크 그린의 ‘굉장한 바지’와 가지색 셔츠, 그리고 평소 자신이 아끼던 네이비색 하이넥 반코트를 입고 나와 줬다.

나는 그날 옷을 차려입고 멋진 아우라를 풍기는 그의 모습에 많이 놀랐다. 아무리 수줍어하는 그라 할지라도 그에게는 스스로를 표현하고 싶은 본능, 끼가 있다. 그게 또 예술가형 인간의 특징이기도 하다.


대견했다.


그날 저녁 연구실에서는 ‘꼰대’군에게 소개팅이 있는 게 아니냐 등 관심이 높았다. 그러나 ‘꼰대’군은 그날 당연히(?) 아무 일이 없었고, 사람들이 자신의 변화를 알아봐주고, 그로 인해 연구실 분위기가 잠시 재미있어지는 것이 즐거웠을 뿐이다. 자신으로 인해 사람들이 잔잔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을 평소에도 즐긴다며.


그런 얘길 나누며, ‘세련된 꼰대’의 정체성에 맞는 스타일링이 잘 이루어진 것인지 궁금했다. 가장 유용했던 법칙이 어떤 것이었냐고 묻자, 다른 신청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빼기의 법칙’이 가장 유용했단다.


늘 쇼핑 장소에서 순간의 감정은 디테일이 있고 무늬가 있는 것에 가서, 그런 옷을 만지게 되고 갖고 싶지만, 그것을 막상 매치하려고 하면 스타일링이 제한되기 때문에 오히려 재미없고 뻔한 룩이 되기 쉽다는 얘기를 한다.


유니끌로의 하얀 마름모꼴 도트 무늬가 들어간 데님 셔츠가 그런 점에서 가장 맘에 드는 옷이었단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옷이지만, 아이보리 색상의 다른 옷과 매치했을 때 세련된 특별한 룩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을 이유로 꼽는다.


나는 그의 소감을 들으며, 아마도 그 옷이 본인의 ‘특별함’에 대한 욕망을, 입고 다니기에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방식으로 풀어낸 옷이라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꼰대’군의(그리고 나의) 삐딱함의 본질은 따지고 보니 고지식함과 통한다. 그에게는 스스로가 정한 어떤 이상 세계가 존재한다. 그래서 스스로가 정한 이상을 지켜야 하고 그것이 옳다고 밀어붙이는 면이 있다. 만약 그 이상을 원칙대로 지키지 않는 대상을 발견하면,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이 불편해지는 것(보통은 말보다 표정으로 드러난다). 그것이 삐딱함이다.


블레이저를 입지 않으려는 그의 삐딱함의 기저에 깔린 이상은 뭘까. 잠시 생각해 보니 누구든 옷을 입음이라는 행위를 자기 개성을 표출시키는 통로로 생각해야 한다는, 그러기 위해서 트렌드를 초월해서 옷을 입어야 한다는 그의 이상이 보인다. 그의 그런 이상 때문에 트렌드를 따르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내 컨설팅의 취지가 ‘꼰대’군의 맘에 들었을 것이다.


그는 처음에 컨설팅을 신청하며, 편안한 옷을 입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었다. 나중에 ‘꼰대’군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나니, 그토록 ‘다름’에 대한 고집이 있고, 깔끔하고 정돈된 옷을 좋아하는,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 있는 그가 편안함을 내세웠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내가 편안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그가 웃으며 말한다.

“그 땐 잊고 있었죠. 활동성과 스타일리쉬함이 공존하는 것이 제일 높은 경지라는 걸요.”


컨설팅 과정에서 나는 그를 ‘왕자’로 대해주고 싶었다. 그 과정을 거친 그가 ‘세련된 꼰대’라는 쿨한 히피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 그게 이 컨설팅에서 내게 주어진 과제였다. 그러나 사실 내가 그 ‘세련된 꼰대’를 완성해줄 수는 없다. 그건 평생 스스로가 해내야 하는 몫이니.


스티브 잡스나 마크 저커버그처럼 남과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다르다’의 진짜 고수들만이 편하고 평범한 놈코어룩을 입더라도 자신만의 아우라로 특별해지는 법.


이제 그가 입어야 할 것은 노동자 점퍼나 단지 디테일이 빠진 옷이 아니라, 그 무엇을 입더라도 나는 남과 다른 생각을 하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건강한 자존감이다.


△△△,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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