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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리 Nov 07. 2017

굿바이, 샤넬백!

에필로그



01 하이엔드 브랜드의 ‘명품’ 전략


가끔 주부 대상의 잡지를 뒤적이다 보면 ‘최고급’이라는 수식어를 내건 중저가 브랜드의 광고를 접한다.

 

‘이 브랜드가 최고급은 아닌데.’
‘진짜 최고급이라면 최고급이라는 말은 필요하지 않지.’


우리가 정말 ‘최고급’이라고 인식하는 디자이너 브랜드, 소위 명품이란 브랜드의 지면 광고에선 절대로 ‘luxury’, ‘high end’ 등의 직접적인 표현은 쓰지 않는다. 대신 브랜드 고유의 정체성, 디자이너의 감각, 원단의 희소성, 장인들의 수작업 같은 과정을 포함시켜 자신들이 만드는 상품이 ‘최고급’이 되도록 한다.


그들은 광고에서 ‘최고급’이라는 언어 표현 대신, ‘최고급’임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도록 하는 비언어적 상징체계, 즉 사진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줄 안다. 조나단 크레리가 말했듯 ‘사진은 보는 이의 욕망을 일으키는 권력의 도구’라는 걸 너무도 잘 안다는 듯이.


디자이너 브랜드의 지면 광고 사진이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 것은 약간은 비현실적 공간에 존재하는 모델, 그리고 모델이 그 속에서 그 브랜드의 상품을 걸치고 있는 왠지 모를 고급스런 분위기이다. 보는 사람은 그 사진에서 전반적으로 풍기는 ‘거리감’으로부터 ‘나도 저 속에 있는 인물처럼 되고 싶다’는 매혹을 느끼고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한 후, ‘그럼 나도 저것을 가져야 하겠네’라는 소유의 욕망을 품게 된다.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거리가 주는 독특한 현상(the unique phenomenon of a distance)”을 가리켜 ‘아우라(aura)’라 불렀다. 범접할 수 없는 인물(주로 유명인)이, 우리가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환상의 공간 속에서 물건을 걸치고 있는 그 모습이 ‘아우라’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다. 디자이너 브랜드가 사진을 활용하는 전략과 상반되게도, 벤야민은 사진이라는 미디어가 사진 속 대상이 주는 거리감을 없애줌으로써 아우라를 손상시킨다고 비판했다.


결국 럭셔리 브랜드는 벤야민이 말한 어떤 대상의 ‘아우라’와 사진이 주는 거리감 파괴, 그리고 크레리가 말한 사진이 주는 매혹 사이의 적정 지점에서 사진을 광고에서 매우 영리하게 잘 활용하는 셈이다. 사진 속 이미지에서는 보는 이가 ‘뭔가 고급스럽다’라는 거리감을 충분히 느끼게 하고, 사진 자체가 주는 거리감 파괴의 기능으로 ‘저것이 저 사람 것만의 것이 아니라, 내 것도 될 수 있지 않을까?’ 다소 만만함을 느끼게 하며, 결국 ‘가져야겠어!’라는 욕망까지 선사하니 말이다.




02 ‘명품 걸친 사람’을 위한 변론


《럭셔리 신드롬》의 저자 제임스 R. 트위첼은 상류층이 아닌 보통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은 명품을 소비하며, 그들은 귀족적 이미지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명품을 소유하고자 한다고 주장한다. 비록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도 귀족이 되어본 듯한 기분을 맛보기 위해 명품을 소비하고자 한다는 트위첼의 해석은 사진과 ‘아우라’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증명해주는 듯하다.


트위첼은 사치품을 소비하는 자들의 선택을 비합리적 행위라 간주했던 베블런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소비를 사랑하며 소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베블런이 말하듯 소비자들은 멍청하지 않으며, 물건이 내포하는 어떤 이미지를 소비하고자 하는 나름의 ‘합리성’에 근거해 소비 행위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정신적 가치를 물려받지 못한 이 세계에서는 겉만 번지르르한 물건을 비싸게 사서 쓰는 것이 아무 것도 소비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트위첼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고귀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그들 중 상당수는 자신이 고귀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비참함을 경험하지 않기 위해 물건을 소비하는 행복(?)을 선택한다고 지적한다.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과거 내가 선택한 도구는 ‘샤넬백’이었다. 내 단골 인터넷 쇼핑몰 사장이 사진 속에서 늘 두르고 있던 그 ‘샤넬백’이 내 것이 되면, 나도 그녀처럼 화려한 삶을 누리는 사람이 될 것만 같았고, 내 삶이 달라질 것 같았다. 물론 ‘샤넬백’은 내 삶에서 잠시 벗어나 백화점이나 비싼 레스토랑에 갈 때 나를 위장(?)시켜 준 건 사실이다.


그러나 내게 ‘귀족이 된 것 같은 기분’을 경험케 해주었던 ‘샤넬백’이 내게 처음부터 결여되어 있던 ‘정신적 가치’를 채워줄 수는 없었다. 트위첼이 말하듯 (나를 포함한) 인간이 소비를 사랑하는 존재이긴 하지만, 나의 소비는 ‘정신’의 결핍을 잠시 망각하게 해줄 뿐 결핍을 채워줄 수는 없었다. 몇 년 후 난 우울증이라는 고통스런 과정을 마주해야 했다.




03 ‘멋있다’ vs. ‘멋 냈다’


우리는 어딘가 탁월하고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에게 ‘명품’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내가 만난 ‘명품인 사람’이 그다지 많진 않지만, 나는 그런 분으로 대학 시절 S 교수님을 꼽고 싶다. 지금은 퇴임하셨지만, 지금도 여전히 다른 대학 총장으로, 시민운동의 정신적 지도자로, 책의 저자로 활동 중인 분이다.


내가 입학하던 무렵 그분은 이미 유명인이었다. 나는 멀리서나마 몇 번 뵌 S 교수님의 수업을 3학년 2학기 전공필수 과목으로 들을 수 있었는데, 수강신청을 하던 무렵 그분의 사회적 명성 때문에 몇 가지를 우려했다. 그 수업이 너무 난해하지 않을까, 휴강이 잦지는 않을까, 너무 무서운 분은 아닐까.


내 우려는 기우였다. 주교재가 난해했던 것과는 달리 강의는 깊이가 있으면서도 쉽고 재밌었고, 휴강이 거의 없었지만 어쩌다 휴강이 발생하면 반드시 보강을 해주실 정도로 성실히 수업에 임해주셨으며, 전체 수강생들과 자판기 커피를 나누며 잔디밭 야외수업도 진지하게 이끌어주셨다. 난해한 이론을 설명해 주시던 도중 곱슬머리 백발에서 잔잔히 퍼지는 그분의 미소는 작은 체구와 어우러져 소년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이후 내가 대학원에 진학하고 교수님을 가까이에서 뵙게 되면서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내가 그분을 겉으로 보았을 때 느꼈던 것 이상의 검소함이었다. 교수님께서는 늘 몇 안 되는 옷을 돌려가며 입으셨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셨으며, 연구실엔 에어컨도 들이지 않으셨다.


그분이 벨루티 구두에 제냐 슈트를 입으시고, 메르세데스 벤츠를 타고 다니셨다면 어땠을까. 잠시 그 모습을 그려보니 재미있다. 그러셨어도 변함없이 멋있으셨을 거란 생각을 해보지만, 그건 이미 그 분의 정체성과는 거리가 멀다.


만약 S 교수님께서 돌려 입으셨던 양복을 인격적으로 존경할 수 없는 사람이 입었다면 나는 그 옷차림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아마 그랬다면 그 사람의 외양은 그저 꾀죄죄해 보일 뿐이다.


내가 S 교수님의 옷차림을 ‘검소함’으로 평가한 것은 S 교수님께서 그분의 철학이 그분 자체인 ‘명품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분의 낡은 양복은 그분의 인품과 어우러져 소탈하지만 ‘멋있다’는 찬사의 대상이 되었다.


반면, ‘명품인 사람’이 명품을 걸치면, 우린 사치스럽다는 인상을 받기보다는 자신에게 걸맞은 물질을 누리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사람의 ‘아우라’는 불필요한 수준으로까지 극대화되어 버릴 것 같다. 달리 말하면, 신비주의라는 커텐 속에 들어가 버린 톱스타처럼 ‘멋있다. 그러나 다가갈 수 없다’의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격적으로 전혀 존경할 수 없는 사람이 명품을 걸친다면 어떨까. 명품 걸친 사람들의 ‘갑질’로 사회면이 떠들썩해질 때마다 나는 늘 같은 현상을 목격한다. 올곧은 ‘정신’을 갖지 못한 사람이 자신의 내면의 경박함을 드러내 보이는 순간, 역설적이게도 그 사람이 걸친 명품은 그 사람의 경박함을 부각시켜주는 가장 효과적인 장치가 되어버린다. 결국 그 사람이 걸친 명품은 ‘멋 냈다’는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만다.




04 샤넬백으로 ‘멋 냈다’



난 타인에게 나의 경박함을 보여줄 만큼 갑질을 할 위치에 있어본 적도 없었고, 그런 적도 없다. 그러나 나 역시 ‘멋있다’보단 ‘멋 냈다’의 경우에 해당했다.


우울증으로 상담 치료를 받던 무렵, 학과의 C 교수님 모친상 소식을 접하고 문상객 차림으로 블랙 드레스와 ‘샤넬백’ 룩을 선택했다. C 교수님과 인사를 나눈 후, 이미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던 후배들과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후배들은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며 그 자리의 어색한 기류의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후배들은 내 ‘샤넬백’에 스치듯 시선을 고정시키며 뭔가 불편해 했다.


내가 조용하고 내향적인 사람은 맞지만 타인이 나를 어려워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 적은 없었다. 나는 언제나 조용하고 깊은 소통을 원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날 나의 ‘샤넬백’은 내가 원하지 않는 범주의 거리감을 발생시켜 나를 타인과 고립시키며 내가 타인과 소통하기를 방해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싶은 선배’가 아니라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나는 늘 ‘특별한 사람’이 되기를 갈망했지만, 난 내가 원해온 ‘특별함’이 ‘비싼 물건 소유’와 같지 않다는 걸 그 전까진 몰랐다.


난 그때까지도 내가 무의식적으로 추구해왔던 나만의 가치가 무엇인지 몰랐고, 내 정체성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내가 자랑스럽게 들어왔던 샤넬백이 내 정체성을 표현하는데 방해가 되는 매우 거추장스러운 물건임을 알았다.


확실한 브랜드 정체성과 퀄리티 모두를 갖춘 진짜 명품은 결코 명시적 언어로 ‘최고급’임을 표현하지 않는다. 진짜 맛집은 ‘맛있다’는 언어적 표현을 고객에게 양보하듯, 하이엔드 브랜드는 ‘최고급’이라는 언어적 표현을 소비자에게 양보한다.


나에게 S 교수님은 사람을 명품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겉에 걸친 ‘명품’이 아님을 가르쳐주신 분이었다. 어쩌면 자신만의 ‘정체성’과 인품이 결여된 사람들이 명품을 걸치는 행위는 (‘최고급’임을 언어라는 촌스러운 방식으로 내세우는 중저가 브랜드 광고처럼) ‘나는 명품인 사람은 아니지만, 명품으로 좀 봐주면 안 되겠니?’라는 외침 같다.


나는 ‘샤넬백’을 들며 가브리엘 샤넬의 패션 철학을 본받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고, 퀄리티를 높이려는 샤넬의 장인 정신에 진심으로 공감한 적도 없었다. 물론 어떤 ‘정신’을 추구하는 삶을 살겠다는 나만의 정체성도 내겐 없었다. ‘정신’이 결여되어 있던 무렵의 내 어깨에 걸쳐 있던 나의 ‘샤넬백’은 ‘나를 명품으로 봐줘’라는 공허한 울림의 도구였다.




05 굿바이, 샤넬백!



어차피 ‘정신적 가치’를 물려받지 못한 이 세계에서 스스로 그것을 찾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기에, 비싼 물건 갖기라는 차선이 그리 나쁠 것 없다는 트위첼의 변론은 그럴싸하다. 나 역시 내가 사랑해야할 내 정체성을 몰랐기에 내면을 가꾸고 나를 사랑해주는 대신, 물건 소비라는 차선을 택했었다.


그러나 정신적 가치 찾기가 쉽지 않다는 이유로 그것을 미루어 두기만 한다면, 반복적으로 비싼 물건을 사도 공허함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것이 내가 쇼핑중독 끝에 우울증을 만나며 확실히 깨달은 사실이다.


끝없는 우울함의 나락으로 떨어지던 나는 살고 싶었고, ‘정신적 가치’를 물려받지 못했음에 누군가를 원망하기 보단, 스스로 그것을 찾기 위해 발버둥 쳤다. 치유의 과정이 고통스럽고 힘겨웠지만,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나만의 ‘정신’, 나만의 ‘정체성’을 찾는 건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진심으로 행복하고 싶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도 괜찮다는 오드리 헵번의 점프 사진에서 큰 용기를 얻은 난 나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내 삶 전체를 돌아보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것이 좋고, 누군가와 내 세계를 소통하길 원했던 난, 블로그에 찾아온 분들과 내 세계로 소통하는 기쁨을 맛보며 처음으로 살아있음을 경험했다.


박사 논문 중단했지만, 글 쓰는 게 좋고 옷을 사랑한다는 내 정체성이 뭐 어때서?



나는 블로그에 글을 쓰는 동안 ‘조용한 말괄량이’라는 내 정체성을 찾고,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 이후, 과거의 내게 잠시 다른 세상을 맛보게 해주었던 ‘샤넬백’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내 정체성을 찾은 이후 난 누군가의 사진 속 ‘샤넬백’ 세상을 동경하지 않는다.


그보다 난 ‘조용한 말괄량이’의 현실 세계를, 조금 더 ‘조용한 말괄량이’가 꿈꾸는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매일 고군분투하는 길을 택했다.


블로그에 축적되었던, 옷을 사랑하는 ‘조용한 말괄량이’의 옷 입기 노하우는, 보다 많은 분들이 건강한 의생활을 경험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여자, ‘패션 힐러’로서 소통할 수 있는 컨텐트가 되었고, 그 컨텐트는 《오늘 뭐 입지?》로 출간 되었다.


또한 ‘패션 힐러’로서의 글쓰기는 행복한 옷 입기, 건강한 의생활을 원하는 분들을 위한 면대면 컨설팅으로 확장되었고, 나의 노하우는 보다 많은 분들께 혜택을 드릴 수 있도록 영상으로 소개될 예정이다.


난 건강한 자존감으로 내 세계를 가꾸어 나가고, 그 세계 안에서 홀로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즐거워하는 의미 있는 타인들과 소통하고 싶다. 그것이 S 교수님처럼 온전히 ‘명품인 사람’이 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멋있다’의 언저리라도 가려는 현재 진행형의 나의 삶이다.


진짜 ‘멋있다’는 ‘샤넬백’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었다. 이제 난 건강한 자존감과 진실한 소통에서 진짜 멋있는 삶을 꿈꾼다.



굿바이, 샤넬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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