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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리 Oct 31. 2017

우리들의 일그러진 인스타 스타

행복은 ‘샤넬백’보다 소통에서(4)



01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영화로도 개봉되었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87)은 권력에 대한 인간의 솔직한 방황을 묘사하고 있다.


서울에서 시골 학교로 전학 온 한병태는 반장인 엄석대의 독재 권력을 목격한다. 병태는 석대의 갖은 횡포에 저항하려 안간힘을 쓰지만, 엄석대의 제국에 저항하지도, 벗어날 수도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확인할 뿐이다.




병태는 결국 엄석대의 권력에 저항하는 대신 그것에 굴복하여 안락함을 경험하는 쪽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 안락함도 잠시, 새로운 선생님의 등장으로 엄석대의 제국은 무너진다.


그런데 스토리를 관통하고 있는 축은 정의가 실현될 것이란 희망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한 엄석대는 언제 어디서나 목격할 수 있으며 우리 다수는 엄석대에게 저항하기보단 기생하거나 침묵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어떤 허무주의 같다.


그리고 (원작자인 이문열 씨에 대한 비판은 차치하더라도) 대부분의 우리는 이러한 정서를 대표하는 힘없는 한병태에게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낀다. 정치적 이슈를 벗어나더라도, 일상에서 우리는 엄석대로 대표되는 거대 권력의 친근한 미소를 생각보다 자주 목격한다.




02 참을 수 없는 과시의 가벼움


얼마 전 지인의 SNS 피드에서 인스타그램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음을 체감한다는 의견을 접했다. 댓글을 확인해 보니 과시와 광고 때문에 피로감이 크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나 역시 같은 입장인 데다 갑자기 일이 몰려 바빠지다 보니 어느 날부터 대부분의 SNS 앱을 스마트폰에서 삭제하고 조용히 지내려던 차였다.


내가 인스타그램에 가입하게 된 배경은 이렇다. 《오늘 뭐 입지?》출간 계약을 마쳤던 2016년 초 무렵, 친구들은 이제 작가이고 홍보가 필요한 사람이 됐으니 대세인 인스타그램을 해야 한다는 얘기를 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일단 앱을 깔고 시작해 봤다. 내가 가입한 지 1년이 넘어도 나의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는 300명을 넘지 못했다. 나는 인스타그램 팔로워 늘리기에 최적화된 사진을 올릴 줄도 몰랐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점차 나는 인스타그램으로 내 홍보를 하기보단, 인스타그램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행위를 관찰하는데 의미를 두었다(그래 봤자 면밀한 관찰보다는 잠시 빠르게 넘겨보다 앱을 닫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인스타그램에서 내가 어설프게 달아놓은 해시태그를 따라 방문한 사람 대부분은 정말 내 컨텐트가 궁금해서 온 사람들이 아니었다. 대부분은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을 겨눈 팔로워 사냥꾼이었다.


“피드 좋아요. 제 인스타에도 놀러 오세요.”

“좋은 글과 사진이 좋네요. 소통해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선팔하고 갑니다. 맞팔 부탁해요.”


결코 ‘소통’ 일 수 없는 “소통해요”라는 요구(?)에 따라 맞팔을 하고 나면 내 시야에 들어오는 사진은 이런 것들이었다.


몸매 과시 사진, 과한 의상을 착용하고 판매를 홍보하는 사진, 자신이 갔던 핫한 장소의 커피와 케이크 그리고 커피잔 옆 끄트머리에 살짝 보이는 비싼 백과 네일 케어 잘 받은 손에 걸쳐진 액세서리 사진, 유명한 누군가와 함께 찍은 사진, 비싼 차 혹은 좋은 집 사진, 잘 편집한 사진 위에 짧고 가벼운 글을 살포시 얹어놓은 이미지.


내가 이런 사진들을 보고 바로바로 ‘언팔’을 해버렸던 것과 달리 많은 팔로워들이 그 혹은 그녀에 대한 선망과 경탄의 글을 남김과 동시에 ‘좋아요’에 엄청난 클릭을 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로웠다.  


내겐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인스타그램 스타의 사생활이 상당수의 팔로워에겐 정체모를 쾌락을 제공하는 양질(?)의 컨텐트가 되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소통’이란 인격 대 인격의 만남에서 파생된 그 무엇이 아니라 구경거리와 구경꾼의 만남일 뿐이었다.


그러나 내겐 인스타그램의 가벼운 존재 양식을 그냥 흘리기엔 뭔가 불편한 구석이 있었다. 내가 만난 적지 않은 분들이 타인의 사진에서 부러움과 질투심을 느끼고, 우울해서 화장품이나 옷을 사 모은 경험이 있었다. 돌아보니, 인스타그램이란 게 존재하지 않던 10년 전의 내 모습도 그리 다르지 않다. 당시 나의 단골 인터넷 쇼핑몰 여사장이 지금으로 치면 인스타 스타였다.




03 대로(boulevard), 산보, 그리고 구경



“파리 사람들처럼 오락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전 세계에 없을 것이다. 아침부터 낮이든 밤이든, 여름이든 겨울이든 파리에는 늘 구경거리가 넘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쾌락 추구에 빠져 있다.”


19세기 파리의 관광 안내서의 문구이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시선을 교환할 뿐 말을 걸지 않는 현대 대도시의 문화는 “19세기의 수도 파리”에서 탄생하였다. 19세기 후반의 파리 시민의 ‘구경’은 중요한 문화 현상이었다.


이러한 파리 시민의 ‘구경’ 행위를 촉발시킨 인프라로는 파리의 대로(boulevard)를 들 수 있다. 19세기 후반 오스망 남작은 파리에 대로를 건설하고 새로운 하수 시설을 만드는 ‘오스망화(Haussman nization)’라는 도시 재설계를 추진하였다.


시원하게 길이 뚫리자 파리 시민들은 ‘산보(flânerie)’를 즐겼고, “모든 신분에게 열려있는” 장소인 대로를 산보하며 대로에 펼쳐진 다양한 구경거리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파리에 있는 대부분의 극장이 신분에 따라 입장 자격에 제한을 두었던 것과 달리, 대로에서는 인형극, 곡예, 거인과 난쟁이, 맹수와 바다괴물, 동물원과 밀랍 진열 실과 같은 오락거리가 넘쳐났다.


흥미로운 것은 다른 도시에서는 오락거리가 되지 않았던 시체 공시소가 파리에서는 오락문화의 중심에 있었다는 점이다. 센(Seine) 강에서 떠오른 시체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마련된 시체 공시소 ‘모르그’에는 관람객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신문에서는 마침내 밝혀진 시체의 정체와 그의 죽음을 둘러싼 사건 스토리를 자극적으로 소개하는가 하면 시각적으로 ‘구경’할 수 있도록 4컷 삽화를 첨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을 밀랍인형으로 재현한 디오라마 전시관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파리 시민들은 사회 계층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익명의 산보자(flâneur)가 되어 한껏 치장하고 노천카페에 앉아 자신의 모습을 기꺼이 구경거리로 보여줌과 동시에 행인의 모습을 구경하기도 했다. 어떤 인물, 어떤 장소, 어떤 사건이든 파리라는 도시 전체에서 발생하는 ‘현실’은 “구경거리화 된 실재(spectacular reality)”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구경꾼의 탄생 : 세기말 파리, 시각 문화의 촉발》(1997/2005, 마티)의 저자 바네사 슈와르츠는 산업과 상업의 중심지였던 역동적인 세기말 파리에서는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일상에서 문화 컨텐트의 생산자이자 소비자가 될 수 있었음을 지적한다. 거리의 구경꾼이었던 파리 시민들은 선정적인 일상생활의 구경거리를 탐욕스럽게 소비하고, 일상이 오락거리 화하는 과정을 즐겼다. 이후 영화라는 장르가 주요 시각적 오락문화로 자리 잡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슈와르츠가 말하는 근대의 군중은 푸코가 말하듯 ‘감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우울한 군중이 아니라, 기꺼이 자신을 구경거리로 내놓고(오히려 ‘전시 강박’에 시달리는) 그것을 즐기는 역동적이고 즐거운 군중이다.




04 소비주의의 친근한 미소


‘19세기의 수도 파리’에서 촉발된 시각 문화는, 21세기에 이르자 누구나 스크린을 장착한 모바일 미디어를 소유한 현실과 만나 우리의 일상생활에 더 깊숙이 침입한 듯하다. 지인들 간의 시각적 안부 및 소통의 수단이었던 SNS는 모바일 미디어와 무선 인터넷, 그리고 시각적 구경거리에 최적화된 인스타그램이라는 ‘대로’로 진화했고, 인스타그램은 구경거리와 구경꾼의 만남을 성사시키는 ‘대로’가 되어 주었다. 물론 이러한 ‘대로’의 탄생은 분명히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TV와 라디오 같은 대중매체에서는 컨텐트 생산자가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지만, SNS에서는 누구나 컨텐트 생산자가 될 수 있다. 그에 따라 #육아스타그램, #책스타그램, #여행스타그램, #영화스타그램 이란 해시태그와 함께 제공되는 타인의 일상은 삶의 현장에서 지친 우리에게 종종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곳을 ‘산보’하며 SNS에 오롯이 디지털화하여 들어간 현대인들의 일상적 삶의 총체를 ‘구경’하는 우리의 행위는 19세기 파리 시민들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현대사회를 ‘구경거리(spectacle)의 사회’라고 칭한 기 드보르는 현대사회에서 시각 미디어가 점하는 비중이 높아지며 우리 내면의 진정한 행복이나 옳고 그름과 같은 진실보다는 겉모습(appearance)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짐을 지적한 바 있다.


정말이지 이젠 내면의 행복보다, 기꺼이 구경거리가 되어 경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현실이 ‘대로’를 ‘산보’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누군가는 호텔 수영장에서 비키니 몸매를, 누군가는 비싼 물건을, 누군가는 인맥을 과시한다. 어느 누구의 일상이든 누군가에겐 좋은 시각적 쾌락의 대상이다.


자신을 기꺼이 대로에 구경거리로 전시했던 파리 시민들은 산보를 끝낼 무렵 자신을 더 완벽한 구경거리로 변신시켜줄 장소, 즉 소비주의의 천국 백화점으로 향했다. 누구나 문화 컨텐트의 생산자가 될 수 있지만 타인의 시선을 빼앗을 장치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니. 누가 더 확실한 구경거리가 될 것인지 경쟁하기 시작하면, 결국 화려한 볼거리를 몸에 걸친 사람이 승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인스타 스타의 피드 속 요란한 구찌의 호랑이 카디건, 만수르 가브리엘의 복조리 핸드백, 골든 구스의 떼 묻은 별 스니커즈를 바라보는 구경꾼 대부분은 너무도 많은 ‘좋아요’와 팔로워로 인해 그녀를 인스타그램 속 위너라고 인정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더 비싸고 더 트렌디한 물건, 더 핫한 브런치 카페, 더 핫한 호텔을 누리는 사람이 인스타그램 시대의 위너라고 인정해야 한다는 건, 누구나 시각 문화 컨텐트의 생산자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즐거운 희망을 꺾어 버린다.


인스타그램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과시’와 함께 ‘광고’를 빼놓을 수 없음은, 대단한 구경거리가 되기에 최적인 장치를 파는 곳으로 달려가려는 사람이 많음을 증명한다.


우린 비싼 물건을 사서 걸치고 사진을 찍어야 경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걸까. 그리고 우린 구경꾼으로서 우린 인스타그램이라는 ‘대로’에 ‘전시’된 누군가의 삶에 경탄해야 할 의무가 있는 걸까.




05 우리들의 일그러진 인스타 스타



생각해보니, 난 비싼 물건을 걸치고 경탄의 대상이 되는 것에 관심을 놓은 지 오래되었다. 그러니 내가 인스타그램에 별 매력을 못 느끼는 건 당연하다. 혹자는 내가 나를 경탄의 대상으로 만들어줄 물건을 걸칠 능력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포기한 채 ‘굿바이, 샤넬백!’이란 제목으로 이런 연재나 하는 게 아니냐고 비웃는다.


내 주변 지인들은 모였다 하면 ‘모두 인스타의 누구’ 얘기뿐인데, 너는 왜 딴소리냐



마치 엄석대의 권위에 복종해야 옳은 삶인데 왜 모양 빠지게 어설픈 한병태나 되려 하느냐는 식이다. 물론 10년 전의 나는 한병태와 유사했다.


패션은 나와 상관이 없다며 다른 삶을 살아야지 하면서도 결국 비싼 물건 걸친 인터넷 쇼핑몰 사장의 삶을 부러워했고, 그녀를 닮고 싶어 그녀가 팔던 카피 제품을 열심히 사다 날랐다. 그리고 그녀의 쇼핑몰에서 서서히 발길을 끊었지만, 세상에는 많은 소비주의의 위너가 존재함을 느끼곤 패배감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우울증을 만났고, ‘나는 누구인가?’ 묻기 시작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고 내면의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하며 자연스럽게 ‘대로’를 빠져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난 나만의 길을 걷고 있다. ‘대로’에서 벌어지는 소란스러운 구경은 저 멀리 들리는 약간의 소음으로 확인할 뿐이다.


최근 디자이너 브랜드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소식은 점차 ‘대로’에서의 ‘구경’에 환멸을 느끼고 자신의 길을 걷는 사람의 수가 증가함을 의미하는 것 같다. 한편 인스타그램 유저 수의 급감은 엄석대와 아이들 식의 거짓 ‘소통’에 환멸을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음을 가늠케 한다. 엄석대의 제국이 쉽게 몰락했던 것처럼 인스타그램 유저 수의 급감으로 인스타그램 스타의 권력은 그리 강력하지 않다.


그들이 경험하는 바는 ‘대로’의 구경꾼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경험일 뿐이다. 적어도 내겐 ‘대로’가 아닌 사적인 공간에서의 진실한 ‘소통’이 100배는 값지다.




학교라는 사회에는 엄석대와 아이들이 나눈 관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스타그램이라는 ‘대로’에도 럭셔리 라이프로 경탄의 대상이 되는 인스타 스타와 팔로워 사이의 관계만 존재하는 건 아닐 것이다. 한 장의 사진으로 표현된 누군가의 힘든 육아와 누군가의 오지 탐험이 누군가에게 상당한 청량감을 제공할 수 있으니.


이러다 인스타그램이 싸이월드의 전철을 밟는 건 아닐지. 뭐 꼭 그러진 않더라도 자신의 소비를 과시하며 우리에게 경탄을 요구하는 인스타 스타 같은 존재는 앞으로 어디서든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난 ‘구경’에만 집중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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