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샤넬백’보다 소통에서(3)
1991년 4월, 내가 전학을 가던 날.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나는 반 친구들과 인사를 나눈 후 S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는 헤어짐을 아쉬워하다가 S는 미사에 늦으면 아버지께 야단맞는다며 성당으로 향했다.
그러나 얼마 후, 터벅터벅 걸어가던 나를 누군가가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S였다. 조금 전까지 웃는 얼굴이었던 S는 나를 돌려 세우곤 한참 동안 엉엉 울었다. 그날 S는 한용운 시인의 ‘초혼’을 옮겨 쓴 편지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S와 내가 절친이 된 계기를 소개하면 이렇다. S는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였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반에서 1등을 한 적이 있었다. 원래는 반에서 10등 정도의 성적만 유지하던 나는 갑자기 친구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사실 나는 1등을 한 이후로 별로 변한 게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내가 변했다며 수군거렸다. S는 그때 내게 와서 말해줬다.
“애들이 너 변했다고 하지만, 나는 니가 변했다고 생각하진 않아. 그래도 지금 이 상황에서 애들이 오해할만한 건 맞아.”
S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S는 다른 애들처럼 나를 피하지 않고 나에게 먼저 다가와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S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주는 진짜 친구 한 명이 생긴 것 같아 감동 받았다.
나의 전학 이후 우린 꽤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지금 난 S와 그때 편지를 주고받던 우리가 너무 풋풋했다며 웃는다. 생각해보니 그 편지는, 27년 동안 몇 번이나 끊어질 뻔 했던 나와 S 사이를 이어준 끈끈한 연결고리가 되어주었다.
그때 나의 편지 쓰기는 나의 내면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어주었다. 나는 사실 그보다 더 전인 초등학교 때부터 편지 쓰는 걸 좋아했다. 초등학생이었을 때 친구 중 누군가가 전학을 가면 평소 별로 친하지 않은 친구라도 일단 편지를 써서 보냈다. 설레는 맘으로 편지를 써서 우체통에 넣고, 며칠 동안 우편함을 바라보며 답장을 기다리곤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와 중학교 때 독후감으로 이런저런 상을 받았던 것도,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도 그때 누군가에게 썼던 편지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나의 편지쓰기는 고등학교 때에도 계속 되었고, 나는 늘 엄마의 감시(?)에 긴장하며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때 대체 누구에게 그렇게 많은 편지를 썼는지 잘은 기억나지 않는다. 학교 축제 때 만나 잠깐 사귀었던 남자친구였는지, 사랑과 우정 사이였던 교회 친구였는지, 내가 좋아한 가수였는지, S였는지, 풀어야 할 오해가 있었던 학교 친구였는지.
그게 누구에게 쓴 편지였든 나는 편지에서 내 속을 다 꺼내 보였다. 나는 글이라는 것에 내 생각과 내 느낌을 담고, 누군가가 읽어준다는 것에서 살아있음을 느꼈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나의 내면을 친구들에게 다 보이고 싶었던 건지 궁금했지만, 그 이유에 크게 관심을 둔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다 우연히 서점의 신간 코너에서 발견한《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크리스텔 프티콜랭, 2014)를 읽고 나서야 내가 왜 그랬던 건지 알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생각이 많았다. 어릴 때 찍은 유치원 단체 사진만 봐도, 나는 그 또래의 어린이답지 않은 표정으로 어딘가를 응시하며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는 나의 예민함과 감수성, 지적 호기심의 공존이 얼마나 주위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특이한 것인지 깨우쳐준 책이었다. 한없이 자존감이 낮은 상태였던 나는 이 책을 읽고 늘 불편하기만 했던 나의 특이함이 달리 보면 최고의 자산임을 알게 되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내가 후천적으로도 생각이 많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내가 동의할 수 없었던 수많은 순간마다 속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나는 나를 제대로 이해하는 타인을 지극히 만나기 힘들었고, 그래서 자주 외톨이인 채 속으로만 생각하게 되었으며, 결국, 본의 아니게 말수가 적은 ‘관찰자’이자 ‘사색가’로 지내게 되었다.
책에 따르면 나 같은 예민한 사람들 대부분은 부모로부터도 이해는커녕 따뜻한 공감의 말 한마디 듣기 어렵다. 그리고 본인조차 어쩔 수 없는 예민함에 대한 공감에 굶주려 있다. 그래서 ‘소통’의 욕구가 다른 사람의 몇 배에 해당한다.
내가 말 몇 마디로는 내 속의 나를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생각이 과해서 부모조차 감당하기 벅찬 아이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난 내가 맘을 나누고자 하는 친구가 생기면, 말 몇 마디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는 ‘편지’를 써왔던 것이다.
S가 미국에 유학 가 있던 무렵, 나는 J를 만났다. 2004년 내가 교사로 일하던 무렵 같은 학교 동료로 만난 사이였다. 그녀는, 출산을 앞둔 한 선생님을 대신하여 새로 왔기 때문에 우리가 직장 동료로서 함께 지낸 기간은 고작 7개월 정도였다.
우리는 또래인데다 몇 번의 시트콤 속 상황을 계기로 학교에서 둘도 없는 절친이 되었다. 우리는 종종 내 차를 함께 타고 퇴근했다. 차에선 주로 내가 이야기하고, 그녀는 듣는 편이었다. 그녀는 항상 내게 이런 말을 해줬다.
“나는 자기 말할 때 눈동자 굴리는 그 표정이 너무 좋아. 머리 돌아가는 소리가 막 들리는 것 같거든.”
유학 중 잠깐 비자 문제로 귀국했던 S는, 내가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며 눈을 반짝이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내가 남자 친구도 아닌, 새로운 여자 친구가 생겼다며 그렇게 설레는 표정을 지었던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S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무렵, J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다시 만났을 때 내가 우울증에 박사 논문도 거의 중단하다시피 하며 너무 힘든 시기를 보낸다는 소식에 J는 가족들보다 더 속상해했다. J는 내 머릿속을 사랑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녀는 내가 우울증에 힘겨워할 때 내가 그것을 이겨내기 위한 최적의 처방을 내려주었다.
“그냥 제발 자기 머릿속을 글로 표현해 줘. 책을 써봐, 책을! 최유리 머릿속엔 재밌는 게 너무 많아”
그녀는 내게 강력한 표현 욕구가 내재함을 어쩌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는 J가 잠깐 짬이 나니 자길 만나러 와 달라고 했다. 그녀에게 가며 양해를 구했다. “나 아직 머리를 못 감아서 엄청 상태 안 좋은데, 그래도 괜찮아?”라는 내 질문에 돌아온 그녀의 대답.
어떤 모습이어도 아름다워!
2015년 2월에 맞은 S의 생일. 원래 우리는 서로의 생일을 잘 챙기지 않았다. 그녀는 늘 내 생일이 7월 즈음이라는 것만 기억할 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우울증을 계기로 인생의 목표를 행복으로 삼자고 결심한 이후로는 내 생일이든 친구의 생일이든 생일을 꼭 챙겨서 서로의 삶을 축복해 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그녀를 위해 준비한 첫 번째 선물은 S에게 연락해서 시간을 잡으라고 ‘협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S의 유학 시절 절친인 JS에게도 연락했다. 그렇게 나, S, JS 이렇게 셋이 모이는 자리를 만드는 것. 그것이 내가 제일 먼저 생각한 선물이었다. S는 회사 일이 너무 바빠 겨우 문자를 보내왔다.
“아마 목요일쯤? 시간 날 거야. 만약 내가 그때까지 살아있으면!”
“그래? 그럼 목숨 걸고 목요일 날 나와!”
내가 준비한 두 번째 선물은, 셋이 모인 그 시간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것이었다. 카메라와 삼각대, 책 선물 그리고 케이크를 사 들고 셋이 모이기로 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책 선물은 생일을 앞둔 몇 주 전, S와 문자를 주고받던 중에 결정되었다. 그즈음 난 1999년 베개 옆에 두고 매일 밤 읽던 《그림 읽어주는 여자》(한젬마, 1999)를 중고 서점을 뒤져서 다시 구입했었다.
내 추억을 다시 찾았다는 기쁨에 책 구입을 S에게 자랑했다. 그랬더니 S에게 돌아온 답은 “그래? 그런 책이 있어?”가 아니었다. 그녀의 답은 의외로 숙연했다. “아버지 유품 중에 있던 책인데. 보고 싶네”
그녀의 생일. 약속 장소에서 만난 S에게 나는 손으로 쓴 카드와 함께 《그림 읽어주는 여자》를 건넸다. JS가 강남 한복판의 교통 체증을 뚫고 오는 사이, S는 내가 건넨 카드와 《그림 읽어주는 여자》를 넘기며 마냥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S가 환하게 웃는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이대고 그녀를 ‘밀착 취재’했다.
JS가 도착하고 마침내 셋이 된 우리. 아무도 드레스 업을 하지 않았고 아무도 풀 메이크업으로 나타나지도 않았다. 회사원인 두 친구는 정말 평소 모습 그대로 나타났다. 우린 특별한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다. 그저 S가 회사에서 겪었던 배꼽 빠질 에피소드, JS가 회사에서 겪은 20대와의 세대 차 이야기, 그리고 내가 쓰고 있던 책 《오늘 뭐 입지?》이야기만 나눴다.
마지막으로 S의 집으로 간 우리는 자정을 넘겨 진짜 생일을 맞은 그녀를 위해 케이크에 불을 켜고, 노래를 불렀다. 그 순간 내 카메라는 동영상 촬영 모드로 바뀌어 있었다. S는 한 번에 그 많은 초를 끄곤 스스로 감탄한다. “내 이 엄청난 폐활량 어쩔 거야?” 우리를 또 까르르 웃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내가 S에게 건넨 마지막 선물은 그날 우리의 즐거운 시간을 남긴 사진을 인화해서 담은 예쁜 앨범이었다. 앞으로 우리의 생일마다 사진을 찍어 앨범의 나머지를 채워 넣자는 메모와 함께.
앨범을 받고 미소를 감추지 못하던 S는 우리 셋이 모였던 그날 밤 자신의 기분을 말해줬다. 일주일 전 그날 밤, S는 혼자 너무 행복해서 자꾸만 웃음이 나와 잠이 오지 않았단다. 내가 그녀에게 준 몇 가지의 선물 중에서 그녀를 가장 환하게 웃게 했던 건 내가 그날 준 생일 카드였던 것 같다.
글을 쓰려고 빈 카드를 펼쳤을 때 문득 종종 카드에 글을 더 자주 써서 건넨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녀였음이 떠올랐다. 사실 내 친구 S는 내가 갖지 않은 철저하고 계획적인 면을 가진 성취자형 인간이다. S가 무심한 성취자형 답지 않게 나보다 더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카드를 자주 줬다는 점이 너무 고마웠다.
나는 그녀에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가 인생에서 가장 밑바닥을 경험하던 시기에 무조건 내 편을 들지 않고 종종 다그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썼다.
S야, 너의 냉정한 면이 여리기만 한 내게 꼭 필요했던 것 같아.
그래서 우리가 몇 번의 위기에도 서로 친구로 남아있었던 게 아닐까.
너랑 친구라는 게 너무 감사하다.
사랑해.
S는 툭하면 입안이 온통 부르트고 갑자기 체중이 줄어들 정도로 정말 바쁘다. 평소 내가 안부를 묻기 전에는 거의 연락이 없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정말 아플 때 반차를 써서 달려와 줄 정도로 자신의 피 같은 시간을 내주는 친구이다.
자신의 학원을 운영하는 J 역시 정말 바쁘다. 자신에게 음식을 씹어 먹을 시간을 내어주기도 힘들 정도로 연속 수업에, 강사들과의 회의에, 학부모 면담에, 각종 집필에 늘 쫓겨 산다. 그러나 잠시의 짬이라도 나면 그녀는 나에게 전화를 건다.
어릴 때도 지금도 내게 부족한 부분을 일깨워주는 S, 그리고 13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의 머릿속을 즐거워하는 J. 나는 카페에서 그런 S와 J의 금 같은 시간을 함께한다. 난 우리가 카페에 앉아서 나누는 수다가 너무도 소중하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옷 얘기, 화장품 얘기, 남의 결혼 얘기, 자기 자녀와 남의 자녀 진학 얘기, 연봉 얘기, 남의 험담은 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자신의 행복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어떻게 하면 내가 행복할까. 어떻게 하면 내가 내면의 평정심을 찾을까, 어떻게 하면 내 내면이 건강해질까. 아마도 우리가 언젠가부터 이야기하지 않는 그 주제들은 우리의 행복과 무관함을 저절로 터득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모여서 나눈 이야기들은
내가 우리가 주고받던 편지 속 이야기 같다
친구들과 카페에서 나누는 우리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어릴 때 친구들과 주고받던 편지에서 난 내 꿈이 뭔지, 그것을 이루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나는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지를 풀어놨었으니까.
우리가 20대 때 흔한 수다를 떨지 않았던 건 아니다. 옷 얘기, 가방 얘기, 옷 못 입는 다른 사람 흉보기, 남자 얘기.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는 카페에서 맘속 근심과 욕심을 배설하기보다, 행복을 채운다.
나는 내가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나누는 소통이 편지 속에 담겨도 부끄럽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을 때 편지지가 명품인지 볼펜이 명품인지 신경 쓰지 않는다. 특히 받는 입장이 되어보면 더 그렇다. 편지를 받는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건 쓴 사람의 진심이다.
나도 한때는 나와 어울리는 지인들이 걸친 가방과 신발과 옷을 보며, 나도 지지 않으려 그 비슷한 것을 갖추려 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내가 지지 않으려 했던 그 사람들과 난 한 번도 소통다운 소통을 나누어 본 적이 없다.
나는 인생이란 마라톤이, 누군가가 정해놓은 목적지를 향해 누가 더 일찍 도착하느냐의 경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인생이란 마라톤은 각자가 정한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자신의 건강을 위한 달리기에 가깝다고 본다.
내가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쇼핑을 하던 무렵엔 인생이란 마라톤이 이기고 지고의 경쟁이 아니라는 걸 몰랐다. 그때 그 사람들은 내가 신경 써야 할 경쟁자가 아니라 나와 다른 목적지로 가버린 사람들에 불과했다.
친구와의 소통에서 피어나는 우정. 그때 명품 백과 구두, 번쩍이는 로고가 박힌 화장품은 주인공이 아니다. 그녀들과 함께 나눈 수다라는 편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진심이 담긴 내용일 뿐이다.
아무리 연습장에 모나미 볼펜으로 쓴 편지라도 서로의 진심이 담겨있다면, 연습장과 모나미 볼펜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내 진심을 아는 친구들은 “어떤 모습이어도 아름다워!”라며 나를 반겨줄 테니까.
그러나 만약 그녀들과 함께 나눈 수다가 비싼 편지지에 몽블랑 펜으로 쓴 편지라 한들, 차마 소리 내어 읽기 부끄러운 것이라면, 곧 버려질 수밖에 없다.
뭐, 그렇다고 내가 불편한데 굳이 연습장과 모나미 볼펜으로 편지를 쓸 필요는 없다. 그럴 땐 가장 나다운 필기구와 편지지를 준비하면 되니까. 가장 나다운 필기구와 편지지를 골라 편지를 써 줄 때, 내 친구들은 정말 즐거워한다.
카페에서 내 친구들이 내 모습에 눈을 반짝이던 순간은, 내가 찾아낸 이름 모를 저렴한 브랜드의 신발과 가방을 내가 걸치고 있을 때였다. 그럼 난 겉으로 표현된 나다움을 맘껏 자랑한다.
카페에서 나누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편지 같은 수다. 그것이 50년은 더 살아갈 우리를 ‘친구’라는 이름으로 묶어 줄 끈끈한 연결고리가 되어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앞으로 50년 동안 ‘행복’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달려갈 내 곁에, 동료 마라토너 같은 내 친구들이 있어 정말 좋다. 우리 우정에 명품백은 필요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