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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퓨링 Nov 02. 2018

이상한 정상가족, 귀여우면 다인가요?–영화「코코」리뷰

<코코>를 보고 나오던 길에 내 얼굴은 분명 눈물범벅이었다. 객석의 반 정도를 채우고 있던 다른 어른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멋쩍어하며 서둘러 극장을 나서는 많은 이들을 지나쳤으니 말이다. 그렇게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영화관을 나섰지만 나는 형용할 수 없는 찝찝함과 함께 왠지 이렇게 생각했다. ‘조카와 이 영화는 보면 안 될 것 같다….’


                                                                               ⓒ영화 코코


“핏줄”이면 폭력적이어도 괜찮은가

<코코>속 주인공 미구엘은 음악을 사랑하고 뮤지션이 되고 싶어 하지만, 그의 집안은 대대로 음악을 금기시한다. 미구엘은 꿈과 가족 중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구도 속에 놓이며 자연스레 가족과 대립한다.


이 때 미구엘이 겪어내는 갈등은 대단히 폭력적이다. 가업인 신발 만드는 일에 소질이 없으면 어찌하냐는 미구엘의 질문에 아버지는 “걱정 말고 가족만 따르면 돼. 넌 이 가문의 핏줄이야.”라고 대답할 뿐이다. 게다가 “다 널 위해서 하는 소리야”라고 운을 떼는 할머니는 결국 미구엘의 기타를 산산이 부숴버리며 “이제 기타도 없으니 음악은 포기해. 대신 가족이랑 밥을 먹으면 화가 풀릴거야.”라고 말한다. 개인의 목소리가 가족이란 미명하에 철저히 소거되는 순간이다.


갈등 자체도 문제적이지만 사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갈등이 해소되는 방식이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미구엘의 고조부인 헥터가 있다. 과거 헥터는 미구엘과 비슷한 갈등을 겪다 자신의 꿈을 선택한 인물이다. 그러나 저승에서 미구엘과 헥터가 만나게 되면서, 헥터 또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삶을 선택한 인물도 알고 보니 그것을 대단히 후회했다는 서사가 이어지면서 미구엘과 우리는 자연스레 가족의 가치에 비중을 두게 된다.


‘급’ 낮은 유사가족?

가정을 떠난 헥터가 저승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 지를 보면 가족의 가치는 한 번 더 힘을 얻는다. 그는 저승세계 안에서도 음침한 변두리에 위치한다. 그 변두리에는 헥터와 같이 이승에서 ‘정상가족’에 편입되지 못한 이들이 모여살고 있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그들은 서로를 가족이라 생각하고 삼촌, 사촌이라는 호칭을 쓴다. 그러나 영화는 이 사람들의 공동체를 혈연 관계로 맺어진 가족보다 한참 낮은 ‘급’이라고 믿는 듯하다. 이승에서 이들을 기리는 혈연관계의 누군가가 없으면 저승에서마저 ‘영원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설정과 너무도 누추해 보이는 이들의 행색은 무시무시하지 않은가. 마치 가족을 떠나게 되면 이러한 방식의 ‘단죄’가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 같다.


결국 미구엘은 필연적으로 가족주의를 내면화한다. 그는 그의 고조모 이멜다에게 헥터를 용서할 것을 간청하며 “가족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헥터를 용서할 수 없다는 이멜다에게 오히려 “용서는 못하더라도 잊으면 안 되지 않느냐”고 다그치기도 한다. 영화는 소년이 겪은 폭력들을 사과하기는 커녕 정상가족의 숭고함으로 그것들을 정당화한다. 스스로 “가족이 우선이잖아요”라는 말을 되뇌며 음악을 포기하겠다고 하는 소년의 미소는 애처롭기 그지없다.


                                                                                ⓒ영화 코코


영화의 제목은 <미구엘>이 아니다

영화가 미구엘의 선택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갈등을 해소했다면 그것이야 말로 해피엔딩이었으리라. 그러나 영화의 제목은 끝내 주인공 ‘미구엘’이 아닌 ‘코코’다. 영화 말미에 미구엘이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긴 하지만 그것은 그의 가족이 ‘승인’을 내린 후 였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승인의 이유 또한 음악이 헥터를 정상가족의 품으로 돌려놓은 매개였기 때문이다. 미구엘은 꿈도 이루고 가족과도 화해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가족 이데올로기의 울타리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영화는 이를 너무도 아름답고 귀엽게, 그리고 그럴듯한 서사를 얹어 포장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린다. 가족 그리고 무조건적인 사랑, 이들이 주는 따스함에 감동받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더욱 위험하다. 감동에 치여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주는 달콤한 안온함만을 되새기기 쉽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찝찝했던 이유는 나 또한 이미 그것들에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영화를 보는 아이들만은 익숙해지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디즈니식 서사’를 보고, 울고, 염려해야 하나. 이제는 더이상 개인의 목소리를 앗아가지 않기를, 다양성을 존중하는 모습을 그려내기를 바라면서 다음에 나올 디즈니 영화를 불안하게 기다릴 뿐이다.  


*이글은 청년언론 <고함20>에 발행된 기사입니다.


글. 낫또(angelzz1030@gmail.com)

특성이미지 ⓒ영화 코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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