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하면 뭐 어때서

당신의 인생은 안녕하십니까?

by LEEMIN


2009년 말콤글래드웰의 책 <아웃라이어>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어떤 분야든 세계적인 수준의 전문가가 되려면 최소 1만 시간의 연습이 필요하다는 ’1만 시간의 법칙‘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는 이 책에서 선천적 재능보다 꾸준한 노력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다. 재능 없음을 한탄하며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채 놓아버렸던 많은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예술이나 스포츠처럼 타고난 재능이 큰 영향을 미치는 영역에 있어서 시간은 절대적인 기준이 되기는 어렵다는 반론도 있지만, 노력과 태도에 가중치를 부여하는 그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경기남부에 있는 집에서 직장이 있는 여의도까지는 차가 안 막히면 40분, 차가 막히면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하루에 길게는 세 시간을 차에서 보내는 셈인데, 이 시간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아서 운전 중에는 주로 경제 방송이나 영어 팟캐스트를 듣는다. 그러다 가끔 다른 사람의 음성을 듣는 것도 버거울 만큼 속이 시끄러운 날에는 볼륨 크게 EDM을 듣는다. 반복되는 비트와 귀에 꽂히는 일렉트로닉 사운드에 집중하고 있으면 잡념이 사라지고 소란스럽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드럼과 베이스를 착착 쌓아가며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빌드업 구간을 지나 에너지가 폭발하는 클라이맥스 구간에 진입하면, 고점에서 하강하는 롤러코스터에 몸을 실은 것처럼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다 흥분이 가라앉으면서 묵은 체증이 해소된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매운 음식을 먹거나 쾌감을 주는 액션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유튜브로 디제이들의 영상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끝없이 이어진 관중 앞에서 디제이의 열정적인 퍼포먼스를 보면서 나도 디제잉을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 피어올랐다.


나의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는, 하고 싶은 게 생기면 깊이 고민하기보다는 무턱대고 도전해 본다는 것이다. ‘해보고 아니면 말지 뭐’ 하는 가벼운 생각으로 도전한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도전하는데 주저하지 않지만 그만큼 중간에 그만두는 일도 많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바로 핸드폰을 꺼내 네이버 지도를 켜 디제잉을 배울 수 있는 곳을 물색했다. 디제잉 학원은 홍대에도 있고, 강남에도 몇 군데 있었다. 네이버 리뷰와 블로그를 들락거리며 정보를 수집한 뒤 시설도 좋고 친절해 보이는 강남에 있는 디제잉 학원에 전화를 걸었다.


“디제잉을 배워보고 싶어서 전화드렸는데요. 완전 초보도 배울 수 있나요?”

“그럼요. 힙합, EDM 중 어떤 장르를 배우고 싶으세요?

“네? 아, 데이비드 게타가 하는 거 같은 거요 “

”그럼 EDM으로 배우시면 됩니다. “


퇴근길에 디제잉 학원에 들러 한 달을 등록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가 쇠로 된 묵직한 문을 열었다. 어두컴컴한 긴 복도가 펼쳐졌고, 복도 양옆으로 녹음실 부스가 줄지어 있었다. 출입문 오른편에는 널찍한 라운지 공간이 있었고, 구석에 큼직한 디제이 부스가 있어 마치 클럽에 온 것 같았다. 나의 눈높이보다 살짝 높은 디제이 부스 뒤로 콘크리트 블록이 거칠게 드러나 있었다. 붉은 조명이 콘크리트 벽을 은은히 비추어 공간 전체에 묘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여기는 한 달에 한 번 수강생들이 모여서 디제잉 실력을 뽐내는 공간이라고 했다. 몇 달 뒤 나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디제잉을 할 생각을 하니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첫날은 디제잉 장비에 대해 배웠다. 내 앞에 1미터가 넘는 긴 책상을 꽉 채운 커다란 장비가 놓여 있었다. 양쪽에는 LP판을 닮은 둥근 조그휠이 하나씩 자리 잡고 있고, 중앙에는 심박 모니터처럼 파형이 표시된 디스플레이가 있었다. 그 주위로는 각종 버튼과 노브, 페이더들이 빽빽하게 배열되어 있어 마치 비행기 조종석 같았다. 아직 용도는 잘 모르지만, 조그휠도 돌려보고 볼륨 버튼과 이펙트 버튼을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선생님이 디제잉 시범을 보어주었는데, 저 수많은 버튼을 자유자재로 조작하며 디제잉을 하는 현란한 손놀림에 감탄했다. ‘나도 저렇게 디제잉하는 날이 오겠지?‘ 시작도 하기 전에 프로 디제이가 된 내 모습을 상상하며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둘째 날부터는 비트매칭을 배웠다. 비트매칭이란 한 곡이 끝나갈 무렵 이어질 두 번째 곡을 틀고 두 곡의 박자(BPM)를 동일하게 맞추어 물 흐르듯 연결하는 것을 말한다. 비트매칭은 디제잉의 기본인데, 솜씨가 좋으면 리스너들은 한 곡이 끝나고 다른 곡이 시작되는지 조차 눈치채지 못한다. 비트매칭을 하려면 먼저 재생 중인 곡의 BPM을 확인하고, 피치 페이더(곡의 속도를 조절하는 버튼)를 사용해 다음 곡의 BPM을 재생 중인 곡과 동일하게 맞춘다. 그런 다음 조그휠(곡을 앞이나 뒤로 감는 기능)을 사용하여 두 곡의 킥 드럼이 정확히 일치하도록 조정한다. 비트가 일치한 상태에서 다음 곡을 재생한 뒤 앞서 재생 중인 곡의 볼륨을 서서히 낮추고 다음 곡의 볼륨을 서서히 올려 두 곡의 음량을 완벽하게 교차시킨다.


비트매칭을 잘하려면 단련된 귀와 리듬감이 필요하다. ‘쾅! 쾅! 쾅! 쾅!‘ 하고 스피커를 통해 방안 가득 울려 퍼지는 A곡의 소리를 들으며, 헤드폰으로 B곡의 드럼 소리를 정확히 캐치해 내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양쪽 귀가 따로 놀아야 하는데 막 걸음마를 뗀 아기처럼 내 귀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조급했다. 비트매칭에 실패하면 앞 곡과 두 번째 곡의 드럼 소리가 엇갈려 나면서 쿵-짜작-쿵-짜작 하면서 엉망진창인 음악이 스피커를 통해 재생된다. 소음 공해 수준이 되어버린 음악이 방안을 가득 메우자 겸언쩍어진 나는 “저처럼 못하는 사람도 있나요?”하면서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남들은 일주일이면 하는 비트매칭 연습을 한 달 동안 했는데도 제자리걸음이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나를 바라보는 선생님의 눈빛도 지쳐 보였다. 결국 열등생 생활에 지친 나는 다음 달 레슨을 등록하지 않았고, 디제이가 되는 험난한 여정에서 중도 하차하였다. 비록 디제이가 되는 데 실패하였지만, 이 경험으로 나의 리듬감이 형편없다는 사실(앞으로도 뮤지션은 꿈도 꾸지 말아야지)과 디제이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알게 되었다. 남편에게 ‘비트매칭이 뭔지 알아?‘ 하면서 얄팍한 디제잉 지식을 뽐낼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나의 부족한 인내심이나 끈기 없음을 탓하지 않기로 하였다.


나이 들수록 ‘재미’보다는 ‘효율’과 ‘가성비’를 따지게 된다. 가끔 해보고 싶은 일이 생겨도 계산기를 두드린 다음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하고 만다. 하고 싶은 게 생기면 반가운 마음으로 무모하게 도전해 보자. 모두가 다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다. 세상의 모든 도전은 칭찬받아 마땅하고, 실패한 경험도 다 쓸데가 있다(디제잉을 찍먹한 것만으로 이렇게 글도 쓸 수 있다니). 백 번 찌르다 보면 숨겨왔던 천재적인 재능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고, 기꺼이 1만 시간을 투자할 가치 있는 일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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