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인생은 안녕하십니까?
어릴 적 무한도전을 정말 좋아했는데, 특히 YES or NO 특집이 기억에 남는다. 무한도전 멤버들이 질문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YES or NO로 응답하면, 뒤이어 질문이 공개되었다. 영문도 모른 채 “맞을래요? “라는 질문에 YES를 선택하고서 뿅망치로 두들겨 맞는 장면에 배꼽을 잡았다. 이 특집에 나온 “인생은 B와 D사이의 C다”는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한 말이다. 이는 곧 ‘인생이란 탄생과 죽음 사이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이다. 스스로 태어나는 것과 죽는 것을 선택할 수 없지만, 살면서 하는 무수한 선택들이 인생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이 특집을 보면서 무한도전이 주는 철학적 메시지에 다시금 감탄했다.
“변호사님은 원래부터 꿈이 변호사였어요? “ 변호사들 사이에서도 가끔 주고받는 질문이다. ‘부모님이 법조인이라서’ 라거나, ‘선망받는 전문직 중 하나라서’ 라거나 저마다의 이유로 어려서부터 변호사가 꿈이었고 끝내 그 꿈을 이룬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나의 경우 ‘변호사’는 장래희망 후보리스트에 단 한 번도 오르지 못했다. 중고등학교 때 진로 적성검사를 하면 백이면 백 ‘예술가형’이 나왔다(이 테스트가 얼마만큼 신뢰도와 정확성을 갖는 검사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나는 이 검사 결과를 꽤나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예술가형’의 성격적 특성으로 “감성적이고 창의적이며 상상력이 풍부함 “, ”정형화된 틀보다 자유로운 환경을 선호함” 등이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독립심과 반항심으로 유별스러웠던 나는 이 검사 결과에 대단히 만족했다.
나는 1985년 지명도 생소한 강원도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우리 집은 읍내 오일장이 서는 좁은 도롯가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장날이면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 소리로 시끄러웠다. 집 뒤편으로는 얕은 개울이 흘렀는데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가 개구리를 잡으며 놀곤 했다. 엄마는 내가 대여섯 살 되던 해부터 나를 읍내에 있는 미술학원에 보냈는데, 엄마의 고등학교 친구가 하는 미술학원이라 학원을 놀이터 삼아 놀았다. 어렸을 때 그림은 나에게 놀이와 다름없었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그림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사뭇 진지해졌다. 가끔 풍경화를 그리러 교외로 사생을 나갔다. 이젤을 놓고 서서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캔버스에 옮겨 담고 있으면 동굴 속에 들어온 듯 고요해지고,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중학생이 되면서 근처 소도시로 이사 갔다. 한창 사춘기였지만 여전히 그림만이 나의 길이라고 생각했고 미대에 가고 싶었다. 예술고등학교가 없는 지역이라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전교에서 미대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은 나 하나였다. 수업을 마치고 반 친구들이 밤 10시까지 학교에 남아 야간 자율학습을 할 때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터덜터덜 교문을 나서 미술학원으로 향했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밤 11시 넘어서까지 그림을 그렸다. 연필이 캔버스를 스치며 나는 사각사각 소리가 좋았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명상과 같다. 머릿속 잡념을 없애주고 몰입감과 해방감을 선사해 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림 말고 다른 길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날, 담임 선생님과 진학 상담을 하러 교무실에 갔다.
선생님 : ”미대에 가는 것도 좋지만,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보는 건 어떻겠니?”
나 : ”저는 미대에 가기로 마음먹었는데요. “
선생님 : ”너는 예고 학생들처럼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아니고, 혹시 모르니까 공부도 신경 쓰는 게 좋을 것 같아. 이제 고3이 되면 더는 선택의 여지가 없잖니.”
일반고에 다니다 보니 주변에 미대 입시를 준비하는 친구가 없었다. 소문에 따르면 예고에 다니는 학생들은 그림 실력도 뛰어나고, 미대 입시 전문 학원에서 비싼 1:1 코칭을 받는다고 했다. 내가 살던 동네에는 미대 입시 전문 학원이 없었고, 우리 집은 나와 동생 둘까지 애들 세명을 교육시키기에도 빠듯했기에 큰 도시에 있는 비싼 학원에 보내줄 리가 만무했다. 내 실력으로 과연 홍대는커녕 다른 미대라도 갈 수 있을지 불안했다. 주변에 비교할 대상이 없으니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부모님마저 경영학과 같은 데 들어가 평범하게 취업하기를 바라는 상황에서 선생님의 조언은 안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불을 지폈다.
그림도 공부도 자신이 없었던 나는 둘 중 하나에 올인할 수 없었고, 선생님의 조언대로 두 가지를 병행해 보기로 결심한다. 사실 그림을 핑계로 고2 때까지 공부에 완전히 손을 놓고 있었다. 따라잡아야 할 진도가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막막했다. 9시부터 6시까지는 학교 수업을 듣고, 7시부터 10시까지는 학원에서 그림을 그렸다. 10시부터 2시까지는 독서실에 가서 수능 공부에 몰두했다. 핸드폰도 없애고 친구들도 멀리했다. 그렇게 몇 달을 코피 터지게 공부하고 나니 모의고사 성적이 전교 하위권에서 열손가락에 꼽힐 정도까지 올랐다. 고3이 되면서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것은 체력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불가능했고, 선택의 시간은 점점 다가왔다. 부모님과 선생님의 설득과 협박(“예술은 배고픈 직업이야.” “그림 그려서 밥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아?”), 돈과 시간 등 현실적인 문제, 부족한 재능 등을 구실로 삼아 결국 12년간 동고동락한 그림을 관두기로 하였다.
일반대학에 진학하는 것으로 마음먹었지만, 딱히 가고 싶은 과는 없었다. 점수에 맞춰서 적당한 학교와 학과를 골랐다. 법학과를 선택한 건 온전히 내가 받은 점수에 부합하고 취업이 잘 될 것 같아서였다. 법학과에 입학한 뒤에도 내가 변호사가 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은 자기가 접해보지 않은 것을 욕망할 수는 없다.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에서 변호사가 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당시에는 변호사가 되려면 사법시험에 합격해야 했는데, 어렵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시험이라 잘못하면 고시낭인이 되기 십상이라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어디 가서 수재 소리 한번 들어본 적 없는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절대 합격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어찌 됐든 나는 결국 법대를 나와 변호사가 되었다. 20대부터 지금까지 20년 이상 법을 공부했고, 지금까지 밥벌어먹고 살게 해주었다. 변호사라는 직업에서 성취감과 보람을 느꼈지만, 마음 한편에는 포기한 꿈에 대한 미련과 함께 이것이 내가 평생을 받쳐 하고 싶은 일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30대에 대기업 부장이 됐고, 회사에서도 최연소 실장이 되면서 사내변호사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지만 헛헛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만약 그때 미대에 갔으면 내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엄마 말대로 배고픈 예술가로 살았을까? 배는 고플지언정 영혼은 충만했을까?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내가 한 선택의 결과는 내가 감수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