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의 교무실은 묘하게 조용하면서도 어수선다.
고3 수업이 대부분 끝나고, 남은 일은 결과를 기다리는 일뿐이다.
그때쯤이면 비슷한 질문들이 오간다.
“○○는 대학 어디 붙었어요?”
담임도 아니고, 성적을 직접 본 적도 없는 선생님들이 묻는다.
단순한 정보 확인처럼 들리지만, 그 말에는 묘한 온도가 실려 있다.
마치 이미 마음을 주고 있다는 듯한.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말이 따라붙는다.
“그 아이는 꼭 잘 갔으면 좋겠어요.”
“○○는 진짜 붙었으면 좋겠다.”
흥미로운 점은, 그 학생이 반드시 성적 상위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교과 수업에서 몇 번 본 선생님,
동아리 지도 중에 잠깐 마주친 선생님,
심지어 환경미화나 행사 때 스쳐 지나간 선생님까지
같은 마음으로 응원하는 학생들이 있다.
그 아이들은 어떤 아이들일까.
곰곰이 떠올려 보면, 그들에게는 하나의 공통된 장면이 있다.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기보다,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이 있었다는 점이다.
항상 잘하는 모습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계속 시도하는 과정이 기억에 남는 아이들이다.
말을 잘하지 못해 발표를 망쳤지만 다음 시간에도 다시 손을 들던 아이,
시험을 보고 틀렸다는 걸 알고도
“제가 어디서 잘못 생각한 건지 알고 싶어요”
라고 말하고 다시 시도하던 아이
그 아이들은 자신의 결핍을 감정으로 흘려보내지 않았다.
숨기지도 않았고, 과장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 결핍을 행동의 방향으로 조금씩 옮겨 놓고 있었다.
사람은 왜 어떤 이야기에 마음을 주는가.
잘해서일까, 앞서 있어서일까.
교실에서는 그 답이 조금 다르게 나타난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 비슷한 장면이 반복된다.
완벽한 참가자가 항상 끝까지 응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시청자가 끝내 마음을 주는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고,
그 한계를 넘기 위해 애쓰는 과정이 보이는 사람이다.
결핍이 서사의 출발점이 될 때, 사람은 매력적인 존재가 된다.
교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발표를 매번 잘하는 학생보다 말을 더듬으면서도 다시 시도하는 학생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문제를 한 번에 풀어내는 학생보다 틀린 이유를 끝까지 붙잡고 질문하는 학생에게 시선이 머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핍의 크기가 아니다.
결핍을 대하는 태도다.
결핍은 언제나 부정적인 감정에 머무르지 않는다.
결핍을 숨기며 열등감과 시기, 질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결핍이 욕구의 형태를 띠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차이를 직관적으로 알아보는 것 같다.
그 학생의 말과 행동이 자기비하나 다른이에 대한 공격으로 향하는지,
아니면 변화의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그래서 성적이나 단순한 노력과 무관하게 응원이 쏠리는 학생들이 생긴다.
그 아이들은 이미 완성되어 있어서가 아니라,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교사가 되고 나서야 이 사실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응원은 결과에 붙지 않는다.
응원은 과정에 붙고, 태도에 붙고
무엇보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는 사람에게 붙는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그런 방식으로 성장해 왔다.
비교에서 시작된 불편함은 곧잘 나를 움츠러들게 만들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나는 왜 저걸 부러워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그 질문은 나를 멈추게 하기보다, 조금씩 앞으로 움직이게 했다.
결핍은 사라져야 할 것이 아니라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다루는 법을 배우는 곳이 교실이라면,
우리는 학생의 부정적 감정보다 그 안에 숨은 결핍을 먼저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교실에서 학생의 결핍을 줄이려 애써야 할까.
아니면 그 결핍이 욕구로 자랄 수 있는 방향을 함께 만들어 주어야 할까.
교실은 완성된 사람을 가려내는 공간일까,
아직 도중에 있는 사람의 편이 되어 주는 공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