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이몽-같은 사실, 다른 이야기

나는 기억한다.

by 동네과학쌤

지난 주말, 또 우리는 그 이야기를 했다. 대학 1학년 여름방학, 함께 떠났던 농촌 활동. 민수가 텐트를 잘못 쳐서 새벽에 비에 흠뻑 젖었던 일, 준호가 라면 끓이다가 냄비를 태웠던 일, 다음날 파밭 800평 잡초 뽑기 싫어 밤새 기우제를 지냈던 이야기.


서른여덟의 우리가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도, 일 년에 서너 번씩 만나면 어김없이 십팔 년 전 그 여름으로 돌아간다. "야, 그때 기억나? 2학년 축제 기간 전공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누군가 이렇게 시작하면 모두의 얼굴이 밝아진다. 그리고 각자 조금씩 다른 버전의 기억을 꺼내놓는다.

누구는 그날 비가 왔다고 하고, 누구는 햇살이 좋았다고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차이는 더 벌어진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게 더 정겨워 보인다.


민수는 부산에서 치과 의사로, 준호는 결혼해서 신혼생활을 즐기며, 지영이는 제약 회사 연구원이 되어 있다. 변한 건 우리의 모습뿐만이 아니다. 만날 때의 대화 주제도 달라졌다. 예전엔 꿈 이야기, 연애 이야기, 미래에 대한 막연한 계획들이었는데, 이제는 결혼 이야기, 회사 이야기, 부모님 건강 이야기가 더 많다.


시간은 모든 것을 조각낸다. 매일 같은 강의실에서 만나던 우리는 이제 각자 다른 도시에서 다른 일을 하며 살아간다. 친구들을 만나고 나면, 시간이 조각낸 흩어진 순간들과 부서진 감정들이 내 안에서 떠다닌다. 시간은 참 이상해서, 지나간 순간들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의미와 다른 색깔로 그것들을 다시 태어나게 한다. 하나의 해프닝이었던 일들이 지금은 웃음 가득한 추억담이 되어 있다. 시험 망쳐서 울던 날도, 첫사랑에게 차여 절망했던 순간도, 취업 준비하며 불안해했던 시간들도 모두 '그때가 그리워'라는 한마디로 정리된다. 과거는 현재의 눈으로 다시 쓰여진다. 직장에서 스트레스받을 때는 과제에 쫓기면서도 자유로웠던 대학 시절이 천국 같다. 그때는 몰랐던 자유로움이 지금은 왜 이리 간절한지 모르겠다.

혼자 먹는 저녁이 쓸쓸할 때는 자취방에서 라면 끓여 나눠 먹던 그 소소한 행복이 그리워진다. 복잡한 인간관계에 지칠 때는 순수했던 그 시절의 우정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정말 그때가 지금보다 좋았을까? 등록금 걱정에, 미래에 대한 불안에, 연애 때문에 울고 웃던 그 시절이? 아니다. 다만 지금의 우리가 그때를 그렇게 기억하고 싶을 뿐이다. 기억은 현재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지난번 모임에서 민수가 아이폰을 꺼내 보여준 사진이 있다. 대학교 1학년 말 학생회에서 제부도로 MT를 갔을 때 찍은 우리들의 모습. 젊은 얼굴, 밝은 웃음, 반짝이는 눈빛. "이때 사진 보면 정말 애기들이네" 하며 웃었다. 그 사진 속 우리는 지금의 우리가 그리워하는 바로 그 모습이었다.

준호가 말했다. "우리 정말 어렸었네. 그때는 한 서른 되면 어른일 줄 알았는데."

지영이가 받아쳤다. "지금도 어른 같지 않아. 모이면 그때 그 모습 그대로잖아."

맞다. 우리는 모이면 여전히 스무 살이 된다. 서로를 그때 그 이름으로 부르고, 그때 그 농담을 주고받고, 그때 그 노래를 따라 부른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은 더 이상 정확한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가? 중요한 건 그 이야기가 우리를 연결해 준다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과 환경의 변화를 뛰어넘어, 우리를 여전히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라는 것이다.


나는 사실을 재조립하여 기억한다. 그리고 그렇게 재조립된 기억들이 지금의 우리를 지탱해 준다. 힘든 일상 속에서도 버틸 수 있는 힘을, 외로운 순간에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을.


서른여덟의 우리가 일 년에 서너 번씩 만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 시절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그 시절의 우리를 기억해 주는 사람들이 필요해서다. 서로를 그때 그대로 기억해 주고, 서로의 젊은 날을 증명해 주는 소중한 사람들.


매번 같은 이야기를 하지만 매번 다른 느낌으로 듣게 되는 것은, 우리가 조금씩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추억이지만 다른 의미로 다가오고, 같은 사람들이지만 다른 모습으로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변화조차도 언젠가는 그리운 추억이 될 것이다.

"다음엔 언제 만날까?" 헤어질 때마다 하는 말. 그리고 "이번엔 정말 일찍 헤어지자"라고 하면서도 새벽까지 이야기하는 우리들. 변하지 않는 건 그 마음이다. 함께 늙어가고 싶다는, 계속 만나고 싶다는, 이 우정을 지켜가고 싶다는 마음.


매번 같은 이야기, 매번 다른 이야기. 동상이몽. 그것이 우리가 쌓아가는 또 다른 추억이다. 언젠가 마흔, 쉰이 되어서도 우리는 이 이야기를 할 것이다. "서른여덟에 만났을 때 또 그 이야기했지?" 하면서. 그리고 그때도 우리는 웃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철없는 그 웃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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