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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쓰 Jan 28. 2020

점자 없는 약봉지

있어야 할 것들에 대하여

 스페인 약봉지에는 점자가 있다고 한다. 바르셀로나를 내 마음속 제2의 고향쯤으로 여기던 자로서 그 사실을 몰랐던 게 좀 속상했다. 아냐, 가만. 모를 수도 있지. 난 스페인에서 안 아팠거든. 내가 주로 아픈 곳은 어디냐 하면, 지금 이 곳. 대한민국 서울이었다.


  우리나라 약봉지에는 점자가 없다. 점자가 없다는 것도 몰랐다, 친구에게 스페인 약봉지 얘길 듣기 전까진. 스페인에선 약봉지를 본 적 없어도 한국에선 수없이 봤는데 왜 몰랐지. 그래, 나는 없어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니까. 그렇지만 점자 없는 약봉지 얘길 듣고 나는 마음이 많이 불편해졌다.


  벌써 2년 전인가 보다. 인권법재단에서 약 2주 간 짧은 실무수습을 했었다. 인권변호사라는 직업에 막연한 로망이 있을 때다. 이 때의 2주로 나란 인간은 인권변호사란 고귀한 직업을 하기엔 너무 속물이란 걸 깨닫고 두 번 다시 그쪽은 보지 않았지만, 그때의 경험은 로스쿨에서의 내 시간에 큰 흔적을 남겼다. 같이 인턴했던 오빠가 시각장애인이었기 때문이다.


  오빠는 나와 함께 장애인권 전문 변호사 밑으로 배정되었는데, 처음 만나 인사하면서 눈을 보고 인사하는 게 맞나 혼란스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생각보다 조심스러웠고 매사에 망설여졌다. 나름대로 장애인권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으면서 그들과 한 번도 함께 일해본 적도, 오랜 시간 얘기해 본 적도 없음을 오빠와 일하며 깨달았다. 그러면서 애초에 인권변호사라는 쪽을 생각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심각한 위선에 자기기만이었는지 알아차리는 데는 다행히 아주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정말 다행이었다. 아주 구제불능은 아니었던 모양이지. 통렬한 자기반성과 동시에, 나는 내가 제일 잘하고 또 좋아하는 일을 시작했다. 오빠를 관찰하기로 한 것이다.

  재미있었던 것은, 오빠는 나와 성향이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오빠는 약간은 신경질적이고 방어적이라 나와는 다른 느낌의 예미니스트였다. 그러나 아주 성실하고 예의 발랐으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해 가끔 아주 크게 하하 웃곤 했다. 아마도 그래서 나는 동정하고 무조건 잘해주는 입장을 취하기보단(비장애인으로 매우 흔하게 저지르는 잘못이겠지) 그저 오빠를 멀리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대할 수 있었다. 오빠는 나와 다르고, 무엇보다도 당당한 사람이었으니까.


  오빠는 참 당당했다. 무척 똑똑하고 야무졌다. 항상 차분하게 자기 생각을 정리해 말했고 잘 흥분하지 않았다. 목소리도 멋있었고 농담도 좋아했다. 이쯤 되면 이성적인 매력을 느낀 거 아니냐 싶겠지만 그런 건 단 1%도 없었음을 밝혀둔다. 나는 단지 점점 오빠를 사람으로 좋아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소중한 2주가 저물어 가던 어느 날, 세미나가 있었다. 좁은 방에 둘러앉은 우리에게 세미나를 맡은 변호사님께서는 화이트보드에 그때그때 써가며 말씀하셨는데, 좀 의아했다. 그때까지 모든 변호사님들이 파워포인트로 시각자료를 만드셔서 오빠한테 미리 보내주신 걸로 알고 있는데. 저러시면 곤란한데. 어쨌거나 세미나는 시작했고,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빠는 그저 평온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그때였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나는 손을 들고 말했다.

  "저... 변호사님. 죄송합니다만, 아까부터 칠판을 가리키면서 '이것', '이런' 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시는데 그러면 순규(가명) 오빠가 이해하기 좀 어렵지 않을까 해서요."

  변호사님은 당황한 기색으로 오빠에게 직접 이해가 힘든지 물으셨고 오빠는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나는 물론 변호사님께 한 쿠사리 들었고.


  세미나가 끝나고 변호사님께서는 느낀 점을 말해보라고 하셨다. 오빠의 차례. 오빠는 말했다.

  자신은 장애인으로 비장애인들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고. 너희가 아무리 이해한다고 해도 이렇게 살아보지 않은 자들로서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벽을 두르고 있었던 것 같다고. 그런데 오늘 유리가 지적하는 걸 들으면서 자신의 편협함을 알 수 있었다고. 그래서 참 외람되지만 오늘은 세미나보다는 그 중간의 지적 한 마디가 생각을 많이 하게 했다고.


  오래된 이야기다. 하지만 지금도 오빠가 저 말을 할 때 내 가슴이 얼마나 벅찼는지는 -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순간 그 말을 하는 오빠가 빛나며 주위가 굉장히 따뜻한 색을 띠었다. 속으로 다짐했다. 앞으로 좀 더 관심 갖겠노라고, 나와 다르다고 배척하지 않고 더 포용하겠노라고.


  얼마나 그 다짐을 지키고 살아왔는지는 모르겠다. 자신도 없고. 그렇지만 나는 오늘도 오빠와 보낸 시간을, 그리고 있어야 하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2019년 중순쯤 써 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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