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런가 했더니
1.
정말 신기하게 백수가 제일 바쁘다.
난 대체 왜 이렇게 바쁜 것일까.
오늘 드디어 한숨 돌려보나 했더니,
개뿔.
2.
한숨 돌릴 줄 알았던 이유는 로스쿨 입시시즌이 거의 끝나가기 때문.
한 3주 정도, 아이들 로스쿨 자소서 첨삭 알바? 과외? 를 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 알바가 얼마만큼의 파괴력을 지닐지 생각도 안해보고 무작정 뛰어들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을 온 몸으로 실감하면서.
3.
아니 그런데, 이거 생각보다 너무 책임감을 가져야 되는 일이잖아.
당황스러웠다.
나 때문에 애들이 로스쿨 갈 수도 못 갈수도 있는거야?
물론 못 간다고 내 탓은 아니겠지...맹세컨대 내가 글을 더 망친 아이는 없다...고 믿고 싶다...
그렇지만 아무리 저렇게 자기위안을 해도,
생각보다 남의 운명을 더 많이 나눠 지게 되었다는 깨달음이 하루 하루 나를 짓눌러왔다.
3주 정도 하니 그 중압감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가 되었고
아 이 짓 다신 못하겠고, 그나마 지금 담그고 있는 발도 빨리 빼야겠단 생각을 굳히니,
올해 자소서 시즌은 어느새 끝나있었다.
4.
돈 없어서 사람들도 못 만나고 위축되어 있던 요즘,
글로 만나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신선한 자극이었다.
경찰하다 로스쿨 가고 싶은 아이,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아동인권변호사가 되기로 한 아이 -
아이들의 목소리와 말투만큼이나 사연은 다양했고
나는 또 - 역시나 마음을 너무 많이 줘버렸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아이들에게.
다들 좋은 결과 있었으면.
5.
그 와중에 어떻게든 변호사는 되어보겠다고,
수습과제를 꾸역꾸역 해내고는 있었는데. 대표님 마음에는 전혀 차지 않았고.
또 한소리 들었다. 인생 쉽지 않아요.
6.
더 충격적인 사실은,
글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이 글을 쓰는데 4일 이상이 걸렸다는 것이다.
글을 끝낼 정신도 없어서 오늘 간신히 대-충 마무리한다. 참나원.
7.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을 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은 파격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잎을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 쓰는 것은 슬픈 일이다. 때로는 억지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 하다가도 그런 여유를 갖는 것이 죄스러운 것 같기도 하여 나의 마지막 10분의 1까지도 숫제 초조와 번잡에 다 주어 버리는 것이다. " - 피천득, [인연] 중 <수필>
8.
피천득의 사상은 좋아하지 않지만 그의 문장은 좋아하고.
[인연]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으며 그의 안티가 되는 바람에, 책 넘기기 너무 힘들었지만 저 부분은 좋았다.
역시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지, 사람이.
그렇다고 내 글이 수필씩이나 된다는 건 아니다. 나도 양심이 있는 사람이다 이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