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홀로여행기

부산국제영화제 가다

by yurui

무작정 배낭을 꾸린다. 1박 2일 일정이라 여벌 옷도 챙기지 않는다. 심지어 속옷도 챙기지 않았다.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나중에 깨달았다. 챙긴것이라고는 노트북과 필통, 메모장, 충전기, 잠옷, 그 날짜 신문이다. 속옷은 챙기지 않아도 잠옷은 챙겼다. 잠은 편하게 자야 하니까. 오지 여행도 아니고 고작 부산이다. 필요한 것은 얼마든지 현지에서 조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도 굉장한 오만이었다.

부산 여행은 아주 오래전부터 꿈꿔 왔다. 10월이면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축제의 장이므로 10월이 가까워지면 갈 수 없어서 속상했지만 그러기 전부터 이미 체념했기에 당연히 못 갈 곳이라 꿈으로만 남겨두는 곳이었다.


그러다 올해는 푸념만 하지 않고 진짜 움직이기로 했다. 반대하던 가족들이 흔쾌히 보내주기로 했다. 가족 모두가 함께하지 못하면 혼자 여행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가족이란 그런 것이었다. 결혼의 의무가 있고 부양의 의무가 있어서 법으로 얽힌 가족은 의무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보통의 사람들은 쉽게 끊어낼 수가 없다. 그렇게 사랑보다 의무가 앞서는 법적인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살다 보니 혼자 여행이란 상상만으로나 가능했다. 갑자기 의무를 무시하기로 한 건 아니다. 차라리 법적 테두리를 뚫고 나가는 편이 내 도덕성에는 더 어울린다. 그래서 법적 테두리를 벗어나기로 협의하면서 오히려 사춘기 어린 아이의 치기가 더 엇나가지 않게 배려하듯 원하는 대로 편의를 봐주고 있다. 물론 투쟁의 과정이 없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결혼 후 첫 외박을 하게 되었다.


뚜렷한 목적이 있었고 오랫동안 바랐던 일이라 혼자 하는 첫 번째 여행이 망설여지거나 두렵지 않았다. 좀 귀찮긴 했지만 결혼 전에는 혼자 자주 돌아다녔기 때문에 그저 아주 오랜만에 가는 여행일 뿐이었다. 기차편은 물론이고 숙소도 정하지 않았다. 요즘 성격 유형을 알아보는 MBTI에 따르면 나는 즉흥적인 P다. 100% P라고는 하기 어렵다. 처음 시작하는 일에는 계획부터 차근차근 세우고 보는 J형이다. 그러다 익숙해지면 머릿속만 굴리는 P가 된다. 낯선 곳으로 떠나 낯선 곳에 적응해가는 여행은 아무리 철저히 계획해도 어그러지기 일쑤에 어떤 변수가 생길지 알 수 없는 미지수라 차라리 계획 없이 가는 걸 선호한다. 최대 몇 달을 고민해 계획해도 현지의 날씨와 분위기와 그곳 사람들의 일정까지 모두 맞춰갈 수는 없다. 그럴 바에는 마음 편히 즉흥 여행을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즉흥 여행의 단점은 미리 계획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통편과 숙소를 결정하는 데 빠른 결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빨리 결정하지 않으면 여행 기간 내내 방황하는 시간만 쌓일 것이다. 손해를 보더라도 일단 마음이 가는 쪽으로 결정한 후 빠르게 실행에 옮겨야 온전한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내가 부산에 가는 목적은 뚜렷했으므로 즉흥 여행이 아닌데 전날까지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한 건 결정장애도 한 몫 했다. 몇 달 전 오픈한 부산국제영화제 영화 예매 사이트에 들어가니 수많은 영화들이 상영되고 있었다. 약 열흘간 진행하는 부산국제영화제는 영화제 기간 동안 센텀시티 영화의전당 등 7개 극장에서 총 278편의 영화를 상영한다. 하루에 수십 편이 상영 되다 보니 어떤 영화를 볼지 사전에 꼼꼼하게 영화 정보를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내 일정에 맞는지, 영화 시간은 어떻게 되는지, 상영 극장은 어딘지 확인하고 노선도 잘 짜야 한다. 그러면 하루 3,4편의 영화를 볼 수 있다. 나는 10일, 11일이 휴무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음에도 10일 날 볼 영화를 고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나는 무작정 가기로 했다.


부산에 가기 전 들릴 곳이 있어서 출발부터 늦었다. 비행기가 빠르다는 얘기에 지하철로 이동하며 비행기편을 알아보고 예매했다. 네이버 사이트에서 모든 것이 가능했다. 최저가 항공정보부터 예매까지 일사천리다. 돈만 있으면 된다.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건 김포에서 김해공항으로 가는 비행기가 상공을 나는 시간은 30분 정도지만 비행기 특성상 탑승수속이 길고 예측 불가능한 연착 사유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이다. 김포까지 출발 1시간 전에 도착해 종이 티켓으로 발권하고 검색대를 통과해 탑승 전까지 약 30분 남짓한 시간을 탑승 대기해야 했고 김해 공항에서 군사훈련이 있는 바람에 30분 가량 착륙도 못하고 상공을 배회해야 했다. 차라리 KTX를 탈 걸 그랬다. 김해 공항에서 대중교통으로 숙소까지 이동하려면 또 1시간 20분이 걸리는데 부산역에서는 50분이면 된다. 돈만 버리고 시간은 시간대로 잡아먹었다. 그래도 김해 공항에서 탑승수속을 하고 대기하는 동안 진짜 해외라도 나가는 것처럼 설렜다. 여행 기분은 확실히 냈으니 그걸로 만족이다.


김포 공항으로 이동하는 지하철 내에서 잡은 해운대 숙소에 도착하니 벌써 오후 5시다. 아직 영화제 구경도 못했는데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다. 마지막 영화가 7시 30분에서 8시, 8시 30분이다. 서둘러야 했다. 영화의전당 야외상영관에서 상영하는 8시 영화 ‘시빌 워’를 예매하고 서둘러 극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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