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일의 집을 짓다. 글을 짓다. 지어 [지어] 지으니 [지으니]
그 하루
- 스케치를 짓다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해도 괜찮았다. 설계 도면이나 캐드를 사용하여 설계하지 않아도 되었다.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그려보았던 많은 스케치들이 점차 그 모습을 갖춘 그림이 되기까지는 2년의 시간이 걸렸다.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지 알 수 없는 2년, 지우고 또 버려야 했던 수많은 스케치들과 많은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낙서들, 구글 스케치업을 통해 집의 설계도를 그려본다. 저 푸른 초원 위에 둘이서 만든 나무집. 그림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이루어지지만 그것이 현실이 될 때까지는 수만 개의 못과 수천 번의 못질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 시작은 용기다-
시작이 좋은 건. 나의 시간 속에 남을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간다는 상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상과 시작은 맞닿은 경계선이다. 무수한 경계 속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살아가는 건 그것이 보일 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늘 그랬듯이 언제나 시작에 관한 이야기다.
어떻게 끝날 것인가는 선택의 순간에 그리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다.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어떻게 시작해야 멋진 시작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 최초의 물음 앞에서 대답은 늘 한결같은 하나 용기였다.
시작이 내포하는 세계 속에는 희망보다는 좌절이, 기쁨보다는 걱정이,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해야만 하는 것, 인간은 언제나 용기의 이름으로 조금씩의 성장을 통해 진화를 거듭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망설여지던 가을날의 바람이 손끝에서 사라지면, 시작은 늘 겨울의 차가운 공기처럼 갑자기 들이닥친다. 어떤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생각할 필요 없다. 그저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딱 한 걸음. 한 걸음의 차이일 뿐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을 안고 차가운 기운 속에 옷깃을 여미며 앞으로 나가야 하는 긴 기다림의 처음. 다가올 시간은 봄이 아닌 겨울이 오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 자리 잡기를 하다
구글 스케치업을 하면 집의 넓이와 크기도 산출되지만 들어가는 나무의 자재도 대강 산출된다. 아이들 장난처럼 줄자와 노끈등을 가지고 여기에서부터 저기까지, 저기부터 여기까지 여기가 좋을지 저기가 좋을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땅에 집터를 찾아 나섰다. 갈대숲만 우거졌던 땅의 한편, 남편이 해진 낫으로 갈대숲을 걷어내자 생각지도 못했던 풍경이 펼쳐졌다.
그렇게 걷어낸 곳에 줄자를 잡고 끈으로 자리를 표시해 봤다. 자리 잡기가 시작되었다.
- 자리는 정해지지 않았다-
서울에서의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자 마음먹었을 때 우린 지도를 폈다. 서로에게 불편하고 익숙한 환경에 쉽게 지쳐갔다. 지도를 펴고 손가락으로 무심히 가리키며, 이곳으로 가보자라고 했을 때 나는 왠지 그곳이 마음이 들었다. 보지도 못했고 가지도 않았던 그곳,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무지의 세상, 내가 그곳이라는 확신이 드는 건 그저 그런 느낌 따위의 운명이나 인연, 행운이나 기적 같은 일종의 미신 같은 맹목적인 믿음이었던 것이다. 사실. 어느 곳으로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저 뭐든지 다시 시작을 위한 용기를 내고 싶었던 것뿐이다. 결혼 후 생활이 실패했다는 좌절감에 휩싸였다. 나를 닮은 아이가 내 인생을 바꿀 것 같아 불안했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 속에 무기력해졌다. 나는 여전히 자리를 잡지 못해 방황하는 청소년 같았고 , 자리가 가지는 책임감에 시달리는 회사원 같았다.
거침을 걷어 내는 건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했다. 잘 다듬어진 어느 자리가 주는 편안함을 뿌리쳤다는 후회는 그 후로 오랫동안 내 곁을 맴도는 상실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가 매력적인 것은 거친 세상의 끝에서 만나게 될 새로운 공간이 주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자리들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바른 길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자리는 지켜 가는 게 아니라 만들어 가는 거다. 풀과 풀 만을 감싸고도는 무성한 바람. 모호한 자연의 어느 한 부분처럼 무기력하게 드러누워있던 자리, 그 자리를 택해 의미를 심어주고 의미를 만들어주고 의미를 가꿔주고 의미를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걸어본다. 그럴 때 점차 그 의미대로 자리를 잡아간다. 의미가 빚어낸 자리는 그곳에서 가장 빛나는 곳이 된다. 이곳은 나에게 가장 빛나는 자리. 그렇게 명명하는 순간 이야기가 시작되고 그 이야기들이 들려주는 자리 잡기도 시작된다. 그렇게 자리가 된 나의 의미들. 그곳에 있을 때도 떠나도 내 마음에 영원히 남아있을 자리가 기억이 되어 나를 잡아 준다.
" 자리 잡기 " 나는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
- 터파기와 버림 작업을 하다
터파기와 버림 작업이 시작되었다. 버림 작업은 말 그대로 콘크리트를 버린다는 뜻이다. 기초 콘크리트 타설하기 전에 땅을 고르고 그 위에 50~1mm 정도의 두께로 콘크리트를 양생 하는데 이를 버림 콘크리트 라고 한다. 버림 작업을 하는 이유는 콘크리트를 얇게 타설 하여 집의 기초가 세워지면 집의 하중에 대한 분산 효과가 있고 · 흙에 대한 응력구근의 범위 확장 등을 통한 지내력이 향상된다. 공간을 식별하기도 좋다. 무엇보다 버림 작업을 선택했던 이유는 기초를 튼튼히 하고 싶어서였다. 기초가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에 충실하고 싶었다. 하중을 견디는 힘과 무게를 지탱하는 강함을 기초에서 찾고 싶었다. 겨울의 차가운 바람 속에서 1차 버림 작업을 하고 해체 후 다시 2차 작업을 시작했다. 낡고 오래된 중고 트럭을 사서 거푸집을 싣고 왔다. 아직 시작도 안 한 겨울인데 거푸집을 설치하는 과정이 얼마나 고되고 어려운지 힘을 들여서 하는 손가락이 아픈 건지 차가운 겨울바람이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어 쓰린 건지도 모른 채, 다음날이 되면 퉁퉁 부어버린 손을 애써 감추기 위해 장갑을 끼우면서 다시 또 거푸집을 설치하고 콘크리트를 부었다.
콘크리트 타설 후 비닐로 꽁꽁 싸매고 양생작업을 위해 열풍기까지 구입해 비닐 안에서 틀어주며 혹여 불이라도 날까 비닐 안에서 굳어가는 콘크리트와 함께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다. 콘크리트 작업만 1주일을 하고 거푸집을 해체하던 날 라디오에는 유재석이 부르는 “말하는 대로” 가 흘러나왔다. 놀랍게도 “말하는 대로 “ 되는 느낌이었다.
-버리는 순간조차 의미가 있다-
어릴 적 부모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싸우다 지쳐 한 사람이 나가면 며칠을 들어오지 않았고 그 사람이 들어올 때쯤 또 다른 사람이 나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 두사람다 안 들어오는 날이 길어지면 몇 날 며칠을 혼자 밤을 이겨내야 했다.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애국가가 나올 때까지 티브이를 켜 놓다가 4절의 마지막 부분까지 모두 다 듣고는 무지갯빛 화면으로 전화되어 삐 소리가 나는 티브이 볼륨을 줄이고 소리 없는 무지개 화면을 의지하며 잠이 드는 것뿐이었다. 아침이 밝아오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을 둘러보면 역시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적막한 햇살만이 파고드는 마루에 우두커니 서있다 연필을 들고 창문에 걸린 커튼 뒤에 이렇게 써보는 것이다.
“우리 집은 행복하다”
버려진다는 느낌은 외로움이 잠식하면서 찾아드는 고통 같은 것이었다. 적막과 침묵은 언제나 두려움을 몰고 온다. 나를 둘러싼 공간에서 느껴지는 혼자라는 외로움에 나는 늘 누군가로부터 버림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거 같았다.. 오늘은 어땠니? 하고 누군가 물어봐 준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사랑해요라고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자라는 동안 그런 질문은 잘 받지 못했다. 나는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버림받는 기분이 들까 봐 무섭고 조급해하는 커튼 뒤에 숨어 연필만 만지작 거리는 아이였다.
버림 콘크리트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나는 왜 콘크리트를 버려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나를 버려야지 하나를 꼭 얻는 법이었다. 쏟아내듯 버려지는 콘크리트를 얇게 펴 주고 시간을 견뎌 내면 단단히 굳어서 기초를 위한 기초가 된다. 버려지는 순간에서 쏟아내던 수많은 감정들조차도 다 의미가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 감정들은 나를 쉽게 들뜨지 않는 사람으로, 쉽게 말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 사람들의 기분이나 행동에 크게 의존하지 않고 내 안에 나를 지키기 위해 집중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힘들 때마다 책을 읽었고 책을 읽을 때면 외롭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수많은 책 속의 세계들이 나를 설레게 하고 그 세계를 쫓아 글을 써보기도 했다.
버림의 시간을 천천히 견뎌내면 소중한 의미의 나로 굳어갈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이 나를 이루는 가장 근원적인 기초가 되었다는 것을 나는 굳어가는 콘크리트를 보며 느낄 수 있었다.
모든 무게를 지탱하는 그 힘은. 버려졌던 곳에서 천천히 견뎌냈던 단단함에 있었다.
집의 공정 중 가장 힘든 시간이었고 고된 시간이었다. 오로지 둘이서만 집을 직접 지어보겠다는 씩씩하고 당찬 포부와는 다르게 시작도 하기 전에 너무 힘들고 고되서 포기를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어렵고 고된 과정을 거칠게 경험하면서 나는 그 뒤에 있을 무수한 작업들에 대해 한 번도 포기를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어떤 것도 의미가 없는 순간은 없다. 버려지는 그 순간까지도
- 독립기초를 만들다
기초를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독립기초 온돌기초 줄기초 복합 기초 등등 그중 독립기초는 원형이나 각형 기둥을 하부에 설치해서 기둥을 타고 전달되는 힘을 독립적으로 지반에 전달하는 기초를 말한다. 여러 가지 기초 중 독립기초를 선택했던 이유는 집의 무게와 힘을 각 기둥에 전달하여 하중에 잘 견딜 수 있게 하고, 독립 기초이다 보니 밑에 공간이 생겨 보수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바람이 통과할 수 있는 구멍을 양쪽에 뚫어주면 통풍에 잘돼서 나무가 가지는 수축과 팽창의 특성을 어느 정도 줄여볼 수 있다.
- 우린 모두 독립하고 있다-
사실 독립기초가 좋았던 이유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기둥들이 독립적으로 떨어져서 받을 힘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왠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냥 보기에는 사각형태의 힘도 없을 것 같은 블록같이 보이지만 사실 하나하나는 단단한 콘크리트와 그 콘크리트를 더 단단하게 해 줄 강한 철물을 박혀있다. 각각은 앞으로 엄청난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중력의 힘을 견딜 준비가 되어있는 더없이 강인한 용병 같은 존재였다.
나는 독립적으로 서있는 저들의 모습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일정한 간격 속에서 각각의 존재만으로 어떠한 시련도 잘 이겨낼 수 있는 의미를 전달하는 거 같았다. 일정한 간격의 독립은 내가 추구하는 가족상과도 비슷했다. 외로움에 혹은 두려움에 서로 엉켜버리는 집착적인 관계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성장을 이루는 과정의 가족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잘 되지 않았다. 결혼생활 내내 나는 늘 의존적이었고 타인을 향한 기대감과 위로감에 목말랐으며 누군가 내 곁을 떠나면 불안에 떨며 관계 속에서 집착을 했다. 아이에게도 불안한 엄마였고 남편에게도 부담스러운 아내였다.
독립은 홀로 독자에 설립 혼자 서있는 것이다. 혼자 쓰러져 있거나 혼자 앉아있거나 혼자 달리지 말고 혼자 바르게 서 있을 때 삶이 주는 무게들을 감당해 낼 수 있다. 생각해 보면 나 혼자 서있는 거 같지만 모두 옆에서 힘을 같이 나누고 있다. 나 혼자서는 절대 하중을 감당할 수 없다. 간격이 주는 존중함, 그 사이에 존재하는 다정함은 인류가 엄청난 중력에도 무너지지 않고 견뎌냈던 진화의 방법이었다. 다정함이 나와 우리의 세계를 지탱해 주고 있다.
세상 모든 만물들은 토대와 근본 위에서 탄생한다. 우리는 그것을 기초라고 명명했다. 그래서 기초는 언제나 튼튼해야 한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