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벤허>의 넘버(노래)'골고다'는 예수에게 부르짖는 내용이다. 그 많은 군대와 왕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고서 죄인의 길을 걷는 것이, 그리고 자신의 분노와 비참한 운명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묻는다.
당신을 구하고 우리를 구원해요. 난 대체 뭣 때문에 여기에 있나, 내 가슴에 사무친 칼은 뭐였던가-
그는 왜 예수에게 구원을 요구했을까. 사실 그는 그 누구보다 먼저 스스로를 구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맞닥뜨린 벽과 비참한 운명은 극복하기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고, 영향력과 상징성을 고려했을 때 예수만이 해방의 희망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졌다. 그러나 예수는 벤허의 갈망 대신 영적인 구원을 택했다. 벤허와 같은 소망을 가졌던 것이 배신자 유다였고, 예수의 선택에 벤허는 거대한 허무를, 유다는 분노를 느낀다.
그렇다면 예수는 오랜 기간 동안 로마 제국의 압제와 지배 속에서 고통받던 유대인에게 독립을 안겨주지 않았을까? 교회에서는 예수의 선택이 세속적인 구원이 아닌 인간의 죄를 대속하고 영혼의 구원을 의미한다고 가르친다. 폭력으로 맞서는 것이 아닌 사랑과 용서를 알려주고자 했으며, 영원한 희망을 남기고자 했다는 것이다.
전능한 신의 아들로서 현실의 해방과 영혼의 구원을 동시에 추구할 수 없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차치하고, 이 노래는 문득 내게 다가와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다. 어렸을 적 집안의 강제로 설교를 들을 때도 영 감흥이 없던 구원 이야기를 교회에서 나온 지 한참 된 지금 곱씹게 된 것이다. 난 대체 무엇 때문에 우울증이 걸렸는가, 나도 모르는 내 가슴에 사무치는 것은 무엇인가. 나아지고 있긴 한 건지, 징표를 찾고 싶었다.
나는 지도교수님으로부터 동등한 연구 동료로서 바로 설 수 있기를,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자랑스러운 제자로 인정받기를 바랐다. 내 눈에는 완벽하기만 한 교수님을 따라가면 나의 이상(커리어를 착착 쌓아나가 독립된 연구로 벌어먹는 연구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는데, 교수님은 그물을 내리는 법을 알려주고 물고기를 잡아주진 않았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나는 좌절했다. 교수님의 옆에서 아름다운 이상을 그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목표와 기대는 부담과 불안으로 변질됐다.
전공이 좋아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싶어서 내 발로 들어온 대학원인데 인문사회계 대학원생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동기도, 선배도, 후배도 없이 외로운 길에서 자기확신은 흐려져 갔다. 교수님이 오롯이 1:1로 붙어 돌보아 주는 환경에서 내 목표는 곧 교수님이 되었다. 나의 성장을 확인할 길이 없으니 교수님의 평가에 의존했다. 독립된 연구자로 나아가는 과정임을 잊고 내 발자취의의의를 교수님께 의탁했다.
아, 교수님이 내 구원자였구나.
뒤에서 언제나 믿고 응원해 주는- 일반적인 가족의 그림은 내게 해당되지 않았다. 내가 미워하는 건 오직 한 사람뿐이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본 결과 온전히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홀로 온전한 것이 아닌 각기 다른 이유로 모두에게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하나부터 열까지 걸음마 떼는 것을 알려주는 교수님께 스스로를 옭아매었다. 교수님과 나의 지향점이 다른데 나를 증명해 보이겠다며 홀로 열의를 불태웠다. 결국 교수님의 말 한마디, 행보 하나에 휘청이며 정체성의 위기를 맞았다.
나의 구원자가 목표하는 것이 나와 다를 때 나는 허무와 갈피 잃은 불안을 느꼈다. 내게 사무친 칼은 1차적으로는 신뢰와 인정에 대한 갈망이며, 종래에는 불안정성에 대한 승리이다. 그렇다면 내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