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미생의 믿음' -윤회하는 약속

[일본 근대 환상 문학 10]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尾生の信

by YOU EUNKYOUNG

미생은 다리 아래에 망연히 서서, 아까부터 여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높은 돌다리 난간에는 담쟁이덩굴이 반쯤 뻗어 올라 있고, 가끔씩 그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의 흰 옷자락이 선명한 저녁노을에 비쳐 하늘하늘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그러나 여인은 아직 오지 않는다.

미생은 나직이 휘파람을 불며 가벼운 마음으로 다리 아래 모래톱을 둘러보았다.

다리 아래 펼쳐진 두 평 남짓 넓이의 황톳빛 모래톱은 물과 맞닿아 있다. 물가 갈대 사이사이로 둥근 구멍들은 아마도 게의 집이리라. 거기에 파도가 와닿을 때마다 둔탁하고 낮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여인은 아직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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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은 다소 기다림에 지친 듯 물가로 다가가, 배 한 척 지나가지 않는 고요한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물줄기를 따라 푸른 갈대가 빈틈없이 빽빽하게 자라나 있고, 그 갈대 사이사이에는 군데군데 갯버들이 둥글게 들어차 있다. 그래서 그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강폭에 비해서는 넓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맑은 물이 띠 모양을 그리며 운모 같은 구름 그림자를 금박 입히듯 고요히 갈대숲 사이로 굽이치고 있다. 그러나 여인은 아직 오지 않는다.

미생은 물가에서 발길을 돌려 이번에는 넓지 않은 모래톱 위를 이리저리 거닐며 서서히 짙어가는 황혼의 고요함에 귀를 기울였다.

다리 위에는 한동안 행인의 발길이 끊긴 듯 신발 소리도, 말발굽 소리도, 수레 소리도 더는 들려오지 않는다. 바람 소리, 갈대 소리, 물소리뿐. 그러다 어디선가 요란하게 왜가리 우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멈춰 서 보니 어느덧 밀물이 들어온 듯, 황토를 씻어내는 물빛이 아까보다 훨씬 가까이서 번뜩이고 있다. 그러나 여인은 아직 오지 않는다.

미생은 잔뜩 눈살을 찌푸리며, 다리 아래 어스레한 모래톱을 점차 더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 사이 강물은 한 치씩, 한 자씩 서서히 모래톱 위로 올라온다. 동시에 강에서 피어오르는 물비린내와 물이끼가 서늘하게 살결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올려다보니 이미 다리 위에는 선명했던 석양빛은 사라지고, 다만 돌난간만이 푸르스름한 저녁 하늘을 검은빛으로 선명하게 가르고 있다. 그러나 여인은 아직 오지 않는다.

마침내 미생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강물은 이미 신발을 적시며 강철보다 차가운 빛을 머금고서 다리 아래에 넘실거린다. 이대로라면 무릎도, 배도, 가슴도 머지않아 이 무정한 만조의 물결 속에 잠기고 말 것이 분명하다. 아니, 그러는 사이에도 물은 더욱 불어나서 이제는 드디어 종아리까지도 강물 아래 잠겨버렸다. 그러나 여인은 아직 오지 않는다.

미생은 물속에 서서 여전히 한 줄기 희망을 버리지 못한 채, 몇 번이고 다리 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배까지 잠긴 물 위에는 이미 아득히 땅거미가 내려앉았고, 흐릿한 안개 속에서 멀고 가까운 갈대와 버드나무가 쓸쓸히 잎사귀 부딪치는 소리만을 보내온다. 그때 미생의 코끝을 스치며 농어 같은 물고기 한 마리가 하얀 배를 번뜩이며 튀어 올랐다. 물고기가 솟아오른 하늘에도 드문드문 별빛이 보이기 시작했고, 담쟁이덩굴이 얽힌 돌난간의 형체조차 이른 초저녁 어둠 속에 파묻힌다. 그러나 여인은 아직 오지 않는다.

……

한밤중, 달빛이 온 강물의 갈대와 버드나무 위로 넘쳐흐를 때, 강물과 산들바람이 고요히 속삭이듯 스치며 다리 아래 미생의 주검을 부드럽게 바다 쪽으로 실어 나른다. 하지만 미생의 영혼은 적막한 하늘 한가운데 떠 있는 달빛에 마음을 빼앗겼는지도 모른다. 가만히 주검을 빠져나와 희부연 하늘 저편으로 마치 물비린내와 물이끼가 소리 없이 강에서 아른아른 피어오르듯, 느릿하고 고요하게 높이 날아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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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수천 년이 지나, 이 영혼은 무수히 윤회하여 다시금 인간 세상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나에게 깃든 영혼이다. 그래서 나는 현대에 태어나긴 했지만, 무엇 하나 의미 있는 일을 하지 못한다. 낮이나 밤이나 멍하니 꿈결 같은 나날을 보내며, 그저 다가올 무언가 불가사의한 것만을 기다리고 있다. 마치 저 미생이 해 질 녘 다리 아래에서 영원히 오지 않을 연인을 끝없이 기다렸던 것처럼.

(1919년)


유튜브영상으로 일본어 원작을 읽고, 한국어 번역 들어보기



<번역가의 한 마디>

'미생지신(尾生之信)'이라는 고전 설화에서 유래한 성어를 근대적인 환상문학으로 재탄생시킨 작품이다. 노나라 사람 미생(尾生)이 사랑하는 여인과 다리 아래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여인은 나타나지 않고 갑자기 강물이 불어난다. 하지만 미생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리를 떠나지 않고 다리 기둥을 껴안은 채 물에 잠겨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신의의 상징으로도 융통성 없는 어리석음의 상징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런 설화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수천 년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 현대로 이어지는 기다림의 미학으로 승화시켰다. 왜 남자가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단지 남자가 하염없이 기다리는 모습, 아무리 기다려도 여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인은 아직 오지 않는다"라는 문장이 반복되면서 기다림의 애잔함, 기다림이 배신당하는 애절함이 극대화된다. 급기에 수천 년 동안 윤회하면서도 그녀를 기다리는 남자, 결국 무엇을 기다리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삶의 의미조차도 잊어버린 채 그렇게 기다리기만 한다. 나쓰메 소세키의 '열흘밤의 꿈-첫날밤'에서는 먼저 죽음을 맞이한 여인을 기다리다가 백년이 지난 후에야 세월의 흐름을 깨닫게 되지만, 이 작품에서 미생은 수천 년을 윤회하면서까지 약속을 어긴 여인을 기다린다. 이것을 어리석음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디지털 시대에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의 의미조차 잊혀져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믿음, 기다림, 약속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케 하는 작품이 아닐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1892~1927)

"근대 일본 지성의 정수, 고전의 바다에서 인간의 본성을 낚아 올리다"

단편 소설의 거장: 짧은 분량 안에 치밀한 구성과 날카로운 지성을 담아내는 데 탁월하며, 일본 근대 문학의 황금기를 이끌었습니다.

고전의 현대적 재해석: 《라쇼몽》이나 《코》와 같이 옛 설화나 역사 속 이야기를 빌려와, 현대인이 직면한 이기심, 신의, 예술적 집착 등을 예리하게 파헤쳤습니다.

탐미주의와 허무 사이: 극도로 정제된 문장을 통해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그 이면에 깔린 인간 존재의 덧없음과 허무를 냉철하게 응시했습니다.


〈미생의 믿음(尾生の信)〉

—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기다림

"약속은 지옥이 되고, 그 지옥은 다시 구원이 된다"

고전 '미생지신'의 변주: 《장자》와 《사기》에 기록된 우직한 사내 '미생'의 이야기를 아쿠타가와만의 몽환적이고 감각적인 시선으로 재탄생시킨 작품입니다.

소세키와의 조우: 나쓰메 소세키의 《열흘 밤의 꿈 - 첫날밤》이 보여준 '초월적 기다림'의 미학과 맥을 같이하며, 사랑 혹은 믿음이라는 추상적 가치를 위해 물리적 생명을 초월하는 인간의 광기 어린 숭고함을 다룹니다.

현대인의 초상: 작품의 대미를 장식하는 고백은 압권입니다. 작가는 미생의 영혼이 현대인인 '나'에게 깃들었노라 말하며, 우리 역시 무언가 오지 않을 '불가사의한 것'을 기다리며 꿈결 같은 하루를 살아가는 고독한 존재임을 시사합니다.



일본근대문학 업로드 일정

화요일 (오전 8:00): [연재] 잊혀진 문호의 서재 : 일본 근대 장르 문학의 심연 발행

수요일 (오후 8:00): [일본 근대 환상 문학] 시리즈 발행

금요일 (오후 8:00): [연재] 잊혀진 문호의 서재 : 일본 근대 장르 문학의 심연 발행

일요일 (오전 8:00): [동심과 성장] 시리즈 발행

--- 시리즈 내용은 상황에 따라서 변경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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