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단녀 재취업 관찰일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면?
1초의 고민 없이 "친언니요"라고 대답한다.
경단녀 6년 차, 언니의 구직활동에 끊임없이 브레이크를 걸었다. 마음을 비워도 된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타지에서 새직장을 구하며 겪은 애로사항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선배로서 말리고 싶었다. 기약 없는 희망에 좌초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저 좋아하는 손뜨개 하며 옆에서 뒹구는 냥이들과 오붓한 한때를 보내는 게 어떻겠냐고, 노력하지 않아도, 열심히 살지 않아도 괜찮다고 일러주었다. 누구나 그렇듯 가족은 가족의 안녕을 기도하기 마련이니까.
그녀의 사전에 실패란 없었다.
"나는 여상(상업고등학교)를 갈 거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취업해서 번 돈으로 대학교 알아서 갈게"
중학교 졸업식날 언니의 폭탄발언에 아빠는 극대노했고 언니는 해냈다. 고등학교 졸업 후 2년간 대기업에 입사해 모은 돈으로 서울 상위권 4년제 대학에 입학, 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복수전공으로 교직이수까지 완료했다. 이토록 철저한 언니의 계획성은 가끔 나를 질리게 했는데, 부산으로 떠난 자매여행에서까지 엑셀로 만든 여행 일정을 단 하나도 흐트러짐 없이 이행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둘 째날 밤, 여행에 취해 홀로 회에 소주 마시고 다음 날 못 일어나서 오지게 욕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함)
꿈꾸던 교사가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임용고시를 앞두고 언니에게 실패가 찾아왔다. 전국 TO 0명이라는 소식에 쓰디쓴 고배를 마셨고 그날 밤 아빠는 술에 취해 언니가 좋아하는 굴비, 굴 등을 잔뜩 사와 울고 있는 언니를 말없이 안아주었다. 날이 밝자 2박 3일의 여행을 떠났고 돌아와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취업준비를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계열의 큰 회사로 입사한 언니는 매달 5만 원씩 (언니는 26살, 나는 23살이었다) 용돈을 주며 종종 외식에 영화 관람도 시켜주었다. 사춘기 시절 눈만 마주쳐도 으르렁대던 암사자 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언니의 자본주의에 나는 순한 양이 된 모양새이기도 했지만 사실 절망된 꿈을 뒤로하고 새로이 커리어를 꾸려가는 뒷모습을 응원하다가, 존경하게 되었다. 언니는 내게 인생의 선배이자 선생님이었고,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단단한 여자다.
내게 그런 언니가 7년 전 추석, 결혼할 남자가 생겼고 (1차 폭탄) 예비신랑의 재취업 지역인 베트남으로 떠난다고 통보했다.(2차 폭탄) 우리 가족은 할 말을 잃었지만 결혼식 직후 언니는 베트남으로 떠났다. 이제야 말하지만 가장 서운했던 건 식을 마치자마자 바로 비행기에 올랐던 거다. 정 없는 년.
대한민국에서 다른 지역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그러하듯) 그런데, 베트남? 베트나아암? 형부는 아빠에게 5년 내로 돈을 얼마큼 벌어 한국에 들어오겠다는 약속을 한 채 귀한 첫째 딸을 데리고 훌쩍 떠났고 3년 후 천안으로 새직장을 찾아 돌아왔다. 형부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녀의 자존감은 우유통에 빠진 생쥐처럼
끊임없이 발장구질 해서 꾸덕한 치즈를 만들고, 그 위에 두 발로 서야 안심하는 생쥐처럼 언니의 자존감은 쉼=죽음과도 같나 보다. 베트남에 가서도 교사자격증을 활용해 한글말 강사를 하고 손뜨개 부업을 하며 슬기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던 '재직'에 대한 욕구는 귀국 후 이어졌다.
작은 공단 계약직으로 입사, 설거지와 고구마 삶기를 시키는 것을 견디지 못해 퇴사했고 방과 후 교사 매니저로 취업해 1년 간 심기를 다진 듯하다. 올해 초 정규직 전환을 염두한 육아휴직 대체인력 포지션에 합격해 첫 월급을 받았고 그간 상담해주느라 고마웠다며 멋스러운 선물을 보내왔다.
적적해할 언니가 걱정되어 눈뜨고 잠들때 까지 나누던 카톡대화는 많이 뜸해졌다. 마감과 야근에 눈코뜰새 없어 바쁘시단다. 그래도 행복하지? 라고 물으면 그렇단다. 바빠서 오타도 내지만 그녀는 현재 안녕하다.
언니를 떠올리면 '우수하다'는 단어가 떠오른다. 자수성가 혹은 앨리트라는 말이 남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성실하고 바르고 곧게 자란 언니는 서른 여덟, 경단녀에서 한 회사의 예산계획을 수립하는 재무팀 중고 신입, 장대리가 되었다. 아, 떠올랐다! 사춘기 시절 내가 언니를 부르던 이름 "독한년"
신랑 피셜, 처형과 내가 종종 웃음소리까지 비슷하다는 말이 떠올라 머쓱함에 웃음이 난다. 언니의 고집스러운 구직활동을 말리던 중에도 나는 특히 6시 정시퇴근을 자랑하는 공공기관에 재직해 잘 먹고 잘 살고 있었으니까. 그런 내가 언니는 얼마나 귀여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