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견이 주는 빛과 그림자에 대하여
나는 운명을 믿지 않는다. 나무(반려견)와 가족이 된 날도 그 이후로도 쭉 그렇다.
반면에 신랑은 요즘도 밥 먹듯 나무를 만난 건 아무리 생각해도 운명이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옛날이야기
첫 번째 시고르자브종 예삐는 감기에 걸려 2주 만에 무지개다리를 건넜고 두 번째 푸들 몽실이는 엄마의 알레르기가 심해져(새벽에 숨이 막혀 큰일 날 뻔 한 뒤로) 작은 고모를 통해 재 입양되었다. 세 번째 시츄 몽실이는 우리 집에서 새끼 두 마리를 낳고 둘째 미르와 함께 다른 집에 맡겨졌으며(이유는 모른다, 엄마의 뜻에 따랐을 뿐) 내 인생 마지막 강아지라고 여겼던 몽실이 첫째 딸 마루도 어느 날 귀가하고 나니 동네 할아버지 집에 보내져 있었다. 그런 결정을 내린 부모님에게도 분명 이유와 뜻이 있었으리라. 하지만 타의에 의한 만남과 헤어지는 과정을 거치며 "다시는"이라는 다짐으로 상처를, 상처를 준 아이들의 눈을 외면하고 싶었다.
그런 내게 죄책감을 덜 기회가 생겼었는데 신랑 친구가 <(생략 가능) 본인 어머니가 키우던 말티즈 노견이 무지개다리에 가까워졌다는 말을 듣고 어머니의 펫로스 증후군을 대비해 비숑 '마루'를 입양했으나, 말티즈 친구가 보다 건강해져 1년 간 오갈 곳이 없어진> '마루'를 잠시 맡기면서 였다. 짖음이 심해 민원이 들어오는 바람에 10일도 채 함께 지내지 못하고 본가로 돌아갔지만, 그 이후에도 종종 맡아주며 나름의 죄책감을 덜어보려는 요행을 부렸다. 작은 생명체가 주는 행복과 충만함이 다시 그리워졌지만 여전히 반려견은 답정No였다.
응 아니야.
결혼기념일에 맞춰 봄비가 내리는 여수로 여행을 떠났다. 적당한 습함과 따듯한 바람에 괜스레 긴팔 맨투맨을 입은 것조차 기분이 좋았다. 저녁밥거리를 사러 도착한 대형마트 입구에 동물병원이 있었고 통유리벽 너머 칸칸이 자리를 차지한 채 입양을 기다리는 강아지들이 있었는데 그 길을 지나던 신랑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몇 번을 불러도 듣지 못하고 뺏긴 시선 끝에 나무가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났지만, 꽤나 진지한 표정에 "들어가서 보여달라고 해" 하며 등을 떠밀었는데 이제와 고백하자면 겁주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안 데려갈 거니까. 너 못 키울 거잖아.
우리 숙소 강아지 입장 불가야, 우리 맞벌이 부부잖아, 얘 데리고 가면 우리 여행은? 당장 어쩌게.
달래고 설득해 신랑의 발걸음을 돌려 숙소로 향했고 그날 밤이 깊도록 반려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 다 마루가 보고 싶었고 보고 싶어 할 대상이 있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하필 귀가 전 들른 카페의 휴무 팻말이 걸려있는 걸 보고 신랑이 '내가 가고 싶은 데 가도 돼?'라고 하길래 또 어떤 앙큼한 이벤트를 해줄까 싶어 기대한 채 도착한 곳은 그 마트 유리 벽 앞이었다. 잔인한 남자 같으니라고..
운명이라기보다 불가항력에 의해 세상. 나무는 내게 그랬다.
일주일 후에 다시 왔을 때 이 아이가 아직 이곳에 있다면 그때 데려가자고 했지만 (이 말을 할 때도 데려갈 생각 1도 없었던 나) 신랑은 완고했다 "NOW or NEVER"
병원 앞을 서성이고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조언을 구하고, (왜인지 모름) 펑펑 울다가 보니 두 시간이 흘렀고 정신을 차리니 하얗고 작은 강아지가 상자에 담겨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둘이 떠난 여행이 끝나자 우리는 셋이 되었다.
식목일에 만났으니, 나무 어때?
- 좋아.
<오해에 대하여>
- 엄마의 알레르기가 심했음에도 강아지를 계속 키웠던 것도, 다른 곳에 보내게 된 것 모든 결정이 쉽지 않았음을 알고 내가 헤아리지 못했던 이유와 뜻이 있다고 믿는다. 그런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 유기견 입양을 고려했으나 입양자 조건에 부합하지 않았고 올바른 처사였다.
- 동물병원 혹은 입양 샵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알고, 나 역시 그러하다. 그럼에도 입양을 결정한 것은 '한 마리라도 꺼내 줄 수 있다면'이란 자위도 인정하지만 잘못된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부정적 인식의 초점은 강아지 공장에 맞춰져야 하며 이 논쟁은 닭과 계란의 우선순위에 대한 것과 비슷하다.
- 시간을 정해 강아지들을 산책, 교육하고 있었고 (마트 옆 야외공원이 있었다) 입양 시기를 놓쳐 노견이 된 몇몇 아이들을 직접 입양해 가족이 된 모습을 보고 조금은 안심했다.
- 야근 없는 직장, 짧은 출퇴근 시간(약 10분), 야외활동 좋아하는 부부의 성향 등에 용기를 얻어 맞벌이임에도 입양을 했고 자칫하면 재택근무 가능 업종으로의 이직을 염두하여 결심했다. 지금도 현 직장에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