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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귤선생님 Oct 21. 2024

성적에 대한 환상 내려놓기

그대의 아이라고 해서 그대의 아이는 아니오.

그들은 스스로 갈망하는 삶의 딸이며 아들이니

그대를 거쳐 왔을 뿐 그대로부터 온 것은 아니오.

-칼릴 지브란-


  


  일주일에 한 번, 야간 자율학습 감독을 하는 날에는 온몸이 쑤시고 피곤하다. 특히 수업이 가장 많은 날이거나, 학생 한 명이 문제를 일으켜서 속을 뒤집어 놓은 날에는 더 심하다. 교사인 나도 이렇게 피곤한데 아침부터 줄곧 의자에 앉아 공부해야 하는 아이들은 얼마나 더 힘들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서관 책상에 자신의 목표 점수나 원하는 학과명을 붙여 놓고 커피를 마셔가며 공부하는 아이들은 어른인 내가 봐도 정말 대견하다.     


  반대로 자율학습 시작종이 울리자마자 끝날 때까지 엎드려 자거나, 책을 펴 놓긴 했지만 멍한 상태로 시간만 축내고 앉아 있는 아이들은 보기에도 참 안쓰럽다. 세 시간이라는 짧지 않은 자율학습 시간을 항상 허비하고 있던 석진이에게 “그럴 거면 차라리 자율학습을 취소하고 네가 좋아하는 운동을 하는 게 어때? 네가 밤 10시까지 도서관에서 자버리니까 집에 가면 정작 잘 시간에 잠을 안 자고, 그래서 자꾸 수업시간에 졸게 되잖아.”

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저도 그렇게 하고 싶은데요. 엄마가 절대 안 된다고 해요. 공부에 소질이 없으니까 그 시간에 헬스 트레이너 자격증 준비를 하고 싶다고 해도 반대해요. 공부해서 무조건 4년제 대학교에는 가야 한다고만 말해서 진짜 짜증 나요.” 

  나는 석진이가 평소에 자기주장이 강한 모습을 종종 보여왔기 때문에 집에서도 역시 부모님께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이는 공부 대신 운동을 하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의외로 쉽게 포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무리 매사에 자기 고집이 강한 아이라 해도 부모가 자신의 뜻을 지지해주지 않으면 용기를 내기란 어려운 일인 것 같다. 고등학교 아이들은 몸만 컸을 뿐이지 아직도 어른들의 인정이 필요한 십 대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가 공부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려워한다. 뿐만 아니라 공부라는 것은 소질이라기보다 진정으로 노력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부모들은 아이가 고1 때는 공부에 대한 관심과 욕심이 최고조에 이르렀다가 고2가 끝날 무렵 아이의 변하지 않는 성적을 보고 어쩔 줄 몰라한다. 그리고 고3이 되었을 때야 비로소 한숨을 쉬며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한다. 아이를 키우는 나 역시 이런 부모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기에 ‘내 아이한테 공부는 맞지 않구나’라는 걸 인정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내가 고3 담임이었을 때 졸업식에 참석한 한 학생의 엄마가 이런 말을 했었다. 

 “한 달에 진영이 국영수 학원비로 백만 원 넘게 써 왔어요. 학비, 책값, 식비, 용돈 등 고등학교 3년 동안 아이에게 쓴 돈을 계산해 봤더니 대학교 졸업한 첫째보다 더 많이 쓴 거 같아요. 그런데 정작 아이는 4년제 대학교에 다 떨어지고 생각지도 못한 학과에 들어가게 돼서 속이 말이 아니에요, 선생님.”     


  사실, 진영이는 평일에 학원 가는 날을 제외하고 학교에서 자율학습을 할 때면 늘 종이에 그림을 그리곤 했었다. 스승의 날에 나에게 멋진 그림을 그려서 선물로 주면서 “나중에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가 될 거예요”라고 수줍게 이야기하던 학생이었다. 하지만 정작 부모는 아이의 꿈을 반대했다. 꾸준히 벽화 그리기 봉사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지만 결국 부모의 뜻에 따라 전혀 관심도 없었던 경영학과에 수시 원서를 냈고 결국 지원한 대학교에 다 떨어졌다. 그리고 얼마 전, 학교를 그만둘까를 고민 중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엄마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되는 것보다 공부를 잘해서 성공하는 게 더 낫다고 항상 얘기해요. 그림을 잘 그려봤자 유명한 화가가 되거나 미술 선생님이 되는 게 아니라면 돈 벌기도 쉽지 않을 거라고 하고요.”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 진영이도 부모의 뜻을 쉽게 거스르지 못했다. 만약 진영이가 공부보다는 미술 선생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정도로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지지해 줬더라면 아이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학과에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면서 ‘재수를 할까 말까’를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도 속이 쓰리긴 마찬가지다. 밤늦은 시간까지 학교 주차장에서 아이를 기다리며 운전기사 노릇을 해 왔고, 자녀 하나 제대로 교육시켜 보겠다고 매달 엄청난 돈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어떻게 해도 공부에 소질이 없어서 좋은 성적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어떻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아이가 원하지도 않는 학과에 가거나 혹은 재수를 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것도 보기 힘들지만, 자신의 자녀보다 훨씬 공부를 못했던 주변의 아이들이 더 좋은 대학교에 다니는 모습을 보는 것도 힘든 건 마찬가지다.      


  SBS ‘영재 발굴단’에서 아이에게 공부만 강요하는 한 엄마에게 프로그램 자문위원인 노규식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정하는 거예요. 내 아이가 공부를 못해서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지요.”   

  

  아이마다 생김새가 다르고 성격도 다르듯이 재능도 다르다. 책상 앞에 앉아 집중력을 발휘하며 공부하는 걸 잘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밖에 나가서 운동하는 걸 더 잘하는 아이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부모는 자신의 자녀가 공부에 재능을 발휘하여 성공하기를 바란다. 아이가 부모의 뜻과 맞지 않는 진로를 가겠다고 말하면 아직 세상 물정 몰라서 그런다고 말하며 어떻게든 자신이 생각했던 길을 걷도록 강요한다. 부모는 아이이게 강요가 아니라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아이는 행복해하지 않는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건강하게 크렴. 엄마는 네가 행복하게 컸으면 좋겠어’라고 생각하지만, 커서 고등학생이 되어 입시를 앞두고 있으면 소위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결국 아이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거나 잘하는 것을 부모로부터 인정받고 그 길을 선택한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간과한다.     


  마하트마 간디는 “내가 하고 있는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이 조화를 이룰 때 행복이 찾아온다”라고 했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진짜 원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행복하다는 것인데 정작 어른들은 자신들의 잣대로만 세상을 바라보면서 아이들의 마음속 말들은 들으려고 하지 않고 부모들이 원하는 것을 하도록 이끄는 셈이다.     

  반 정도 채워져 있는 물컵을 보고 물이 반절밖에 없다고 말할 수도 있고,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여길 수도 있듯이 행복 역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내 아이가 공부가 아니라 다른 것에 푹 빠져 있고 여기에 소질이나 재능을 보인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지지해줘야 한다. 비록 그것이 부와 명예를 보장하지 못하는 길이라 해도 진정으로 아이가 좋아하고 행복해하는 쪽을 선택하고자 한다면 부모로서 아이의 결정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이에게 가장 큰 존재인 부모로부터 인정받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기쁨이기 때문이다.


  내 아이가 성장해 가면서 부모의 바람이 공부와 성적으로 방향을 틀었을 뿐, 예전에 부모로서 가졌던 내 아이의 건강과 행복에 대한 바람은 항상 밑바탕에 깔려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공부와는 관련 없는 길을 선택해서 행복해하는 자녀를 가진 부모를 만나면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너무 부럽다고 말하고 싶다. 아주 오래전에 자녀에게 바랬던, 하지만 그동안 잊고 있었던 부모의 간절한 소원인 ‘내 아이의 행복’이 드디어 현실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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