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 매거진 『어떤』2호 '여는 글'
‘등장’에 이어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노트를 펼쳐 이름을 적어 본다. 몇 글자만 적었을 뿐인데 되살아나는 기억 혹은 추억. 내 이야기이거나, 누군가의 이야기. 독자들에게도 이름에 얽힌 기억과 추억을 물었다. 어떤 대상에게 이름을 주고 소중하게 온 마음을 다하는 이야기. 아직 움트지 않은 씨앗에 섣불리 이름을 짓지 못하는 이야기. 관계에서 작용하는 이름의 기능적 측면이나 일상의 익숙함 속 이름의 불필요함에 대한 이야기. 보내온 이름에 대한 이야기들에서는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잠시 책을 내려놓고 핸드폰 메모장이나 손에 잡히는 빈 종이에 지금 떠오르는 이름을 적어 보길 권해 본다. 이번 호는 그 이름을 생각하며 읽어 보는 것도 좋겠다.
『PATA』라는 책에서 문가영 배우는 자신에게 파타라는 이름을 붙인 후, ‘쓰고 싶다는 욕망이 들 때마다 노트 안에서’ 3인칭 시점으로 파타라는 존재를 기록한다. 주제를 이름으로 정하고 이 책이 생각났다. 그가 연기한 «여신강림»의 임주경이나 «사랑의 이해»의 안수영과는 또 다르게, 그의 방식으로 파타라는 이름을 기억한다. 수없이 다양한 이름의 삶을 해내는 배우에게 이름의 의미는 무엇이고, ‘진짜’인 나를 대신할 다른 이름으로 나를 기록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스스로에게 어떤 다른 이름을 붙여 줄 수 있을까. 조용히 이름을 불러 본다. 진실함에 대해 생각한다. 얼마나 진심을 다하고 있는지, 진실한지. 어떤 내가 진실한 것인지 생각해 본다. 문가영 배우가 파타라는 또 다른 이름과 만난 것처럼 우리 모두 각자의 파타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진실함에 다가갈 수 있는 ‘친구’(pata는 스페인어로 친구를 뜻하기도 한다고)와 마주 앉아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나는 내 삶에 온 마음을 다하고 있는가. 내가 나를 부를 때 얼마나 다정한 목소리로 불러 주고 있는가. 나는 나에게 다정한가. 내가 나를 부르는 일보다 병원에서 대기 순번이 되어 나를 호명하는 일이 더 잦아질 때쯤 내 이름 앞에는 어떤 수식어가 붙어 있을까.
문가영 배우는 책의 인트로에서 ‘글을 쓸 때조차 배역이 필요한, 용기 없는 나의 이름을 파타라고 하자’고 했지만, 이름을 걸고 사람들 앞에 서는 일에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안다. 지금 나는 매거진 앞에 들어갈 짧은 글을 쓰면서도 꽤 긴장이 되는데 이름을 걸고 책 한 권 내는 일에는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걸까. 책 한 권에 담긴 수많은 이름을 생각한다. 저자와 역자, 편집자와 디자이너, 제작자와 마케터까지. 책은 이들의 이름을 건 합작품이다. 이름을 걸고 책을 내겠다는 다짐에 용기가 필요한 것은 작가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런 면에서 이름은 새해의 시작과 꽤 어울리는 단어다. 다짐과 약속의 단어이면서, 고이 접어 보관하고 싶기도 활짝 펼치고 싶기도 하고, 때론 비장하기도 숭고하기도 하니까.
시는 ‘하나의 이름을 쫓아 들어간 집에서 백 개의 이름을 만나는 것’이라는 이훤 시인의 말과 ‘한 단어에 대해 말하는 일은 한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이라고 한 안희연 시인의 말은 어딘가 통하는 부분이 있다. 어떤 것의 이름 혹은 단어가 이야기와 세계를 품고 있다면, 이름은 누군가의 혹은 어딘가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되기도 한다. 이름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어떤 이름은 모두의 마음에 박제되어 남는다. 문을 열고 들어간 누군가의 세계가 특히 중요해 그 이야기를 잊지 않고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 이름을 함께 기억하는 일이 필요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 이훤 시인의 말은 «문학동네시인선 200호 기념 티저 시집.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문학동네) 중에서, 안희연 시인의 말은 «단어의 집»(한겨레출판) 중에서 발췌)
이름이라는 주제로 이번 2호를 준비하는 동안 혁오 밴드와 선셋 롤러코스터의 프로젝트 앨범 ‹AAA›의 ‘Young man’을 자주 들었다. “Everyday is yesterday. We don’t look back. Meaning’s always
meaningless.” 같은 공간과 반복되는 시간 사이에서 이름을 잊고 살아가기도 한다. 다수 안의 누군가로 숨거나, 갇히거나. 그럼에도 그 안에서 가능성을 찾고 나를 찾는 일은 결국 이름을 찾아가는 일. 매일이 어제 같을지라도 시간에 이름을 붙이는 것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 대상에 온 마음을 다하겠다는 마음가짐이기도 하다. 그 이름에 온 마음을 다하면 어느 순간 잊고 있던 나를 발견할지도. 2025년, 내가 만들어 갈 1년의 이름은 ‘다정함’이다. 온 마음을 다해 정성껏 다정해 볼 생각이다. 나에게, 너에게.
노트에 적은 이름을 다시 바라본다.
| 유한태 (교보문고 이커머스영업팀장)
<어떤>은 교보문고와 독자가 함께 만들어나갑니다. 다음 호 주제에 맞춰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독자 에디터로 선정되신 분은 다음 호에 글과 사진을 실어드립니다.
원고는 300자~1,000자 사이의 접수자 본인이 쓴 글 및 사진을 함께 보내주시면 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어떤>2호 받으러가기' 링크를 눌러 확인해주세요.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