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과 물리학에 대한 소고

교보문고 매거진 『어떤』4호 '여는 글'

by 유테테

“비밀을 속삭이진 않으나 그것이 마치 큰 비밀이라도 되는 양 속삭여야 돼요.”

- 『소란한 속삭임』, 예소연, 위즈덤하우스


가끔 마음을 들여다보면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걸 느낀다. 말로 꺼내지 못한 문장들, 미뤄둔 선택, 아직 다루지 않은 감정의 조각들.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비밀이라 부른다.


비밀은 사라지는 법이 없다. 지우려 해도 표정이나 말투, 작은 행동 사이에 얇은 자국으로 남는다. 누구나 마음속에 미처 지우지 못한 비밀을 보관하는 서랍 하나를 품고 있다. 꽁꽁 잠긴 이 서랍에는 얇은 엽서 하나 겨우 들어갈 만한 좁은 틈이 있고, 그 안으로 들어간 것들은 다시 나오지 않는다. 아니, 꺼내지 않는다고 해야 더 맞겠다. 나만 알고 있어야 할 것들, 그래서 조용히 보관하는 것들. 그런 비밀이 쌓여 나만의 결을 만든다. 물리학에서는 에너지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사람 사이에도 그렇게 보존되는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예를 들자면, 말하지 못한 마음이나, 완결되지 않은 결심, 외면한 감정 같은 것들. 어쩌면 비밀은 그렇게 보존된 에너지가 가장 안정된 형태로 숨어 있는 상태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람을 조금 무겁게 만들기도 하고, 그 무게로 균형을 잡아주기도 한다.


책의 바다 위에 띄워진 작은 보트 『어떤』은 '등장', '이름', '모험'을 지나 '비밀'의 작은 섬에 도착했다. 사람이 등장하고 이름을 얻고 모험을 떠나기까지의 과정에는 늘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영웅은 비밀을 가지고 모험을 시작하고, 모험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비밀이 생기기도 한다. 이번 호는 그 지점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담았다.


비밀의 세계는 들여다보면 참 오묘하다. 말하면 상처가 될지, 위로가 될지, 혹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지. 드러나기 전까지는 여러 가능성을 품은 채 흔들린다. 중첩되어 있다가, 결국 관측되는 순간 하나의 상태로 정해지는 모습이 양자 상태와 비슷하다. '비밀은 아니지만 비밀 같은' 일기를 릴레이로 적으면서 누군가 읽어주길 바랐던 마음. 이름도 모르는 이들을 '모자'와 '비밀'이라는 단어로 잇는 '비밀 일기' 프로젝트도 그런 미스터리를 보여준다. 겉으로 보면 별일 없어 보이는데, 막상 들여다보면 묘한 온기가 남는다. 누군가에게 건네는 작은 일기 한 장이 관계의 온도를 바꾼다.


'금지'는 필연적으로 '비밀'을 만든다. 금지는 깨지기 위해 존재하니까. 「금지된 책을 둘러싼 비밀 대화」에서는 여섯 명의 에디터가 시대의 금서 세 권을 둘러싼 이야기를 나눈다. 스페인의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체코의 『농담』, 이란의 『눈먼 부엉이』—시대와 제도에 의해 읽히지 못했던 책들이다. 그 대화 속에서 과거의 금서와 현재의 우리가 만난다. 에디터 '들숨'은 말한다. "어두운 문학이 삶의 따뜻한 등불이 될 수 있다"고. 책 안에는 오랜 시간 응축된 에너지가 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에너지가 굳게 닫혀 있던 비밀의 서랍에 균열을 내는 순간이다.


비밀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조용히 압력을 받다가 어느 순간 형태를 드러내기도 한다. 진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처럼 아무도 보지 않는 시간이 쌓여 단단해지고 빛을 얻는다. 사람의 마음과 책도 비슷한 면이 있다. 스즈키 이즈미의 『여자와 여자의 세상』, 나야 마리 아이트의 『어두움의 연습』처럼 출판사의 보석함 안에서 조용히 빛을 키워온 책들이 이번 호에 등장한다. 책이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이 있다는 사실도 다시 느끼게 된다.


책장을 여는 이야기도 있다. 절판본을 오랫동안 모아온 서평가나, 30년 넘게 초등학교 문집을 간직해온 디자이너의 책장에는 각자의 시간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이런 책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비밀의 책'이라는 이름이 자연스럽게 붙는다. 누구에게나 한 권쯤은 남몰래 아끼는 책이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편안하게 느껴진다.


25년 동안 묵혀둔 비밀의 유통기한에 관한 이야기, 고등학교 3학년 어느 여름밤 공원에서 시작된 비밀 같던 사랑 이야기, 라면수프 봉지를 모으던 숨기고 싶은 취향 같은 것들. 평범한 나날 속에서 만들어지는 사소한 비밀들은 따뜻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 비밀은 어느 순간 임계점에 다다르면 스스로 스며 나오기도 한다.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것이 희망이었던 것처럼, 이번 호를 채운 비밀들에도 희망의 결이 스며 있다. 말하지 못했던 것을 말하려는 움직임도, 조용히 품어두는 선택도 모두 각자의 삶을 이루는 방식이다.


이번 호는 그런 비밀들을 조금 더 천천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말하지 않은 마음의 에너지, 관계를 흔들었던 작은 순간들, 각자가 감당해 온 조용한 무게 같은 것들. 어떤 비밀은 글이 되었고, 어떤 비밀은 여전히 페이지 사이에 얇게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크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드러내 보이지 않아도, 작은 속삭임 하나가 누군가의 하루를 지탱해 줄 수 있다는 것. 『소란한 속삭임』에서 네 명의 주인공들이 서로를 향해 보내는 작고 미세한 속삭임처럼, 비밀은 ‘다정한 에너지’다. 우리도 '소란한 속삭임'에 동참해서 아무것도 아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마치 '비밀처럼' 속삭여 보자.


“2026년에는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요.”


당신의 비밀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을까. 아직 서랍 속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다면, 이번 호를 넘기는 동안 아주 조금 그 에너지의 온도가 달라지기를.



| 유한태 (교보문고 e커머스영업팀장)



-

*<어떤>은 교보문고 MD(에디터)와 독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큐레이션 종이잡지입니다.


<어떤> 4호. 비밀 자세히 펼쳐보기

image.png


keyword
작가의 이전글기억에 남는 모험의 순간이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