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MBTI과몰입러다. 내 유형은 ENFP인데 그 설명을 찾아보면 퍽 정확하게 느껴진다. ENFP들은 대략 이렇다고들 한다. ‘외향적, 솔직하고 개방적인 성격이다’, ‘즉흥적이고 싫증을 잘 낸다’ 등등. 그중 특히 인상 깊었던 설명이 있었다. ‘E 성향 중에 제일 내향적, 혼자만의 시간 필수’ “와, 완전 내 얘기야.” 했었다.
혼자 살며 혼자 눈뜨고 혼자 잠들면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은 혼자 아침 산책을 즐기는 시간이다. 약속이 없는 날은 24시간 내내 혼자 있으면서도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 혼자 아침 산책을 즐기는 시간이라니. 이런 걸 보면 정말 ENFP인가 봐, 하고 생각한다.
혼자 산지 올해 5년 차고 아침 산책을 시작한 지는 3년 차가 됐다.
독립하고 2년쯤 지났을 때 편하게만 지내려던 욕심과 회사에서 일이 고됨이 더해져 일상이 많이 무너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루틴이랄 것이 없이 몸이 편한 대로 그저 눕고 쉬었다. 그렇게 쉬면 쉴수록 몸도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았는데 오히려 마음과 일상이 힘없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유가 뭘까 고민을 하다가 ‘하루 종일 회사 일에 모든 기력을 다 쏟고, 무너지고 있는 일상과 마음에 보수공사를 해줄 만한 시간을 갖고 있지 않아서’라는 결론을 내렸고 그때쯤 인터넷에서 어느 유튜버의 어떤 말을 보게 됐다.
아침 산책을 하라고. 아침 산책의 여러 좋은 점이 있다고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그중 마음에 꽂혔던 말이 바로 ‘아침 산책을 하면 하루의 주인이 된다’는 거였다.
회사일, 집안일, 그 외 주어진 하루 분량의 일과를 다 해내지 못하고 허덕이는 기분이었는데 그 말을 보고 스스로를 하루를 잘 보내는 주체로 느낄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어려서부터도 아침잠이 많은 사람으로, 지금도 여전히 잠으로 체력을 보충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규정하고 있지만 아침 산책을 하기로 마음먹은 후 주말에 늘어져라 자는 것부터 포기했다. 주말에는 맞춰둔 알람 없이 자고 일찍 눈이 떠지면 억지로라도 다시 감고 이부자리에서 일어나질 않았는데, 아침 산책을 다짐한 후부터는 눈이 떠지면 이부자리 정리, 물 마시기, 스트레칭, 옷 갈아입기 등 단순한 루틴만 지키고 집 근처에 있는 보라매공원으로 향했다.
주말 아침에 찾은 보라매공원의 하늘은 맑고 깨끗했고, 공원을 찾은 사람들은 모두 평화로워 보였다. 주 5일 동안 만원 지하철로 출퇴근하며 강남역 한복판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내게 더없이 마음이 놓이는. 여유로운 풍경이었다. 그 풍경 속에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며 주말 늦잠을 포기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 아침마다 산책을 나가는 게 자연스러워졌을 때쯤 평일 출근 전 아침 산책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처음으로 평일 출근 전 아침 산책을 시도한 날의 기억이 아직 또렷하다.
초중고 학창 시절 도합 12년 동안에도 간신히 지각을 면하던 내가 출근을 하기 전에 산책을 시도할 수 있다고?
스스로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맘이었지만 알람을 맞춰놓고 일어나서 집 앞을 한 10분 정도 걸었다. 10분 간 집 앞 구경이라고 해도 무방한 산책을 마친 후 별 탈 없이 제시간에 출근을 하면서 ‘이 정도라면 계속할 수 있겠는데?’ 싶었다. 그 후로 점점 산책하는 시간도 늘리고 동네 탐방도 하면서 집에서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의 산책하기 좋은 공원도 발견했다. 처음부터 매일매일 도전할 엄두는 나지 않았고 화요일, 목요일 아침 산책을 해봤다가 월, 수, 금요일에 해보는 등 여러 변주의 작은 시도들을 하다가 아침에 일어나는 습관이 잡힌 이후로는 7일 중에 6일, 5시~6시 사이에 일어나 아침 산책을 다녀오는 일이 몇 달씩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아침 산책이 습관이 되기까지 피곤이 오히려 더해지는 것 같은 시간을 보냈다. 막 산책을 시작했을 즈음엔 회사에서 하품과 커피를 달고 살았다. 친한 동료들이 왜 이렇게 피곤해하냐고 묻고, “제가 요새 아침 산책을 하고 있어서요.”라고 하면 친한 동료들은 차라리 잠을 더 자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하품을 참 많이 하긴 했다.
돌이켜보니 그때는 육체적으로 이렇게 피곤해하면서 왜 이걸 습관화하려고 하는지, 차라리 더 자는 게 나은지 스스로도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몇 달이 지나 알람도 전에 눈이 떠지고 산책을 마쳐야 잠이 깨는 듯한 습관으로 잡히고 나서야 아침 산책을 하며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얻는지 깨달았다.
3년간 한겨울을 뺀 나머지 계절의 아침, 트랙 300m의 작은 공원을 걸으면서 미세하게 변해가는 계절의 변화를 매일 조금씩 알아차릴 수 있게 됐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갈수록 점점 더 밝아지는 하늘, 매화와 벚꽃, 세찬 비, 푸르름을 더하는 나무들, 찬 바람, 빨갛고 노란 낙엽들, 다시 드높아지는 하늘, 매일 빠짐없이 걷고 있는 이곳이 내게 1년 사계의 흐름을 알려줬다. 사계를 하루하루 만끽하며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무엇 하나 놓치지 않고 제대로 살고 있구나 하는 생동감이 일었다.
그리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걷거나 이른 아침부터 지저귀기 시작한 새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걷다 보면 산책이 끝난 후에는 머릿속을 떠다니던 잡념들, 고민들이 조용히 사라지는 것을 깨닫곤 했다.
또 아침 산책의 강력한 장점은 체력이 놀랄 정도로 향상되었다는 것이다. 회사에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지쳐 집에 오면 널브러져 있고 싶었는데 아침 산책이 습관이 되고 몇 달 후부터는 새벽 기상은 당연하거니와 빡빡한 외근 일정이 있었어도 퇴근 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잠드는 것이 가능했다.
가끔 혼자 살지 않았더라면, 아직 부모님과 함께 ‘딸’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었더라면, 아니면 ‘아내’나 ‘엄마’가 되어 살았더라면 아침 산책의 습관을 가질 수 있었을까 생각해봤다. 아침 산책이 잘 맞는 사람이라 언제가 되었든 시도하긴 했었겠지만 이렇게 습관으로 자리 잡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 시간의 온전한 주인으로 살고 있어서 이 습관을 들이는 게 그나마 수월하지 않았을까 싶어서.
혼자 사는 사람들에겐, 내가 예로 든 아침 산책이 아니더라도 본인이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한 것 같다. 하루 일과 중 내가 좋아하는 시간이 포함되어 있어야 나머지 시간들도 스르르 흘러내리지 않고 짱짱하게 유지된다고, 혼자 사는 사람일수록 시간의 쓰임이란 그래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