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논리에 갇인 무서운 경고
모니터 중앙에 뜬 붉은색 팝업창. 그것은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500년 묵은 경고음의 재림이었다. 희성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다온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잠깐만요, 여보."
다온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조선어에 능통한 그녀는 텍스트의 표면 너머, 그 행간에 숨은 권력을 읽어냈다.
"1591년의 저 문장... 저건 '동인', 즉 당시 '집권 세력'의 논리예요. 그런데 2025년의 이 문장... 이건 지금 '진보 정부', 즉 현재 '집권 세력'의 브리핑이잖아요."
희성의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그렇다. 이것은 야당의 비판이나 재야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500년 전 나라를 위기로 몰아넣었던 '경고 묵살'의 주체와, 지금 '위협 축소'를 말하는 주체가, '집권 세력'이라는 점에서 정확히 일치했다.
"그때 조선도... 이랬을까?"
희성이 텅 빈 눈으로 모니터를 보며 중얼거렸다.
"경고를 하는 자는 '분란'을 일으키는 자가 되고... 위협을 축소하는 자는 '신중'한 자가 되는... 이 지독한 알고리즘 속에서, 류성룡 대감도... 혼자였을까?"
"이걸 알려야 해요." 다온이 결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내 칼럼에 쓰면 '정부 비판' 프레임에 갇혀요. '흥미로운 역사학자의 음모론' 정도로 소비되고 말 거예요."
희성의 시선이 스마트폰으로 향했다. '김민수'와 '류시인'.
"김민수 의원?" 다온이 물었다. "그는 보수 야당이고, '무기'를 원했잖아요. 이 데이터는 현 정부를 공격할 완벽한 무기예요."
"아니." 희성이 즉각 고개를 저었다. "그게 바로 '함정'이야."
그는 '특징 4: 진영 논리'를 가리켰다.
"이 데이터를 김민수 의원에게 주는 순간, 이건 '국가적 경고'가 아니라 '보수 야당의 정치 공세'가 돼. 그럼 진보 정부와 지지층은? '정치적 의도를 가진 비난'이라며 더 강력하게 이 경고 자체를 묵살할 거야. 500년 전 동인 강경파가 '서인의 당파 싸움'이라며 황윤길의 보고를 묵살했듯이. 우린 알고리즘에 정확히 먹이를 주는 꼴이 돼."
"그럼..." 다온이 망설였다. "류시인 작가는요? 당신 종친이잖아요."
희성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류시인. 같은 풍산 류씨, 서애 류성룡의 후손. 하지만 그는 현 정부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핵심 진보 논객이었다.
"그래. 그 사람을 만나야겠어."
희성이 결심했다.
"김민수 의원은 '적'이야. 적을 설득하는 것보다 어려운 게 뭔지 알아? '아군'을 설득하는 거야. 특히 그 아군이... 시스템의 일부일 땐."
"여보."
"류시인 형님은... 적어도 '조상'의 경고는 무시하지 못할 거야. 그는 이념가이기 이전에, 우리 '종친'이니까."
류시인 작가의 서재는 북촌의 연구실과는 다른 종류의 지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희성은 태블릿 PC를 꺼내 <프로젝트 징비>의 결과를 보여 주었다. 나란히 뜬 1591년의 텍스트와 2025년의 정부 브리핑. 그리고 94.7%의 일치율.
류시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안경을 고쳐 쓰며 미간을 찌푸렸다.
"희성아." 그가 입을 열었다. "이거... 대단한 발견이다. 정말로. 역사학자로서의 네 집념에 경의를 표한다."
"형님. 이건 그냥 '발견'이 아닙니다. '경고'입니다."
류시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희성이 기대했던 '충격'이나 '공감'이 아니었다.
"희성아. 넌 학자고, 난 논객이다. 넌 '패턴'을 보지만, 난 '맥락'을 본다."
"맥락이라뇨?"
"1591년의 동인은 '무능'과 '당파심'으로 경고를 묵살했지. 맞아. 하지만 2025년의 우리 정부는 달라. 이건 '묵살'이 아니라 '신중한 외교적 관리'다."
"94.7% 똑같은 단어와 논리를 쓰는데요?"
희성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단어가 같다고 본질이 같은 건 아니야!"
류시인의 목소리도 커졌다.
"지금 이 시점에 누가 위기를 부추기고 있지? 저들 보수 야당(김민수 측)이야! 그들은 어떻게든 현 정부를 흔들려고 안보 위기를 조장하고 있어.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신중론'을 펴는 건... 500년 전의 '묵살'이 아니라, '책임 있는 자세'라고!"
희성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위협 축소'라는 패턴이 '신중론'과 '책임'이라는 단어로 완벽하게 포장되고 있었다. 류시인은 알고리즘 자체를 보지 못하고, 알고리즘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형님." 희성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만약... 만약에라도, 형님이 틀리고 내 AI가 맞았다면요? 이 '신중론'이 500년 전과 똑같은 '묵살'의 시작이라면요?"
류시인은 차가운 눈으로 희성을 바라봤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희성을 '종친 동생'으로 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 데이터는 위험하다."
"네?"
"류희성씨." 류시인의 호칭이 바뀌었다. "자네의 이 순수한 연구 결과가, 지금 이 시점에 공개되면 어떻게 될 것 같나? 저들 보수 야당과 김민수 의원에게 완벽한 '공격의 빌미'를 주게 될 거야. 자네는... 자네의 의도와 상관없이 '현 정부를 흔드는 적들의 무기'를 만들어준 셈이 된다고."
연구실로 돌아온 희성은 망연자실했다. 다온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맞았다.
"어떻게 됐어요?"
희성은 대답 대신 모니터의 팝업창을 바라봤다.
[경고: 패턴 일치율 94.7%]
그는 류시인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자네는 적들의 무기를 만들어준 셈이 된다고.'
"그랬구나..." 희성이 허탈하게 웃었다.
"류시인 형님은... 날더러 '적'이 될 수 있다고 했어. '진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세상에..."
"그때 조선도... 똑같았을 거야. 류성룡 대감은 '서인'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속한 '동인' 내부의 강경파들에게 '왜 서인에게 빌미를 주느냐'는 비난을 받으며 고립됐던 거야."
희성은 깨달았다.
<프로젝트 징비>가 찾아낸 진짜 적은 '정부'나 '야당'이 아니었다.
"우리가 싸워야 할 건... 진보도 보수도 아니었어."
희성의 눈이 다시 모니터의 알고리즘 코드를 향했다.
"사람의 머릿속에 깊이 뿌리 박힌 이 '실패의 알고리즘' 그 자체였어. '나와 다른 편의 경고는 무조건 묵살한다'는... 이 지독한 바이러스."
그의 손이 키보드 위로 올라갔다.
첫 번째 경고는 가장 믿었던 아군이자 혈연에게 처참히 묵살당했다.
이제 '설득'은 끝났다. 진정 국가를 위한 길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그의 표정은 결기로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