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진영 논리의 민낯을 징비 하다

나의 설계에 끌어들이다

by 유블리안

판을 설계하다


연구실로 돌아온 희성의 눈은 차가운 결의로 빛났다.


​"여보." 다온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류시인 작가까지 저런 반응이면... 포기해야 할까요?"


"아니. 설득은 끝났어. 이제 '증명'해야 해."


"증명이요?"


"알고리즘 그 자체를. 500년 전 그 진흙탕을 2025년에 그대로 재현할 거야."


​희성은 먼저 김민수 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의원님, 류희성입니다. 원하시던 '무기'를 드리겠습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니요?"


"현 정부 스피커인 류시인 작가 앞에서 받으셔야 합니다. 그를 논파할 자신이 있으십니까?"


수화기 너머 김민수의 짧은 침묵 뒤에 흡족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좋습니다, 류 박사. 아주 마음에 드는 판이군요."


​두 번째 전화는 류시인에게 걸었다.


"형님, 접니다. 제 데이터가 '적의 무기'가 될까 봐 두려우시죠."
"…그 말은 변함없네."
"그럼, 그 '적'과 '저'를 한자리에서 만나주시죠. 형님이 '중재자'가 되어 제 연구가 틀렸음을 증명해 주십시오. 김민수 의원의 공세를 막아주십시오."


류시인은 잠시 고민했지만, '보수 야당에 포섭되기 직전인 종친 동생을 계도할 책임'을 느꼈다.


"… 알겠네. 그 자리, 내가 가지."


​각자의 '진영 논리'에 따라, 두 사람은 희성이 설계한 판으로 걸어 들어왔다.


3자 대면, 알고리즘의 증명


D-Day. 희성의 연구실.


살얼음판 같은 긴장감 속에서 김민수와 류시인이 서로를 노려보며 마주 앉았다. 희성이 [경고: 패턴 일치율 94.7%] 팝업창을 띄웠다.


​"이것 보십시오, 류 작가님!"


김민수가 먼저 포문을 열었다.


"1591년 동인의 논리와 지금 정부의 브리핑이 94.7% 일치합니다! 명백한 '안보 해이' 아닙니까!"


​"맥락이 다릅니다."


류시인이 차갑게 받아쳤다.


"그때는 무능과 당파심이었고 지금은 '신중한 외교적 관리'입니다. 김 의원님이야말로 500년 전 서인들처럼 '정치 공세'를 위한 빌미만 찾고 계시는군요."


​"하! '신중론'이라는 단어로 '경고 묵살'을 포장하는 것까지 똑같지 않습니까!"


"그럼 의원님은 어떠십니까?"


류시인도 물러서지 않았다.


"어떻게든 정부를 흔들려고 안보 위기를 '조장'하고 '부풀리는' 행태야말로 500년 전 당파 싸움과 똑같지 않습니까!"


​"국민의 생명이 달린 안보를 '조장'이라뇨! 류 작가님 같은 분들이 '진영'에 갇혀 맹목적으로 감싸니까 정부가 경고를 듣지 않는 겁니다!"


"위기를 부추기는 건 의원님 같은 분들입니다! 그런 비난이 두려워 정부가 강경책이라도 쓰면, 그때는 '외교 실패'라고 공격하실 것 아닙니까!"


​두 사람은 데이터를 보는 대신 서로를 공격했다. 500년 전의 당파 싸움이 완벽하게 재현되고 있었다.


​"그만하십시오!"


희성의 일갈에 두 사람이 입을 다물었다.


​"바로 그거예요."


희성이 붉게 상기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두 분은 지금... 제 AI가 증명하는 '실패의 알고리즘'을 실시간으로 수행하고 계십니다."


"뭐라고요, 류 박사?"


"김 의원님은 이 데이터를 '정부를 공격할 무기'로만 봤습니다. 류 작가님은 이 데이터를 '적에게 줄 빌미'로만 봤고요. 이 94.7%의 '경고' 그 자체를 받아들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두 분의 이 대화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100%의 방아쇠


그때, 격렬한 논쟁에 충격을 받은 다온이 홀린 듯 태블릿 PC의 <징비록> 원문을 소리 내어 읽었다. 류성룡이 당파 싸움을 개탄하며 쓴 구절이었다.


​“아(我)와 피(彼)가 오직 당색(黨色)으로 나뉘어, 징조(徵兆)를 징조라 말하지 못하고 나라가 장차 망조(亡兆)에 들었음을 알지 못하니, 통탄할 일이로다.”


​그 순간이었다.


삐- 삐- 삐-


날카로운 경고음이 연구실을 찢었다. [94.7%]라는 숫자가 미친 듯이 깜박였다.


98.1%... 99.4%...


​"여보, 저것 봐요!"


"세상에..."


"뭐, 뭐야! 류 박사, 무슨 짓을 한 거야!"


김민수가 소리쳤다.


​숫자가 99.9%에서 멈추는 듯하더니, 마침내 붉은 화면 전체가 바뀌었다.


​[패턴 동기화: 100.0%]


[시대적 특이점 발생]


​"안 돼!"


[100.0%]라는 글자가 뜬 순간, 모니터에서 눈을 뜰 수 없는 백색광이 터져 나왔다. 네 사람의 비명이 빛에 휩쓸렸다.


추락, 1591년의 하회(河回)


정적.


희성이 가장 먼저 눈을 떴다. 삐걱거리는 낡은 마루 위였다. 흙냄새와 짚불 냄새가 끼쳤다. 다온, 그리고 흙먼지를 묻힌 정장 차림의 김민수와 류시인이 낯선 한옥 대청마루에 쓰러져 있었다.


​"이게... 무슨 쇼입니까, 류 박사!"


"희성아, 여긴... 세트장인가? 카메라 어디 있어?"


​희성은 대답 대신 대청마루 끝으로 걸어 나갔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빌딩 하나 없는 기와지붕과 초가집, 그리고 마을을 감싸고도는 강물이었다.


​"하회(河回)... 안동 하회마을이야..."


​네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처마 밑에 걸린 현판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붓글씨로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충효당 (忠孝堂)]


​서애 류성룡 대감의 종택. 1591년, 그가 잠시 파직되어 낙향해 있던 바로 그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