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휴 복직 워킹맘의 자아실현
수진과의 영상 통화를 마친 지우는 곧바로 'SELI' 모듈을 설치했다. 화면이 켜지자 MIRI나 NUNI와는 또 다른, 밝고 경쾌한 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지우님. 저는 SELI(셀리)입니다. 님의 잊고 있던 '진짜 취향'을 가장 멋진 방식으로 필터링하여 현실로 끌어내 드릴게요."
"필터링이라니?"
지우가 물었다.
"네. 저는 지우님의 과거 10년간의 쇼핑 기록, SNS 업로드 사진, 즐겨 들었던 플레이리스트, 심지어 예전에 작성했던 '위시 리스트'까지 모든 데이터를 분석할 거예요. 그리고 그중 현재의 지우님과 가장 멀어졌지만, 잠재된 만족도가 가장 높은 요소들을 선별합니다."
SELI는 지우가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을 슬쩍 화면에 띄웠다.
"일단, 48시간 동안 '데이터 수집' 모드를 시작할게요. 그동안 지우님은 평소처럼 생활해 주세요. 저는 묵묵히 지켜볼 뿐, 아무 조언도 하지 않겠습니다. 단, 한 가지는 지켜주셔야 해요."
"뭔데?"
"제가 곧 '잠금 해제'해 드릴 플레이리스트는 출퇴근 시간에 꼭 들어주셔야 합니다. 절대 스킵하거나 바꾸지 마세요. 그건 지우님의 '잃어버린 에너지'를 위한 연료니까요."
복직 D-3일.
지우는 옷장 앞에서 한숨을 쉬었다. MIRI 때문에 샀던 넉넉한 사이즈의 티셔츠와 NUNI를 돌보며 입던 무채색 카디건이 대부분이었다.
"이걸 입고 마케팅 회사를 가라고?"
그때 SELI의 모니터가 켜졌다.
"데이터 수집 완료. [최우선 필터링 결과]를 보여 드릴게요."
화면에는 지우의 과거 SNS 사진들이 떴다. 선명한 마젠타(자홍색) 립스틱을 바르고, 같은 색상의 가방을 들고 활짝 웃는 지우의 모습이었다.
"지우님은 지난 3년간 '마젠타' 계열의 색상을 의도적으로 회피했습니다. 이는 '육아 노동'에 집중하며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색에 대한 무의식적 거부감 때문입니다."
"맞아... 너무 튀잖아."
지우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마케팅 회사에서 지우님의 '존재감'은 필수적입니다. 자, 옷장 안쪽을 확인해 주세요. 3년 전 구매했지만 한 번도 입지 않은 '마젠타 트위드 재킷'이 있습니다. 꺼내주세요."
지우는 반신반의 하며 재킷을 꺼냈다.
"이 재킷과 함께 지우님이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블랙 슬랙스와 화이트 셔츠와 함께 입어보세요."
지우는 재킷을 걸쳤다. 거울 속 지우는 날카롭고, 프로페셔널하며, 당당했다.
복직 전 이틀.
지우는 마젠타 재킷을 입고 자신감이 붙었지만, 뭔가 2% 부족하다고 느꼈다. 평범한 액세서리로는 '개성'이 드러나지 않았다.
"SELI, 이대로는 그냥 평범한 마케터 같아. 나다운 무언가가 없어."
"걱정 마세요. [개성 필터]를 활성화할 시간입니다."
SELI는 지우의 낡은 보석함 사진을 화면에 띄웠다.
"과거 지우님은 '대량 생산품'보다 '스토리'가 담긴 빈티지 주얼리를 선호했습니다. 이건 님에게 '창의적인 사람'이라는 아이덴티티를 부여했어요."
SELI는 곧바로 지우가 육아 전에 자주 이용했지만 지금은 잊고 있던 오래된 빈티지 커스텀 숍의 온라인 페이지를 띄웠다.
"이 페이지에서 지우님의 과거 '즐겨찾기' 아이템을 복원했습니다. 이 독특한 '태엽 무늬 브로치'를 주목하세요. 마젠타 재킷 깃에 달면, 지우님만의 시그니처 스타일이 될 거예요."
지우는 망설임 없이 브로치를 주문했다. 자신도 모르게 '나만의 개성'을 찾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강하게 작용했다.
복직 첫날 아침. 지우는 마젠타 재킷과 빈티지 브로치를 착용하고, 남편이 끓여준 커피를 들고 문을 나섰다. 평화로운 아침을 맞은 남편은 아이를 안고 출근하는 지우에게 응원의 미소를 보냈다.
버스에 탄 지우는 이어폰을 꽂았다. SELI의 안내에 따라 플레이리스트를 켜자마자 웅장하고 강렬한 베이스의 힙합 음악이 귀를 때렸다. (과거 지우가 마케팅 아이디어를 짜던 시기에 즐겨 듣던 음악이었다.)
쿵, 쿵, 쿵. 심장을 울리는 리듬이 육아로 굳어있던 지우의 몸과 마음을 강타했다.
그때 SELI가 조용히 속삭였다.
"[에너지 필터] 작동 완료. 이 음악은 지우님의 과거 '도파민 수용체'를 자극하여 '창의적 몰입' 상태를 활성화합니다. 3년 만에 재개되는 '지우의 마케팅 뇌'를 깨우세요."
강렬한 비트를 들으며 지우는 버스 창밖을 보았다. 육아 중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거대한 광고판의 카피가 새로운 아이디어로 번뜩이며 머릿속에 정리되기 시작했다.
'맞아, 이 느낌이야. 나는 이런 사람이었지.'
회사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지우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사무실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긴장감 속에서도 SELI가 필터링해 준 마젠타 재킷이 마치 갑옷처럼 단단하게 느껴졌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저쪽에서 마케팅팀의 에이스였던 7년 차 선배 민지와 막 입사한 신입 예나가 걸어왔다.
"어, 지우 선배님!"
예나가 먼저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민지는 지우를 보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위아래로 지우를 훑어보더니, 놀라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우야? 너... 잠깐만. 와, 너 복직한 거 맞아? 무슨 화보 찍고 온 것 같아. 살도 하나도 안 쪘고... 그 마젠타 재킷 어디 거야?"
지우는 육아 휴직 기간 내내 들었던 '육아 잘하고 있냐', '애가 많이 컸겠다', '몸은 좀 괜찮냐' 같은 위로와 걱정 섞인 인사 대신, 순수한 '프로페셔널'로서의 질문을 받자 짜릿함을 느꼈다.
"어, 오랜만이야, 민지야. 그냥... 예전에 사 둔 건데."
지우는 재킷 깃에 달린 빈티지 브로치를 무심하게 만졌다.
민지가 한 걸음 다가와 재킷의 소재를 만지더니 눈을 반짝였다.
"대박. 네가 마젠타 컬러를 이렇게 세련되게 소화할 줄은 몰랐어. 육아하면서 무채색만 입는다고 들었는데, 역시 마케터는 컬러가 달라야지!"
옆에 있던 예나가 지우의 브로치를 보고 속삭였다.
"선배님, 브로치 너무 예뻐요. 어디 브랜드예요? 요즘 빈티지 커스텀이 다시 유행인데, 선배님 센스가... 완전 필터링 된 것 같아요!"
지우는 두 동료의 반응에 자신감이 한층 더 솟아올랐다. '나도 모르게 '엄마'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었구나. SELI가 이 프레임을 깨준 거였어.'
민지가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자, 지우 마케터님! 오늘부터 우리 팀, 3년 치 아이디어 폭발하게 해 주실 거죠? 일단 회의실 가자!"
지우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나는 이제 '마케터 지우'니까."
그녀의 발걸음은 출퇴근길에 들었던 힙합 음악의 비트만큼이나 경쾌하고 당당했다.
AI는 이번에도 '정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지우가 이미 가지고 있던 빛나는 원석을 찾아내고, 그걸 시대와 상황에 맞게 세련되게 연마해 주는 조력자였을 뿐이다.
지우는 육아로 잃었던 자아를 되찾고, 마케터로서의 삶을 다시 시작했다. 그녀는 이제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나다움'으로 충만한 존재가 되었다.
최지우 대리의 육아와 복직까지의 에피소드 잘 보셨나요? 어떻게 보면 말도 안되는 것 같지만 곧 이렇게 AI가 발달해서 우리의 생활을 편하게 해주면 좋겠지요?
다음 에피소드는 감정 번역기입니다.
직장생활에 있어서 수많은 오해와 감정들이 쌓여서 서먹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AI가 목소리와 표정 말투를 감지하여 상대방의 감정을 읽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다음 에피소드도 많이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