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밥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육아 AI 'NUNI'가 알려준 48시간의 교감 데이터

by 유블리안

​다이어트 AI 'MIRI'가 '조연'으로 물러난 후, 지우의 집에는 평화가 찾아온 듯했다. MIRI는 더 이상 지우의 체중을 감시하지 않았고, 대신 "10분 스트레칭"이나 "따뜻한 차"를 권하는 다정한 비서가 되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왜 우는 거야... 제발..."


​MIRI는 지우의 스트레스 수치는 읽어냈지만, 아기 울음소리의 '의미'까지 해석하지는 못했다.


"지우님, 스트레스 수치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명상 음악을 틀어드릴까요?"


라고 물을 뿐, 육아에 대한 해답은 주지 못했다. ​지우는 결국 수진에게 다시 연락했다.


"수진아... MIRI는 다 좋은데, 애 우는 건 모르네. 네가 말했던 그 육아 프로그램, 그거 뭐야?"


​수진이 설치해 준 것은 'NUNI'(누니)라는 육아 전문 모듈이었다.


​"MIRI가 '트레이너' 타입이라면, NUNI는 '관찰자' 타입이야."


수진이 NUNI를 설치하며 설명했다.


"얜 아무것도 안 시켜. 훈육이니 매뉴얼이니 그런 거 없어. 그냥 24시간 아기를 지켜보고 기록하는 '베이비 모니터'의 끝판왕이야. 그냥 켜놓기만 해."


​NUNI가 켜지자,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NUNI, '베이비 레코더' 모드를 시작합니다. 아기의 데이터를 기록합니다."


​지우에게는 딱 좋았다. MIRI에게 시달렸던 터라, 아무런 '조언'도 하지 않는 NUNI의 존재는 공기처럼 편안했다. ​하지만 지우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육아는 끝없는 노동의 반복이었다. 젖 물리고, 기저귀 갈고, 재우는 일이 반복되었다. 겨우 잠들면 또 깨서 울었다. 지우는 기계적으로 아기를 돌봤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 이게 행복한 건가.'


​어느 날 새벽, 야근에서 막 돌아온 남편이 거실 소파에서 잠든 것을 확인한 지우는, 멍하니 아기를 안고 서성이다 켜져 있는 NUNI에게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NUNI... 나 잘하고 있는 걸까. 아기는... 나를 좋아하는 걸까. 아빠는 바쁘니까 나라도 잘해야 하는데... 난 그냥 '밥 주는 사람' 같아."
​아무 대답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잠시 후, NUNI의 모니터가 켜지며 MIRI와 비슷한, 하지만 조금 더 부드러운 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우님. 지난 48시간 동안의 '교감 데이터'를 재생해 드릴까요?"
​"교감 데이터...?"
​"지우님이 '기계적인 노동'이라고 생각하셨던 순간들입니다."


​화면이 켜지고, 지난 이틀간의 기록이 하이라이트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 장면 1. 새벽 2시, 수유 시간


지우는 자신도 모르게 반쯤 감은 눈으로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지우는 "내가 저렇게 좀비 같았구나"라는 생각에 쓴웃음이 났다.
그때 NUNI가 화면의 한쪽을 확대했다.


"아기의 심박수 그래프입니다. 지우님의 심장 소리를 듣기 시작한 순간부터 '안정' 상태로 진입합니다."


화면 속 아기는 세상모르고 젖을 빨며 가장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장면 2. 오후 1시, 기저귀 갈기


지우가 무표정하게 기저귀를 가는 모습이 나왔다.


"지우님. 이 순간의 '옹알이' 소리를 들어보세요."


NUNI가 아기의 소리를 증폭시켰다. "아구- 그으-"


"이 소리는 현재 의학계에서 '가장 친밀한 대상에게 보내는 만족의 신호'로 분류됩니다."


지우는 기억도 못 하는 순간이었다.


​# 장면 3. 새벽 4시, 이유 없는 울음.


지우가 아기를 안고 거실을 서성이다,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렸던 자장가.


"지우님의 목소리 주파수입니다."


NUNI가 음성을 분석해 그래프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건, 아기의 울음소리 주파수입니다. 지우님의 목소리 톤에 맞춰 아기의 울음소리 톤이 점차 '진정' 패턴으로 동기화되고 있습니다."


영상 속에서, 지우의 노래가 계속되자 아기는 울음을 그치고 지우의 품을 파고들었다.

​영상은 끝이 났다. 지우는 자신이 지쳐서 놓쳤던, 혹은 '노동'이라고만 생각했던 모든 순간이 사실은 아기와의 '교감'이었음을 깨달았다.


​"지우님. 아기에게 지우님은 '밥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NUNI의 화면에 마지막 그래프가 떴다.


​"지난 48시간 동안, 아기가 가장 안정감을 느낀 순간은 100% '지우님과 접촉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지우님은 아기의 '세상 전부'입니다."


​지우는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다 품에 안겨 잠든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AI는 이번에도 '정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지우가 이미 '정답'이었음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며칠 뒤 주말 아침. 야근을 마친 남편이 피곤한 얼굴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NUNI의 치유 덕분에 마음의 여유가 생긴 지우는 남편에게 더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그때 NUNI의 모니터가 켜졌다.


​"지우님, 그리고 남편님. 좋은 아침입니다. 아기가 두 분의 목소리를 모두 정확하게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신기한 듯 NUNI를 쳐다봤다.


​"어젯밤 [엄마의 자장가]로 아기 안정도가 90% 상승했습니다."


NUNI는 곧바로 남편을 향해 말을 이었다.


"오늘은 남편님께 '아빠 교감 미션'이 제안됩니다."


​"미션?"


남편이 되물었다.
​"네. [아빠의 심장 소리 10분 안아주기]입니다. 엄마의 심박수와 다른, 아빠의 낮고 안정적인 심박수는 아기에게 다른 종류의 편안함을 줄 수 있습니다."


​NUNI는 '당신은 육아를 안 했어'라고 비난하지 않고, '당신만이 줄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제안했다. ​남편은 어색하게 웃더니 소파에서 일어나 아기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가슴에 가만히 묻었다.


​"NUNI, 데이터 수집 중... [아빠 안아주기] 성공. 아기 안정도 15% 추가 상승. '가족 교감 레벨'이 1단계 올랐습니다."


​지우는 그 모습을 보며, MIRI 때와는 다른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 온 AI는, 다그치는 트레이너도, 정답을 강요하는 선생님도 아니었다.
그저 가족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의 '조연'이 될 수 있도록, 묵묵히 데이터를 비춰주는 진짜 '조력자'였다.


NUNI 덕분에 평화를 되찾은 지우는 오랜만에 수진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수진아, NUNI 정말 고마워. 덕분에 살 것 같아."


화면 너머로 지우의 안색이 밝아진 것을 확인한 수진이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다! 역시 너한텐 '관찰자' 타입이 맞을 줄 알았어."
"있잖아, 근데... 나 곧 복직해야 하는데, 뭘 입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어."


지우가 옷장을 힐끗 보며 말했다.


"MIRI는 자꾸 운동복 아니면 넉넉한 사이즈의 옷만 추천해 주는데, 이젠 좀 꾸미고 싶기도 하고..."
"아, 그거?"


수진이 무릎을 탁 쳤다.


"너만을 위한 모듈이 또 있지. 이건 트레이너도, 관찰자도 아니야. 일종의 '필터'지."
"필터?"
"응. [취향 AI 필터]라고. 이건 너한테 뭘 사라고 절대 강요 안 해. 그냥 네가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 너조차 잊고 있던 네 취향을 거울처럼 비춰주기만 하거든. 이것도... 한번 써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