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01화. 프롤로그

세종대왕님, 저한테 왜 그러세요? 술 취한 연구원의 발악

by 유블리안

"아니, 전하.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이거 훈민정음 아니고 '훈민고통' 아닙니까?

백성들이 쉽게 익혀서 바르게 소리 내어 쓸 수 있도록 만든 글자라고 해놓고

뭐가 이렇게 복잡한 것입니까?"


밤 11시 40분, 광화문 광장. 희성은 한 손에 반쯤 비우다 만 소주병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허공에 삿대질을 해대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은 다름 아닌 금빛 찬란한 세종대왕 동상의 미간이었다.


지나가던 커플이


"어머, 저 사람 봐. 얼마나 마신 거야?" 라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알코올 16도에 절여진 희성의 뇌는 수치심 따위는 필름과 함께 끊어버린 지 오래였다.


유희성, 그는 대한민국 어문학계가 알아주는, 아니 알아주길 바라는 10년 차 한글 연구원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도(李棹)씨, 당신 때문에 내가 10년째 논문 심사에서 까이고 있단 말입니다!

'나랏말싸미' 그 문장 하나 해석하는 데 청춘을 다 바쳤는데,

아직도 숨겨진 원리가 있다니요? 예?"


오늘도 지도 교수님에게


"자네 연구는 영혼이 없어, 영혼이!"


라며 2시간 동안 털리고 나오는 길이었다. 홧김에 마신 소주 3병이 문제였다.

억울함이 폭발한 그는 급기야 600년 전의 성군(聖君)을 '이도 씨'라고 부르는

하극상을 저지르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동상 앞 기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차가운 대리석의 감촉이 엉덩이를 타고 올라왔다.


"하아... 진짜 딱 한 번만 만나서 물어보고 싶다. 그때 무슨 생각으로 만드신 건지.

밤새 야식은 뭘 드셨는지. 혹시... 고기반찬 투정은 안 하셨는지."


주머니를 뒤적거려 다 구겨진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라이터를 켜려는데, 바람이 불어 자꾸만 불이 붙지 않았다.

칙, 치익-


"아, 거참! 바람 한번 살벌하게 부네!"



짜증스럽게 고개를 드는데, 순간 기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 시끄럽게 울려대던 광화문 도로의 자동차 소음이 뚝 끊겨 있었다.

술이 확 깰 만큼 완벽하고 서늘한 정적.


'우우웅-'


그때, 내 손에 들려있던 가스라이터의 불꽃이 기이하게 솟구쳤다.

파란 불꽃이 아니라, 마치 도깨비불 같은 붉은색이었다.

동시에 동상의 눈이 번쩍, 하고 빛난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어...? 꿈인가?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시긴 했네. 후우~~"

​"으으... 가방은 또 왜 이렇게 무거워..."


​희성의 몸이 묵직한 백팩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미련한 습관이었다. 회식 다음 날 죽어가는 동료들 먹이겠다고 챙긴 숙취해소제며,

언제 다칠지 모른다며 바리바리 싸 들고 다니는 구급약까지.


​대한민국 K-직장인의 비애가 담긴 '생존 키트'가 오늘따라 천근만근이었다.


그 순건 세상이 휘청거렸다. 멀미가 났다.


마치 엘리베이터가 100층 아래로 추락하는 듯한 부유감.

내가 밟고 있던 보도블록이 물렁거리는 흙바닥으로 변해

내 발목을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으악! 이거 왜 이래! 지진이야?"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그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은 곳은 차가운 동상의 기단이 아니었다.

거칠고 따뜻한, 누군가의 옷자락이었다.


"게, 누구냐."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 술기운 탓일까, 아니면 환청일까.

희성은 흐릿한 눈을 비비며 고개를 들었다.


광화문의 네온사인은 온데간데없고, 횃불이 일렁이는 어두운 밤. 그리고 그의 눈앞엔,

익숙한 곤룡포를 입고 희성을 내려다보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 잠깐만. 동상이 왜 걸어 다니지?


"설마... 이도 씨?"


그것이 희성이 조선 땅에서 내뱉은 첫마디였다.

아직 분위기 파악 못한 희성은 그의 망발이 앞으로의 운명을 전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끌고 가리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