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02화. 조선 경복궁의 밤

길 잃은 그림자에 같인 위기, 그리고 새로운 만남

by 유블리안




“설마… 이도 씨?”


희성의 입에서 금기(禁忌)의 이름이 튀어나온 순간, 경복궁의 밤이 딱딱하게 굳었다.

바람이 멈춘 것처럼. 횃불이 흔들리는 소리조차 한 박자 늦게 들리는 듯했다.
호위무사들은 서로의 귀를 의심했고, 내관은 턱이 빠질 듯 입을 벌렸다.

감히 주상 전하의 용포(龍袍)를 붙잡은 것도 모자라, 휘(諱)를 함부로 부르다니.


이건 능지처참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대역죄였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희성은 태평했다. 아니, 태평하다 못해 뻔뻔했다.

그는 잡고 있는 붉은 비단 옷감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감탄사까지 흘렸다.


“이야… 퀄리티 보소. 이거 진짜 실크네?

동상에다가 옷 입혀놓은 건가? 요즘 구청 예산 많나 보네…”


휘청—


그리고 확인 사살을 하듯, 세종의 가슴팍에 수 놓인 금색 용무늬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근데 이도 씨, 표정이 왜 그래요? 야근하다 오셨어요? 다크써클이 아주 턱 밑까지 내려왔네.”
“……”


이도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 했다.


‘이도(李祹).’
자기 이름을 분명히 들었다. 그러나 그 앞뒤로 붙은 말들은 도통 알 수 없는 괴상한 소리였다.


‘퀄리티? 구청? 다크써클?’


조선의 말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명나라 말도, 여진의 말도 아니었다.
세종은 짧게 판단을 내렸다.


‘…이 자는 내 이름을 아는, 정체불명의 오랑캐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내관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저, 저, 저 미친놈이! 어딜 감히 옥체에 손을 대느냐! 당장 저놈을 쳐라!”
“어?”


그제야 희성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했다.

‘동상’이라고 믿었던 ‘이도 씨’의 눈동자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살벌하게.


“네 이놈! 썩 물러서지 못할까!”


천둥 같은 호통과 함께 호위무사들이 달려들었다.

희성의 목덜미에 서늘한 쇠붙이의 냉기가 닿았다.


“억!”


술이 확 깼다. 정확히 말하면 알코올은 날아갔는데, 현실 감각은 아직 늦게 도착한 상태였다.


“끌고 가라! 의금부로 당장 압송하라!”


희성의 양팔이 억센 손에 붙들려 뒤로 꺾였다. 발이 허공에 붕 뜨는가 싶더니,

곧장 차가운 바닥으로 패대기 쳐졌다.


“아이고, 허리야…”


그는 욱신거리는 허리를 문지르며 주위를 둘러봤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 젖은 흙과 쇠의 냄새. 쇠창살 사이로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

멀리서 들려오는 물방울 소리.
영락없는 감옥이었다.


‘미치겠네. 꿈이 아니었어.’


희성은 본능적으로 메고 있던 백팩을 끌어안았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가방이 뺏기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이 안에 든 물건들이… 지금은 정말로, 그의 생명줄이었다.


“으으… 물… 냉수 좀 다오…”


그때, 구석진 지푸라기 더미에서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희성은 흠칫 놀라 소리 난 쪽을 바라봤다. 헝클어진 상투에 꼬질꼬질한 행색.

그런데 입고 있는 옷은 꽤 비싼 비단옷이었다. 노인 한 명이 대자로 뻗어 있었다.


‘죄인인가? 옷차림을 보면… 꽤 높은 양반 같은데.’


노인은 마치 회식 3차까지 달리고 지하철역에서 첫차를 기다리는 부장님 같은 몰골이었다.

희성은 슬그머니 말을 걸려다 멈칫했다.


‘잠깐. 이번에도 그냥 말을 걸면 또 오랑캐 취급당할 거야.’


아까 광화문에서의 실수를 떠올리자, 목덜미가 다시 서늘해졌다.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비록 회화는 완벽하지 않아도, 그는 10년 차 한글 연구원이었다.

문헌으로 배운 15세기 중세국어 데이터가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좋아. 최대한 문어체로… 사극 톤으로 가보자.’


희성은 목을 가다듬고, 기억 속의 옛말들을 조합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르신… 기체후 일향 만강하십니까…는 아니고, 몸은 좀 어떠하십니까?”


최대한 점잖은 척 흉내 낸 말투.
다행히 노인이 반응했다.


“으음… 자네 말씨가 참으로 기묘하구나. 북방 사투리 같기도 하고, 글 읽는 소리 같기도 하고…”


노인은 게슴츠레 눈을 뜨며 희성을 훑어봤다. 다행히 ‘오랑캐’라 의심하기보다는,

그저 ‘말투가 특이한 촌놈’ 정도로 여기는 눈치였다.


“제가… 먼… 아주 먼 변방에서 와서 말이 좀 서툽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허허, 그게 무슨 대수라고. 내 머리가 깨질 것 같은데 말씨 타령이나 하고 있겠나.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술자리마저 끝장을 보려 하시는지…”


전하? 술자리?
희성의 귀가 번쩍 섰다. 말이 통했다. 뜻은 전달된 것이다.
이 노인, 그냥 죄인이 아니다.


희성은 재빨리 가방 지퍼를 열었다. 비상용으로 챙겨둔 ‘직장인의 생명수’가 몇 병 남아 있었다.

그는 그중 하나를 꺼내 정중하게 내밀었다. 황금빛 액체가 병 안에서 찰랑거렸다.


“어르신, 이것 좀 드시지요. 저기 먼 남쪽 나라에서 온 ‘취기를 다스리는 탕약(醒酒湯)’이옵니다.”
“성주탕? 흐음, 색깔 한번 요상하구나. 냄새는 꼭 엿기름 같기도 하고.”


노인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병을 받아 들었다. 잠깐 망설이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단숨에 들이켰다.
꿀꺽, 꿀꺽.


“크으! 맛이… 참으로 오묘하구나!”


빈 병을 내려놓은 노인이 입맛을 다셨다. 희성은 초조하게 반응을 살폈다.
그리고 약 30분 후.
시들어가던 배추 같던 노인의 눈빛에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딘가, 다시 ‘사람’이 되었다.


“허, 거참! 머릿속 안개가 걷히듯 맑아지는구나! 이보게 젊은이, 이 약의 이름이 뭐라고?”
“견디셔… 아니, 컨디션이라 하옵니다.”
“컨디션… 기억해 둬야겠어.”


노인은 만족스러운 듯 수염을 쓸어내리며 희성을 빤히 바라봤다.

여든은 족히 넘어 보이는 나이였지만, 눈빛만은 형형했다.


“헌데 자네는 누구인가? 겉모습은 낯선데, 눈빛은 선하구나.”
“아, 저는… 글자를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르신은 누구신데 여기 계십니까? 죄를 지으셨습니까?”


희성의 질문에 노인이 ‘쉿’ 하며 검지를 입에 갖다 댔다. 그리고는 옥사 문밖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죄는 무슨. 잠시 피신해 있는 걸세.”
“피신이라니요? 누구한테서 말입니까?”
“누구긴. 금상(임금)이지.”


노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내 나이 올해 여든 하나일세. 남들은 진즉 은퇴해서 손주 재롱이나 볼 나이에,

나는 아직도 새벽같이 입궐해서 격무에 시달리고 있단 말일세.

사직서를 수십 번을 냈는데도 ‘윤허하지 않는다’는 답만 돌아오니 원…”


여든 하나. 은퇴 불가. 격무.
희성의 머릿속에서 역사책의 한 페이지가 번개처럼 스쳤다.
조선 시대 최장수 정승. 세종에게 붙들려(?) 죽을 때까지 일했다는 그 사람.


“설마… 황희 정승?”
“응? 자네가 내 이름을 어찌 아나?”


희성은 입을 떡 벌렸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명 재상을— 감옥 동기로 만날 줄이야.

그것도 땡땡이치다 걸려서.


[지잉— 지잉—]


그때, 희성의 주머니가 요란하게 진동했다.
황희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희성은 황급히 스마트폰을 꺼냈다.

배터리 잔량 15%. 화면에는 AI 비서 ‘바름이’의 알림 창이 떠 있었다.


[AI 바름이] : GPS 신호 미약. 현재 위치를 특정할 수 없습니다. (데이터 통신 불가)
[AI 바름이] : 주인님, 심박수가 비정상적으로 높습니다. 또 야근 중이십니까?


“이, 이게 무슨 소리냐! 그 네모난 돌덩이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다니!”
“아, 이건… 제 비서입니다. 이름은 바름이고요.”
“비서? 저 조그만 상자 안에 사람을 가두었단 말이냐? 사술(邪術)이로다!”


희성이 뭐라 해명하기도 전이었다.
쿵, 쿵, 쿵.
육중한 발소리와 함께 옥사 저편에서 횃불이 일렁거렸다.


“영의정 대감! 여기 계신 거 다 압니다!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내관의 외침에 황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이런 젠장, 귀신같은 놈들! 벌써 찾아내다니!”


황희는 다급하게 희성의 등 뒤로 숨으며 속삭였다.


“이보게, 자네가 나 좀 숨겨주게! 내가 나가면 자네 목숨도 보전하기 힘들 것이야!”
“예? 아니, 잠깐만요! 저도 지금 코가 석 자인데…”


하지만 선택권은 없었다. 횃불을 든 내관들과 병사들이 들이닥쳤고,

그들의 시선은 황희가 아니라— 희성의 기묘한 복장과 손에 들린 빛나는 돌덩이(스마트폰)에 꽂혔다.


“저 놈은 또 뭐야? 당장 끌어내!”


졸지에 영의정의 방패막이가 된 희성.
그의 험난한 조선의 회사(?) 생활은, 신고식 한 번 아주 거창하게 치르며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