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2화. 불빛을 본 사람

위기를 정면돌파하는 이도와 주변인들

by 유블리안




강녕전의 밤은 낮보다 많은 눈을 품고 있었다.


등불이 꺼지고 발소리가 잦아들어도, 궁 안에는 늘 깨어 있는 시선들이 있었다.

그날 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레방아가 있는 물길 근처를 순찰[행순(行巡)]하던 순라군사가 무심코 걸음을 멈췄다.


물 위에 잠깐, 정말 잠깐 빛이 스쳤다.

번개처럼 번쩍인 것도 아니었고, 등불처럼 오래 남지도 않았다.

마치 숨을 들이쉬었다 내쉰 자리에 남은 잔상 같았다.


“방금… 보았느냐?”


함께 걷던 하급 관리가 발을 멈췄다.


“무얼 말입니까? 저는 못 본 것 같습니다.”


“불 같은데, 불은 아니고… 달빛이라기엔 너무 짧았어.

뭔가 새로 생긴 것 같기도 하고.”


두 사람은 말없이 물길을 바라보았다.


물은 평소처럼 흘렀고, 물레방아도 평소처럼 돌고 있었다. 다시 빛은 나타나지 않았다.

순라군사는 입술을 달싹였다가, 그만 삼켰다.


‘괜히 본 걸로 만들면 피곤해진다. 애초에 확실치도 않다.’


궁에서는 확실하지 않은 말이 가장 위험했다.


보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책임도 없다는 뜻이었다.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하급 관리 역시 입을 다물었다.

그 빛은 그렇게 기록되지 않은 채, 두 사람 기억의 가장자리에만 남게 되었다.


하급 관리는 괜히 목이 말라 침을 삼켰다.


“못 봤습니다”


라고 말한 뒤, 스스로도 그 말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가늠하지 못했다.

순라군사는 고개만 한 번 끄덕였고, 둘은 더 말하지 않은 채 발소리를 죽여 걸음을 옮겼다.


결국 이도는 그 일을 공식적으로 보고받지 않았다.
그러나 모를 리도 없었다. 보고가 없었다는 건, 누군가가 ‘아무것도 없다’고 선택했다는 뜻이니까.


아침 조회를 마친 뒤, 이도는 장영실을 불렀다.


“어젯밤 물길 쪽은 어땠느냐.”


장영실은 잠시 말을 고르다 답했다.


“큰 소란은 없었사옵니다. 다만… 순라군사 하나가 물에 비친 빛을 보았다는 말이 있사옵니다.”


이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봤을 것이다.”


장영실의 눈이 잠시 커졌다.


“전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보았음에도 보고를 하지 않고 이상 없다고 한 근무자는 어찌해야 하옵니까?”


이도는 한치 망설임 없이 잘랐다.


“어젯밤 순찰자는 그대로 두어라.”


“예, 전하.”


“기술은 늘 빛을 남긴다. 아주 잠깐이라도. 확신 없는 말을 억지로 끌어내면 그때부터는 공포가 된다.”


이도는 잠시 물길을 떠올렸다. 예전에도 그랬다.
새로운 제도, 새로운 기계, 새로운 생각은 언제나 먼저 ‘이상한 것’으로 보였다.

옳았지만 설명되지 못해, 결국 사라진 것들도 적지 않았다.


“덮지 않겠다.”


이도가 낮게 말했다.


“덮을수록 사술이 된다.”


장영실이 숨을 삼켰다.


“그러면…”


“준비하라. 숨김이 아니라 설명이다.”


그날 낮, 희성은 강녕전 복도를 지나며 익숙한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들자 황희 정승이 서 있었다. 백발은 더 늘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깊었다.


“어디서 본 얼굴이로군.”


희성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 황희 역시 희성을 본 적이 있었다.
미래라는 말, 기이한 이야기, 술기운에 섞인 농담 같은 기억이 어렴풋이 스쳤다.

그러나 황희는 그 기억을 붙잡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언제나 ‘지금’이었다.


“말씨가 여전히 묘하지만… 많이 좋아졌네.”


그 말만 남기고 황희는 더 묻지 않았다. 미래도, 기계도, 상자도 묻지 않았다.

다만 희성의 손과 등에 멘 가방, 그리고 눈빛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때도 그랬지.’


황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말은 서툴렀는데, 손은 망설임이 없었어.’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던 희성에게 다온이 조용히 속삭였다.


“대감께서 오라버니를 알아보시는 것 같고… 좋게 보시는 것 같습니다.”


희성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다온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희성의 백팩 끈이 어깨에서 삐뚤어진 걸 손끝으로 바로잡아 주었다.

말보다 빠른 손길이, “괜찮다”는 통역이 되었다.


희성은 숨을 가늘게 내쉬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마음이 먼저 닿는 순간이 있다는 걸, 그는 오늘도 배웠다.


오후가 되자 집현전 근처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번졌다.


“밤에 물길에서 빛을 봤다더라.”
“번개는 아니었다고 하던데.”
“괜히 건드렸다가 탈 나는 것 아니겠나.”
“전하께서 밤중에 허락하신 일이 있다고 들었소만…”


학자들의 시선이 갈렸다. 이해하려는 눈과 경계하는 눈이 같은 공간에 머물렀다.

이도와 독대를 하는 자리에서 성삼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기계의 이치는 이해할 수 있사오나, 백성이 이해하지 못하면 오히려 두려움이 될 수도 있사옵니다.”


이도는 잠시 침묵하다 답했다.


“그래서 설명을 할 것이다.”


“설명이라면…”


“누구나 보고, 누구나 다시 할 수 있도록. 그래야 사술이 아닌 기술이 되지 않겠느냐.”


그 말에 희성의 가슴이 묵직해졌다. 바름이는 아직 불안정했고, 그의 말은 언제든 끊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도는 이미 결정을 내린 얼굴이었다. 황희가 보여준 침묵과 시선이, 이도에게도 하나의 판단이 된 듯했다.


해가 기울 무렵, 물길 근처에서 정리 작업을 하던 중 작은 사고가 났다.

하급 관리 하나가 젖은 돌에 미끄러지며 손을 깊게 베었다.


“아—!”


피가 금세 흘렀다. 주변이 술렁였다.


“괜히 기이한 일을 벌이다가…”
“사술이 아니겠나.”


그 순간 다온이 앞으로 나섰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단단했다.


“위험하오니 다들 물러나 주세요. 어서요!”


사람들이 한걸음 물러서는 틈에 희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백팩을 내려놓고 지퍼를 열었다.
소독약, 거즈, 붕대. 그는 설명하지 않았다. 손을 잡고 씻기고, 포비돈을 바른 뒤 붕대를 감았다.

통증으로 일그러졌던 얼굴이 서서히 풀렸다. 떨리던 손도 조금씩 진정됐다.

처음 보는 광경에 누군가는 더 크게 소리쳤다.


“사술이다! 당장 의금부에—”


하지만 피가 멎고, 고통이 가라앉는 걸 본 순간 그 목소리도 힘을 잃었다. 누군가는 뒤로 물러나면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약 냄새와 피 냄새가 섞인 공기 속에서, ‘기이하다’는 말이 ‘신기하다’로 조용히 바뀌는 순간이었다. 다온이 사람들을 한 번 더 막아 서자, 웅성거림도 더 이상 앞으로 나오지 못했다. 베인 손의 주인이 오히려 희성에게 허리를 굽혔다.


“고맙습니다… 살았습니다.”


그 모습을 황희가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었다.
황희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사람들을 잠재우기엔 충분히 컸다.


“사술이라면 살리지 못했을 것이외다.

저 사람의 마음이 먼저였으니, 더욱 그러할 것이오.”


그 한마디에 주변의 소리가 잦아들었다. 말은 길지 않았지만 방향은 분명했다.


다온은 말없이 희성의 약 묻은 손을 닦아주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고쳐주었다.

“수고했다”는 말을 대신하는 손길이었다.


그날 밤, 이도는 홀로 기록을 넘기며 중얼거렸다.


“말은 어긋날 수 있다.”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


“허나 진실한 마음은 어긋나지 않는다.”


희성은 그 말을 멀리서 들었다. 번역은 완전하지 않았지만 뜻은 분명히 전해졌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진심은 이미 닿아 있었다.


강녕전 옆 부속실. 장영실과 성삼문이 합류한 자리에서 이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제 더 이상 숨길 생각은 없다. 다만, 겁주고 싶지도 않다.”


장영실은 기술자답게 단순했다.


“기계는 말이 없사옵니다. 돌리면 돌고, 멈추면 멈출 뿐이옵니다.”


그러나 성삼문은 학자답게 반대편에 섰다.


“먼저 글로 남겨야 하옵니다, 전하. 그렇지 않으면 소문만 무성해지고 전하의 뜻은 묻히게 될 것이옵니다. 기술 또한 글이 있어야 흩어지지 않고 보존될 것이옵니다.”


희성이 조심스레 한마디 보탰다.


“보여주되, 먼저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먼저 보게 하고, 질문이 나오면 그때 설명하면 될 것이옵니다.”


다온은 희성의 말을 짧게 정리해 이도에게 올렸다. 그리고 마지막에 딱 한마디를 더했다.


“백성들은 겁이 많지만, 거짓에는 더 민감한 법이옵니다.”


이도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결론을 내렸다.


“좋다. 공개하는 것은 동의하는 것으로 알겠다.
과장하지 않고, 신비화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판단에 맡기겠다.”


그리고 이도는 다온을 바라보았다.


“다온. 그 모든 과정을 글로 옮겨라.”


길었던 논의가 끝나고 모두 흩어질 때, 다온은 희성보다 한 박자 늦게 일어났다.


희성이 의아해 돌아보니, 다온은 이미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등불 아래의 눈빛이 묘하게 고요했다.

다온은 자신이 굳이 통역하지 않아도, 이제 희성의 말과 진심어린 행동이 전하에게 닿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은 신뢰였고, 존경이었고, 말로는 아직 부를 수 없는 어떤 감정의 시작이었다.


그날 밤, 조선의 기술은 더 이상 숨겨야 할 것이 아니라, 설명해야 할 것이 되었다.
그리고 처소로 돌아가는 길, 다온은 그 설명의 곁에 서 있는 사람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음을 스스로 알아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