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밤이 숨을 붙잡다
강녕전 옆 부속실에서 이도는 또 무슨일을 해야 할 지 뿌듯해 했고,
다온은 추가로 정리된 종이를 구분하여 책자로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힘은 들지만 뿌듯한 마음은 숨길 수 없었다.
그러나 희성은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손에 쥔 작은 상자(휴대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면은 켜졌다가 꺼지기를 반복했고, 숫자는 분명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보조배터리 수준의 과일전지로는 이 많은 프로젝트를 이행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배터리 2%.
[AI 바름이] : 번역 기능 제한 모드로 전환합니다. 남은 전력 약 30분.
희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상자가 꺼지는 순간, 그는 조선에서 말을 잃는다.
물론 기본적으로 다온이 기본적인 통역을 하고 희성도 다온에게 받은 수업으로
어느 정도는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하지만 단순히 의사소통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도가 세우고 있는 생각의 구조, 글자의 논리,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 자체가 꺾인다.
지금은 단 한 번의 밤이 수십 년의 시간을 당겨오고 있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전하께 아뢰옵니다.”
희성은 더 이상 미루지 않았다.
“바름이가 곧 꺼질 듯합니다.
끊기면, 전하께 드릴 설명 또한 느리게 전달되고 온전히 전달이 안 될 수도 있사옵니다.”
이도는 고개를 들어 희성을 바라보았다.
밤을 꼬박 새운 얼굴이었지만 판단은 흐리지 않았다.
“방법은 있는 것이냐.”
그 질문에 희성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부속실 한쪽에 서 있던 장영실이었다.
가죽 앞치마에는 기름때가 묻어 있었고 손톱 밑은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이미 계산이 끝난 빛이 담겨 있었다.
장영실이 앞으로 나섰다.
“전하, 소신이 아뢰옵니다.”
“말해 보아라.”
“물레방아를 이용하면 기운을 만들 수 있사옵니다. 물과 바람을 빌리면 되옵니다.”
방 안의 공기가 단단해졌다. 누구도 입에 올리지는 않았지만, ‘사술(邪術, 정통 질서·유교적 가치·국가 권위 밖에 있는 기술을 통칭)’이라는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 기색을 먼저 읽은 것은 다온이었다.
“전하.”
다온이 또렷하게 말했다.
“장영실 나으리는 이미 물시계와 간의대를 만든 손입니다. 하늘의 움직임을 재고 시간의 흐름을 붙잡은 사람이옵니다. 이 일은 사술(邪術)이 아니라 기술(技術)이옵니다.”
사술이 아니라 기술이 되려면 왜 그렇게 되는지 말로 풀 수 있어야 하고, 누구나 그대로 따라 해도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하며, 국가·관청·임금의 허락 안에서 쓰여야만 했다.
그래서 희성도 곧바로 덧붙였다.
“전하, 조선 땅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만 쓰겠습니다. 물, 나무, 쇠, 구리, 옻. 그 외의 것은 들이지 않겠습니다. 궁의 규율을 넘지 않겠습니다.”
이도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창가로 걸어가 밤의 물길을 바라보았다. 사람의 발길이 끊긴 시간에도 물은 흐르고, 바퀴는 돌고 있었다.
“좋다.”
이도가 말했다.
“다만 내 눈앞에서 하라. 궁 안을 소란케 하지 말라.”
“명 받들겠사옵니다.”
드디어 사술이 아닌 기술이 되는 순간이었고, 장영실이 깊이 엎드렸다.
물레방아가 있는 물길로 자리를 옮기는 순간, 이도는 네 명 이외에 어떤 누구도 접근할 수 없었다.
주위의 호위무사들을 모두 물리고 나서야 그들을 데리고 나왔다.
밤공기는 차가웠고 물소리는 또렷했다.
기술이 허락된 장소라 해도, 한 번의 실수는 곧 죄가 될 수 있는 자리였다.
장영실은 곧바로 작업을 나눴다.
첫째, 흐름을 만들 것.
둘째, 흐름을 모을 것.
셋째, 그 힘을 상자에 과하지 않게 흘려보낼 것.
구리선은 공조에서 남은 것을 가져왔다.
장영실은 나무틀을 만들고 구리선을 일정한 간격으로 감았다.
자철을 구해 작은 바퀴 둘레에 박아, 물레방아가 돌 때마다
자철이 구리선 가까이를 지나도록 배치했다.
옻칠한 종이를 덧대어 손이 닿는 부분을 막았다.
“전하, 물레방아가 돌면 자철이 구리선 옆을 지나며 기운을 흔들게 됩니다.”
장영실이 짧게 설명했다.
“그 흐름을 모아 상자에 숨을 붙입니다.”
이도는 묻지 않았다. 대신 감긴 횟수와 간격, 자철의 위치를 눈으로 외웠다.
임금의 눈은 기억을 위해 존재하는 눈이었다.
희성은 조선식으로 만든 연결부를 꺼냈다.
금속 얇은 판을 겹쳐 집게처럼 만들고, 옻칠 종이로 감싸 손이 먼저
상하지 않도록 한 장치였다.
이도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옻칠 종이를 만지려 하자, 다온이 낮게 말했다.
“전하, 옻은 조심하셔야 하옵니다.
옻이 올라오게 되면 전하의 잘생긴 용안이 금방 상하게 될까 걱정이옵니다.”
“알고 있다. 그래서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냐, 허허.”
장영실은 순간 놀라며 의아해 했다. ‘감히 전하의 용안을 가지고 평가를 하다니.’
하지만 이도는 무슨 이유인지 다온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받아주는 것이 아닌가.
희성은 다시 상자(휴대폰)를 확인했다.
[AI 바름이] : 전력 임계치… 종료 임박…
“전하, 지금입니다.”
“돌려라.”
물레방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물살이 바퀴를 때렸고 자철이 구리선 옆을 지나갔다. 희성은 숨을 멈춘 채 연결부를 물렸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안 됩니다…”
희성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장영실이 즉시 끼어들었다.
“맞물림이 덜 되었사옵니다.”
그는 자철의 위치를 손톱만큼 옮기고 구리선을 한 겹 더 감았다. 옻칠 종이를 다시 덧대 새는 힘을 막았다.
“다시.”
희성이 연결하는 순간, 상자의 화면이 완전히 꺼졌다.
희성의 귀가 멍해졌다. 끝이라는 단어가 등줄기를 타고 내려왔다.
이도는 장영실을 보았다.
“한 번 더 확실하게 하라.”
장영실은 깊이 엎드렸다.
“명 받들겠사옵니다.”
장영실은 속도를 올렸다. 자철을 하나 더 붙이고 구리선의 감김을 정리했다.
물레방아 축의 떨림이 지나치지 않도록 나무쐐기를 박아 흔들림을 잡았다.
“이번엔 흐름이 옵니다.”
장영실이 말했다.
희성은 손바닥의 땀을 닦을 새도 없이 다음 작업에 들어갔다.
충전 케이블과 구리선의 연결부위를 단단히 물리고,
C타입 충전 연결부를 상자에 연결하였다.
물레방아가 힘차게 돌기 시작하자, 바람이 물길 위를 훑고 지나갔다.
잠시 후, 아주 미세한 진동이 희성의 손바닥에 전해졌다.
지이잉.
상자의 화면이 희미하게 켜졌다. 그리고는 작은 번개 모양의 표식이 떠올랐다.
전원 버튼을 누르자 S전자 로고가 밝은 자태를 뽐내며 나왔고, 드디어 부팅이 되었다.
희성은 그제야 숨을 내쉬었고, 다온도 어깨를 내렸다. 장영실은 담담하게 손을 털었다.
[AI 바름이] : 전력 공급 감지. 번역 기능 복구 중… 5%까지 충전을 더 해주세요.
이도는 그 불빛을 오래 바라보다가 말했다.
“물이… 불을 만들었구나.”
“희성아, 저 상자 안에 비서 이름이 바름이라 하였느냐?”
“예, 전하. 바름이가 맞사옵니다.”
“어찌 바름이라 지었느냐?”
“제가 미래에서 전하가 만드신 훈민정음을 연구하다가 만들었는데,
정음(正音)의 단어를 차용하여 순 우리말로 ‘바름’이라는 뜻으로 지었나이다.”
이도는 그 설명을 듣자마자 눈에 작은 물방울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장영실이 엎드렸다.
“전하의 허락 덕분에 불의 기운을 만들 수 있었사옵니다.”
이도는 고개를 저었다.
“허락이 아니다.”
잠시 멈춘 뒤 말했다.
“결단이다.”
물레방아는 계속 돌았다. 조선의 물과 조선의 바람이 바름이를 포함한 미래인의 숨을 붙잡고 있었다.
희성은 상자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숨을 골랐다. 살아남았다는 안도보다, 이제부터 더 많은 업무가 시작된다는 불길하지만 즐거운 예감이 먼저 들었다.
아마도 그 밤의 불빛은 누군가의 눈과 귀에 이미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궁에서 소문은 늘, 물보다 빨랐으니까.
충전을 마치고 배터리 완충까지 마무리하고 처소로 복귀하는 희성과 다온은 한결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리고 좀 더 가까워진 듯한 서로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손을 잡으며 걸었다.
“오라버니, 오늘도 한 건 하셨네요. 호호.”
“다온이가 없었다면 할 수 있었을까? 하하.”
“바름이의 생존으로 이제 더 바빠지실 것입니다. 각오 단단히 하셔야겠습니다.”
희성은 말없이 휴대폰을 켜고 플레이리스트에 있는 노래를 재생하기 시작했다.
윤도현 ‘사랑 Two’가 은은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마주치기 시작했고, 다온의 얼굴은 밤이라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오늘 만든 전기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을 것이다.
처소에 도착한 둘은 앞으로의 일을 상상하지도 못한 채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