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4화. 드러난 가지와 숨겨진 가시

기술의 공개, 끝없는 사술 논란

by 유블리안



물길 쪽에서 북소리가 났다. 의도한 소란이었다.

숨기는 대신 ‘들리게’ 하는 선택.

강녕전 앞마당으로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물레방아로 꺾였다.


어젯밤 물 위에 스쳤던 빛은 소문이 되었고,

소문은 오늘 아침 ‘구경거리’가 되어 돌아왔다.

소문이 커질수록, 진실은 더 작은 목소리로 밀려난다.

그래서 이도는, 진실을 크게 만들기로 했다.


“주상 전하 납시오—!”


호위무사가 길을 열었다.

이도는 한 치도 흔들리지 않는 걸음으로 들어섰다.

용포 자락이 바람을 끌고 지나가자 웅성거림이

반 박자 늦게 죽었다.


장영실은 물레방아 앞에 엎드려 있었고,

성삼문은 사람들 뒤편에서 붓과 종이를 들었다.

다온은 희성의 옆에 붙어 서서 숨을 한 번 고르고,

희성이 든 작은 상자를 슬쩍 가렸다.


바름이의 배터리는 아직도 불안했다.

오늘 실패하면, 소문은 ‘기술’이 아니라 ‘사술’이 된다.

이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본 사람은 본 대로 말하고, 못 본 사람은 소문으로 말한다.

과인은 오늘, ‘본 대로’만 남기겠다.”


짧고 단정한 말이 끝나자, 대신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기침을 했다.

허락인지 경계인지 모호한 소리.

이도는 그 모호함을 오래 두지 않았다.


“장영실. 진행하라.”


장영실이 일어나 물길을 열었다.

나무로 짠 틀과 쇠로 만든 축, 물의 흐름이 차례로 맞물렸다.


물길이 열리고, 물레방아가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바퀴의 물방울이 햇빛을 튕기며 흩어졌다.

그 순간, 희성의 손바닥에서 미세한 떨림이 올라왔다.

연결부를 통해 흐르는 ‘기운’이 살아 있는 것처럼.


지이잉.


희성이 숨을 삼켰다.

상자의 화면이 한 번 꺼질 듯 깜빡이더니,

작은 번개 표식이 떠올랐다.

아주 조심스러운, 그러나 분명한 빛.


누군가는 “번개냐?” 속삭였고, 누군가는 “등불이 아니네…”

라며 목을 길게 뺐다. 바로 그때, 화면 위에 짧은 문장이 떴다.


[AI 바름이] : 전력 공급 불안정. 유지 시간 7분.


희성의 목덜미가 싸늘해졌다.

다온이 그 표정을 읽고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괜찮다’는 말 대신, ‘같이 서 있다’는 힘.


말하지 않아도, 마음은 먼저 합을 맞췄다.

장영실에게 질문이 먼저 튀어나왔다.

사람은 빛보다 말이 빠르다.


“저것이… 무엇이옵니까? 불을 숨겨둔 것이옵니까?”

“어찌 궁 안에서 번개를 묶어두었단 말이오?”

“재료가 무얼 썼는지부터 밝히시오!”


말들이 한꺼번에 날아들었다.

이도는 손바닥을 들어 조용히 멈추게 했다.


“불이 아니다. 불은 타고, 저것은 흐른다.”


그 말은 설명이 아니었다.

‘정의’였다. 정의가 선명하면, 공포가 얇아진다.

성삼문이 바로 그 문장을 종이에 옮겼다.


“불은 타고, 기운은 흐른다.”


글자가 먼저 뿌리가 되었다.

장영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물레방아 축을 가리키며 말했다.


“물의 힘이 바퀴를 돌리고, 돌림이 쇠를 흔들고,

흔듦이 기운을 만듭니다. 그 기운이 모이면 상자가 숨을 쉽니다.”


말은 투박했지만, 손은 정확했다.

기술자의 언어는 늘 ‘과정’을 배신하지 않는다.

그때, 반대의 기색이 얼굴로 먼저 드러난 이가 있었다.

익숙한 한자와 운서의 세계에서 살던 관리였다.


“전하, 백성들이 저걸 보면 겁을 낼 것이옵니다.

겁은 곧 소요가 되고…”


이도는 그 말을 차갑게 잘랐다.


“겁은 숨김에서 자란다.”


그 한마디가 칼처럼 떨어졌다.

다온은 입을 달싹였으나, 이내 다물었다. 희성의 눈빛이 이미 이도의 뜻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도는 오늘 ‘설득’이 아니라 ‘선도’를 택했다.


속도를 올리는 방법은 간단했다.

머리를 설득하려 하지 말고, 눈을 먼저 설득하는 것.

예상치 못한 변수는 늘 사람 쪽에서 생긴다.


반대하던 관리가 앞으로 나오며 자세히 보려 했다.

뭔가 믿지 못하겠다는 의심과 함께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었다.

하지만 장영실에 의해 제지당했다.


"더 가까이 오지 마시오! 위험하오."

"위험하다? 하, 기계도 괴이하더니 사람도 괴이하군. 듣자 하니 저자가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해괴한 의술을 행하였다더이다! 기계나 의술이나, 모두 요사스러운 사술이 아니고 무엇이오!"


그는 희성을 지목했다.

희성 덕에 목숨을 구한 관리가 감사의 말을 전하려던 것이 이상한 방향으로 소문이 퍼져 와전이 되고 반대파의 귀에까지 들어간 것이었다.


"전하! 저자는 조선의 근간을 흔드는 불법 행위를 서슴지 않았나이다. 이것이야말로 사술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즉시 의금부로 잡아들여 추국 하는 것이 맞다고 사료되옵니다!"


"이분이 아니었다면, 저는 목숨을 잃었을 것이옵니다. 방식은 일반적이지 않으나 눈빛만큼은 저를 살리려는 모습이고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황희가 한마디 거든다.


"이것이 사술이라면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죽게 만들어야 그 논리가 맞을 것이오. 사람을 살리기 위해 행동한 것이 어찌 사술이란 말인가!"


희성은 조용히 생각했다.


'무조건 반대를 위한 반대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군.'


이도는 그 장면을 오래 보았다. 결국 기술의 공개는 물레방아가 아니라, 사람을 향해 열리는 것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보았느냐. 기계는 말이 없고, 사람의 마음이 먼저 말한다.”


장영실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물길을 닫고, 바퀴를 멈췄다. 기계는 조용해졌지만,

사람들의 눈은 쉽게 돌아가지 않았다.

성삼문은 말없이 종이를 접었다. 오늘 적은 것은 원리가 아니었다.

누가, 언제, 무엇을 보았는지였다. 기록은 설명보다 먼저 남아야 했다.


희성은 바름이 화면을 껐다. 번개 표식이 사라지자, 오히려 주위가

또렷해졌다. 오늘은 더 보여줄 필요가 없었다.


이미 충분히 보였다.

다온은 아무 말 없이 희성의 곁에 섰다.

이제 통역은 필요 없었다.

이 자리에서 오간 말보다, 이도가 서 있던 방식이

더 많은 것을 전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각자의 발걸음은 같은 방향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집현전으로, 누군가는 병조로,

누군가는 상소문을 쓰러 갔다.


이도는 그 등을 바라보았다.


오늘 결단을 말로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다가올 내일의 소란이 이미, 결단을 증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속실로 모인 5인은 오늘 있었던 일과 관련한 회의를 진행했다.

부속실 문이 닫히는 소리 뒤로, 복도 끝에서 짧은 발소리가 스쳤다.

누군가가 일부러 천천히 지나가며 ‘듣지 않은 척’ 듣고 있었다.


궁의 소문은 늘 물보다 빨랐다. 오늘은 물이 불을 만들었고, 내일은 말이 칼을 만들 것이다. 이도 역시 그 모든 상황을 꿰뚫고 있었다.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낀 그는 잠시 시선을 문 쪽으로 옮겼다.


성삼문은 종이를 한 장 더 꺼내 적기 시작했다. ‘기운을 얻는 법’이 아니라, ‘기운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는 법’을. 장영실은 손바닥을 펴 보이며 말했다.


“전하, 궐 내에서 희성에 대한 소문이 심상치가 않사옵니다. 이방인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이도는 그의 말을 막아섰다.


"의심보다 진심을 받아들이는 관리들이 많았고 의심하는 관리들도 과인이 짊어지고 가야 할 숙제다. 괘념치 말라. 계획된 일은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다들 흔들리지 말고 노력해달라."


그날 밤, 희성은 처소로 돌아와도 잠이 오지 않았다. 스마트폰 화면에는 아직 절반의 배터리 표식이 남아 있었고, 남은 시간은 늘 ‘다음’으로 밀려났다. 다온은 문밖에서 한참 서 있다가, 낮게 말했다.


“오라버니… 오늘 전하께서 보신 것은 기계가 아니라 오라버니의 진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희성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조선의 바람이 창호를 스치듯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진심을 다해서 대하면 모든 사람들이 알아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반대를 위한 반대가 너무 심하다."


"진심은 언젠간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전하도 그러셨고, 저도 그래서 오라버니를 좋..."


다온은 제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놀라 입술을 깨물었다. 얼굴이 순식간에 잘 익은 홍시처럼 달아올랐다.


"뭐? 나를 좋아한다고?"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날이 차서 말이 헛나온 겁니다!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다온이 뜀박질하듯 앞서 걸어갔다. 희성의 입가에 실없는 미소가 번졌다. 미래에서 과거로 온 두 남녀 사이,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2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