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칼보다 날카로운 날 새로운 바람이 분다
강풍이 지나간 들녘엔 늘 먼지가 남는다.
이도의 명으로 시작된 ‘언문 회의’는 마치 먼지 쌓인 장막을 걷는
일처럼, 조선의 기득권 세력들을 자극하는 일이었다.
그 장막 한가운데에 사람들이 모였다.
좌우에 상좌를 두른 관리들이 줄지어 앉고, 집현전 학사들 사이엔
눈에 띄게 젊은 얼굴들도 섞여 있었다.
희성은 그 뒤편에 조용히 앉아 다온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으나, 숨은 날 서 있었다.
바람 없이도 칼날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과인이 물으리라.”
이도가 자리에 앉지 않은 채 정면을 바라봤다.
그 목소리는 크게 높지 않았으나, 단단하게 조율된 북소리처럼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이 글자를, 백성에게 가르치는 일이 마땅치 않다고 말한 자, 나와서 말하라.”
정적. 잠시 뒤, 사방을 둘러보던 한 인물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반듯한 이마, 나이보다 곧은 눈빛, 그리고 옷깃의 주름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 그가 입을 열었다.
“신, 예문관 제학 최만리, 감히 전하께 아뢰옵니다.”
다온의 손끝이 희성의 소매를 조심스레 잡았다.
희성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중얼거렸다.
“저 사람이야. 제일 먼저 반대한 자.”
“왜 반대하는 걸까요?”
“모두가 아는 것 같은데, 아무도 말은 안 하지.”
희성은 조용히 바름이의 화면을 꺼두었다.
오늘은 말보다 ‘얼굴을 읽는 날’이었다.
최만리가 한 걸음 나서며 낭랑히 말했다.
“전하, 신이 보기엔, 이 글자는 조선의 근간을 해치는 언문이옵니다.
신의 무례함이 아니라, 조정을 향한 충심이옵니다.
상놈들은 글자를 배우면 아니되옵니다.
모든 말은 중국에서 오는 말로 통일해야 합니다.
언문을 쓰게 되면 사대부의 권위가 사라지게 되옵니다.”
그 말의 끝에서, 조선이라는 이름이 한 번 접혔다.
이도는 미간을 좁히지 않았으나, 눈을 반쯤 감았다.
풍랑은 일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말이 칼보다 날카로운 싸움이 시작될 터였다.
최만리의 말이 끝나자, 좌우에 앉은 몇몇 노학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에는 글을 아는 자로서의 자부심과, 그 자부심이 흔들릴까 두려워하는
그림자가 동시에 서려 있었다.
“상놈들이 글자를 배우면 안 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사옵니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질서가 무너지옵니다.
가르침은 신중해야 하고, 알 권리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옵니다.”
그 순간, 희성의 속이 살짝 울렁였다.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알 권리
그 말은 그가 익숙히 듣던, 그리하여 너무도 오래된 말이었다.
그 말 뒤에는 언제나 ‘너는 아직 그럴 자격이 없어’라는 침묵이 따라붙었다.
“무지는 곧 순종이라 여겼느냐.”
이도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천천히, 그러나 누구보다 선명한 눈빛으로 최만리를 바라보았다.
목소리는 낮지만,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단호했다.
“글자를 가르치는 것이 무서운가. 무지로 다스리는 것이 더 쉽다고 믿는가.
과인은 다르게 본다. 백성은 알기를 원한다. 배우기를 바라는 눈빛을,
나는 너무도 많이 보았다.”
“전하, 그렇다면 중국이 저희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떻게 되겠나이까?
오랑캐처럼 업신여겨지지 않겠사옵니까?”
“최만리 그대는 조선사람인가, 중국사람인가?
어찌 조선의 임금인 나를 업신여기는 듯한 발언을 한단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반역 아닌가 말이야.”
잠시 공기가 떨렸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뒷목에서 사라진 숨처럼 끊겼다.
다온은 손끝으로 무릎 위를 누르며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말은 전쟁처럼 오가고 있었고, 그녀는 그 전장의 이면을 읽고 있었다.
‘백성은 순한 것이 아니라, 오래 참아왔을 뿐이다.’
그녀는 희성에게서 배운 말 하나를 떠올렸다.
그리고 지금, 그 말이 '이도'라는 왕의 입에서도 흐르고 있었다.
긴장이 팽팽하게 가라앉은 그 순간, 조용히 뒤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천천히 일어섰다.
회색 도포, 젊은 얼굴, 그리고 땀에 젖은 손바닥을 감추려 손을 뒤로 모은 자세.
“신, 집현전 부교리 이선제. 아룁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는 상좌에 선 이도에게 예를 갖춘 뒤,
담담히 말을 이었다.
“전하. 신은 이 글자가 백성을 해롭게 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옵니다.
오히려, 말이 글로 묶이지 못했기에 생긴 억울함을 풀게 할 수도 있으리라
여깁니다. 실록을 기록할 때에도, 백성의 말은 언제나 다른 자의 손에서
해석되어 남겨졌사옵니다.”
그 말에 장내가 술렁였다. 이선제는 잠시 숨을 고르며 조심스레 덧붙였다.
“백성의 말이, 백성의 글이 된다면… 우리가 보지 못한 조선의 절반을
비로소 읽게 되는 셈이옵니다.”
희성은 무릎 위에서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
그 말은 마치 누군가, 쓴 듯한 문장이었다.
조선의 절반, 읽히지 않던 이름들.
다온이 속삭였다.
“방금 말, 혹시…”
“응. 내가 준 노트야. 번역해 달라고 부탁했거든.”
그는 바름이 속 현대어 문장의 조각들을 떠올렸다.
밤마다 조심스레 옮겨 적은 그 문장들.
이도는 아직 말이 없었다. 그의 눈이, 생각의 물줄기를 따라 천천히
이선제에게 닿아 있었다.
그때, 조용히 앉아 있던 젊은 학사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빛이 덜 마른 듯한 관복, 그러나 그 눈은 오래 불태워진 듯 차분하고 깊었다.
“신, 집현전 부수찬 박팽년이옵니다.”
그는 최만리를 향해 몸을 낮춘 뒤, 바로 이도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전하, 배움의 문턱을 높이면, 사대부는 안에서 썩사옵니다.
하지만 문을 열면, 백성은 밖에서 꽃 피우옵니다.”
조용한 말이었으나, 방 안은 다시 소란해졌다.
젊은 학자의 말로 분노한 노학자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그리고 회의장은 곧 아수라장이 되었다.
박팽년의 말에 격분한 어느 대신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이게 다 집현전이 문제요! 학사들이 전하 곁에서 간언은커녕 어리석은 백성들
편을 들고 있지 않소이까!”
또 다른 인물도 덧붙였다.
“이건 신분의 붕괴요! 조선이 조선이 아니게 될 것이외다!”
격앙된 말들이 얽히고, 숨들이 가빠졌다.
이도는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으나, 그의 눈빛은 서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조용히 한마디를 던졌다.
“글자를 반포하는 날, 너희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좋다.”
순간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은… 백성의 눈앞에서 무엇을 말했는지,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그 말은 경고이자 선언이었다.
이도는 희성과 다온을 향해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더는 밀실에서의 논의가 아니었다.
이제 글자는 백성을 향한 작은 문이 될 것이다.
그 순간, 희성의 손끝에서 바름이 화면이 조용히 켜졌다.
그가 눌렀던 건 번역기능도, 녹음도 아니었다.
“카메라.”
다온이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기록해 두려고. 어떤 인간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다온이 웃음을 꾹 참았다.
“역시, 오라버니 당신은 미래에서 온 이방인이군요.
나는 10년 차 조선사람이죠. 지금은. ”
희성이 눈을 반짝이며 속삭였다.
“나도 조선사람이야. 복장만 보면.”
이때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또 들려온다.
희성이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도대체 누구지? 왜 자꾸 내 뒤를 캐는 걸까…”
아직 끝나지 않은 지루한 토론에, 낯선 자의 발자국 소리.
희성의 신경은 곤두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참다못한 희성이 한마디 거든다.
“제가 한마디 드려도 되겠습니까?
글자를 배우면 위아래가 없어진다고 하셨습니까, 최만리 대감!
대감께서 집현전 학자라는 게 부끄럽습니다.
전하의 뜻을 따라 연구에 매진해야 할 분께서 탐관오리들이나
하는 행동을 하시니 말이옵니다.”
회의장은 숨소리조차 얼어붙었다.
‘저 사람은 누군데 끼어들어?’
그런 눈빛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미래인과 조선인 사이,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러나 희성은 주눅 들지 않았다.
최만리와 노학자들은 젊은 학자들을 무시하는 말들을 쏟아냈지만,
그들은 하나를 망각하고 있었다.
이제, 조선의 바람은 바뀌고 있었다.
희성, 다온, 그리고 이도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나누었다.
아무도 알지 못한 바람의 방향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