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16화. 나랏말이, 나랏글이 되는 시간

훈민정음을 만든 세종대왕의 깊은 뜻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by 유블리안
훈민정음 서문


바람은 더 이상 머무르지 않았다.

그것은 흘렀고, 멈추지 않았다.

마치 조선이라는 나라가, 오래도록 눌려 있던

무언가를 서서히 떨쳐내는 듯했다.


세월은 1년을 훌쩍 넘어 다시 가을.

잎은 붉게 물들었고, 한낮 볕은 맑았으나,

아침저녁으로 옷깃을 여미게 되는 바람이 궁궐을 스쳤다.

그동안 조정은 겉으론 평온했다.


하지만 그 속은 달랐다.

집현전의 등불은 자정을 넘겨서도 꺼지지 않았고,

젊은 학사들은 낮밤을 가리지 않고 말을 모아 글자를 다듬었다.

밤마다 문득문득, 이도는 홀로 문집을 뒤적이다 창밖을 바라보곤 했다.


그의 눈은 먼 곳을 향해 있었으나,

그 시선의 끝엔 늘 백성들의 얼굴이 있었다.

땀을 훔치던 손등, 어눌한 듯한 말소리, 그리고

다온의 가르침에 떨리고 두려워하던 눈동자들.


“지금 이 순간에도, 저들은 자신의 말을 글로 담지 못한 채 잠들고 있겠지…”


이도는 읊조리듯 말했다.


그의 옆에는 이선제, 성삼문, 박팽년, 그리고 조용히 희성과 다온도 있었다.

다온은 희성의 노트를 손에 들고 있었다.

벌써 몇 권째였다.

거기엔 현대의 문장과 조선의 말이 나란히 적혀 있었고,

그 안에서 언어는 시대를 넘어 서로를 해석하고 있었다.


“전하,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이선제가 고개를 들어 말했다.


“모든 글자의 모양과 소리, 뜻과 쓰임이 정리되었사옵니다.

백성에게 전하실 순간이옵니다.”


이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시작하자.

나랏말이, 나랏글이 되는 시간.”


그러나 그 순간, 대궐 깊은 곳에서 뜻밖의 보고가 날아들었다.


“최만리 대감이, 병중이던 몸을 이끌고, 전하의 부름에 응하여

궐 안으로 들어왔사옵니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이도로 향했다.

그의 눈빛은 조용히 바뀌었다.


“그를 이 자리로 들라.

반포의 날, 그도 마땅히 지켜보아야 할 것이 있다.”


한때 임금의 뜻을 거스르고 반역을 꾀하려는 듯한 행동을 보였던 자.

그러나 학문을 위한 그의 진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이도에게,

최만리는 여전히 아픈 손가락이었다.



창밖엔 가을비가 가늘게 내리고 있었다.

서고 옆 작은 편전.

불빛은 낮게 깔렸고, 사람은 둘 뿐이었다.

최만리는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곧장 허리를 굽혔다.


그의 얼굴은 병색이 짙었으나, 눈빛만큼은 흔들림이 없었다.


“전하, 신의 지난 언사가… 신중치 못했음을 압니다.”


이도는 그 말에 곧장 응답하지 않았다.


다만 손에 들고 있던 훈민정음해례 초간본을 탁자에 조용히 내려두며 물었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는가?”


최만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 눈동자에는 옹고집이 아니라, 일생을 학문에 바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맹렬한 자부심이 있었다.


“변하지 않았습니다. 허나… 이제는 알겠습니다.

이 글자가 전하의 뜻을 넘어, 이미 백성의 입술에 닿고 있다는 것을.”


이도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의 음성은 바람처럼 낮고,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대는 글이 무서운가, 아니면 백성이 아는 것이 두려운가?”


최만리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고요가 흘렀고, 촛불이 작게 흔들렸다.

세종은 한 발 다가서며 말했다.


“나는 백성이 나를 믿게 하고 싶소.

두려움이 아니라, 이해로 나라를 세우고 싶소.”


한참의 침묵 끝에, 최만리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부디… 신의 어리석음을 너그러이 여겨주시옵소서.”


세종은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다만 한 줄의 문장을 책갈피처럼 꺼내 말했다.


“이 글자는 그대가 지킨 조선을 더 오래 지킬 것이오.”



경복궁 수정전 앞.

그날은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조회가 열렸다.

하늘은 청명했고, 바람은 서늘했으며,

왕이 직접 백성에게 무언가를 ‘선포’하는 자리에

관료들은 모두 정복을 갖춰 입고 서 있었다.


희성은 맨 뒷줄에 서 있었다.

다온은 그 옆에서 조용히 손을 모으고 있었다.

그들 앞에는 수십 명의 백성들이 있었다.

과전에서 초청된 자들도, 골목 어귀에서 살아온 평민들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도가 걸어 나왔다.

그는 아무 의전도 없이, 아무 말도 없이,

손에 얇은 책자 하나를 들고 섰다.

그 표지는 누렇게 엷었고,

거기엔 단 네 글자가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訓民正音》


“이 글은, 내가 직접 지었고,

집현전 학사들이 마음을 다해 다듬었다.”


이도의 음성은 조용했지만, 낱말마다 울림이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머릿속에서 수천 번 되뇌었던 문장을

이제야 세상에 내보내는 듯한 목소리.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여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나

제 뜻을 펴지 못할 일이 많으니…”


그가 첫 문장을 읽을 때,

희성은 가슴속 어딘가가 조용히 떨리는 걸 느꼈다.

그건 다온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이 글이, 우리가 지켜본 시간들의 결실이구나.’


이도는 문장의 한 줄, 한 단락마다 잠시 침묵을 두었다.

그 침묵은 백성의 숨과 어우러졌고,

그 호흡은 이 글자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 글자는 오로지 백성을 위함이다.”


그 한마디 뒤, 수정전 앞은 마치 들판 같았다.

들숨과 날숨, 감정과 감정,

그 모든 것들이 바람처럼, 문장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회의가 끝난 뒤, 밤은 조용히 궁궐을 감쌌다.

등불 몇 개만이 남아, 1년 전 그날의 격론을 말없이 되새기고 있었다.

이도는 어전에서 내려와, 작은 정자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다온과 희성이 조용히 따랐다.


정자의 처마 밑에 멈춰 선 이도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한 줄기 바람이 붉게 물든 단풍 사이로 스쳤고,

그 바람 속에선 오래된 목소리들이 들려오는 듯했다.


“그대들은,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 말은 명령도, 물음도 아닌 독백에 가까운 속마음이었다.

희성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글자를 만드신 건…

백성들이 너무 오래 눈을 감은 채 살아왔기 때문이겠지요.”


이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고도 말할 수 없는 자보다, 말하고 싶어도 글이 없는 자가 더 안타까웠다.

나는 그들에게, 단지 한 권의 책을 주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한 줄의 편지, 한 장의 문서,

심지어 자신이 누구인지—직접 쓸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다온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희성 역시 고개를 떨군 채, 바름이를 가볍게 손에 쥐었다.


“그 문은, 누구나 열 수 있어야 하옵니다.”


다온의 말에 이도가 다시금 그들을 바라봤다.


“세상은 늘 높은 문을 만들었지.

문을 가진 자들이 세상을 다스린다 여겼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 문은 낮아질 것이다.”


그 말 끝에 정적이 흘렀고,

바로 그때 희성이 물었다.


“전하.

그렇다면 왜,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하셨습니까?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 그 말엔 담긴 뜻이 너무도 무겁습니다.”


이도가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가볍지 않았다.


“글은 소리로 시작되고,

그 소리는 곧 마음에서 비롯된다.

나는 백성들의 마음이, 왜곡되지 않은 채 전해지길 바랐다.

그것이 곧, 바른 소리다.”


희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말했다.


“그 말은 마치…

우리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와도 닿아 있네요.”


이도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한 사람은 과거에서 미래를 꿈꾸었고,

한 사람은 미래에서 과거를 이해하고 있었다.



[2015년 국립중앙 박물관]


유리는 차가웠다.

그 너머에 있는 건, 오래전 종이 위에 새겨진 검은 먹의 흔적.

훈민정음해례본.

누군가의 손이 천천히 유리 앞에 멈췄다.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눈은 반짝였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속삭였다.


“이 글자가 처음 나왔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 물음은 박물관의 적막을 조용히 흔들었다.

어디선가, 아주 멀리서 바람 한 줄기가 불어오는 듯했다.


[다시, 1446년 조선]


서늘한 바람이 스친 어느 가을날, 집현전 앞마당.

희성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중얼거렸다.


“다온아, 나는 그 기분, 엄청 잘 알아.”

"오라버니,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저에게는 위로가 되는지 몰라요."


바름이의 화면이 조용히 켜지고, 그 빛이 희성의 눈동자에 깃들었다.


[2025년으로 돌아가는 기회의 문이 열렸습니다. 미션을 수행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