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성의 뒤를 쫓는 남성의 정체, 이도의 큰 결단
해는 지고 있었다.
노을은 단풍잎 위에 금빛 바람처럼 흩어졌고, 집현전 뒤뜰에선 매미 대신 풀벌레 소리가 울었다.
희성은 손에 든 바름이를 조심스레 켰다.
바름이는 이내 낮은 진동음을 내며 화면을 밝혔다.
그리고 그 위엔 한 줄의 문장이 떠올랐다.
[귀환 가능 조건: 진심 어린 소통으로 감동을 완성하시오.]
[미션 상세: ‘통역 기능’을 끄고, 조선의 인물과 진정한 교감을 이루십시오.]
[보조 장비 사용 가능 항목: 스마트폰, 노트, 휴대용 손풍기, 사진첩, 소형 거울, 손수건, 태양광 배터리]
희성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이건 단순한 미션이 아니었다.
‘마음을 전하라’는 명령이었다.
“통역 없이, 감동시키라고…?”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이자, 옆에 있던 다온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 아니야. 그냥 혼잣말.”
희성은 슬쩍 다온을 바라봤다.
사실 가장 먼저 감동시켜야 할 사람은 그녀일지도 몰랐다.
그녀에게 자신이 품고 있는 감정을, 기술도 아닌 언어도 아닌—‘마음’으로만 전해야 한다면.
바름이의 화면은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문구가 조용히 추가되었다.
[본 미션은 회피할 수 없습니다.]
희성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래. 도망은 안 해.”
그는 스마트폰의 사진첩을 열었다.
거기엔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직장 동료들과의 회식, 야근 후 편의점 앞에서 찍은 셀카,
그리고 무엇보다… 다온과 함께 웃고 있는 조선의 풍경이 담긴 사진들이 있었다.
그 모든 기억들이, 이곳과 저곳을 잇는 다리가 되어줄지도 몰랐다.
그 순간, 바름이가 다시 진동하며 짧은 메시지를 띄웠다.
[1단계 권고 대상: 성삼문, 정약용, 혹은… ‘가장 먼저 전해야 할 그 사람’]
희성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바람이 스쳤고, 그 바람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듯했다.
다온.
정자 주변, 이파리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희성은 손끝으로 수첩을 넘기고 있었다.
거기엔 다온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연필심이 눌린 자국이 여러 번 덧나 있었고, 몇 번을 쓰고 지운 흔적이 묻어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왜 그땐 말하지 못했을까."
바로 그때, 조심스레 발소리가 들렸다.
다온이었다.
그녀는 희성 옆에 조용히 앉으며 말했다.
“무슨 생각하고 계셨어요?”
희성은 수첩을 덮었다.
“생각보다, 네 생각.”
다온은 작게 웃었다.
“나는 오라버니 생각 안 한 줄 아세요?”
바람이 불었다.
이 말이 그들에게 얼마나 긴 시간이었는지
그저 둘은 침묵을 잠시 함께 했다.
그러다 희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온아. 우린… 언젠가 돌아가야 하잖아.”
“네 엄마 아빠도… 결국 저를 찾으실테고.”
다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근데…”
그녀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마음을 정리하려면, 먼저 알아야 해요.
그게 진짜였는지, 아니면… 그냥 동지애 같은 거였는지.”
희성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한 박자 쉬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너 좋아해.
그냥 함께 연구하고, 밤에 대화 나누고, 걷는 게 좋아서가 아니야.
너라는 사람 자체가… 좋았어.”
다온의 입꼬리가 떨렸다.
한참 말이 없던 그녀는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도요. 오라버니가 그날, 맨 처음 집현전에 발 들이던 날부터
자꾸 마음이 흔들렸어요.”
그녀는 손끝으로 치마를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다만 겁났어요. 돌아가는 게 정해진 사람에게
이런 마음을 품는 게, 얼마나 허무할지.”
희성은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근데 우리는 같이 갈 수 있어.
갈 수만 있다면, 널 두고 가지 않을 거야.”
다온은 고개를 떨구었다가, 이윽고 작게 속삭였다.
“…그 말, 믿어볼래요.”
그 순간, 멀리서 은은한 종소리가 울렸다.
그들이 조선에서 함께한 시간이
이제 막 끝을 향해 흐르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소리 같았다.
가을비가 뿌리듯 지나간 저녁,
희성은 혼자서 서고 앞에 앉아 있었다.
조선의 바람, 그리고 훈민정음 반포 이후의 정적이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무언가를 남겨놓고 있었다.
“누가 날… 따라다니고 있단 말인가.”
그 감각은 이틀 전부터 시작되었다.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지만,
바름이는 지속적으로 누군가의 흔적을 감지했다.
그가 집현전 뒷길을 돌아서려던 찰나—
정적 속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희성은 뒤를 돌아섰다.
그 자리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초췌한 옷차림, 헝클어진 머리에 대충 걸쳐놓은 모자까지,
하지만 두 눈은 깊은 무언가를 품고 있었다.
“혹시… 당신이 2025년에 오신 분이 맞습니까?”
그 목소리는 쉰 듯했고,
그러나 그의 말은 정확히 2025년 서울사람과 일치했다.
“누구시죠?”
“… 나는 딸을 찾아 광화문에 갔다가 같이 여기로 온 사람입니다.”
한순간, 희성의 눈이 흔들렸다.
그 남자는 말없이 안주머니에 보관 중이던 전단지를 보여 주었다.
거기엔 어린아이의 모습이 정확히 찍혀 있었다.
"이 아이는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그리고 희성의 머릿속에 희미했던 기억 하나가 번개처럼 떠올랐다.
“그날… 술 취해 있었을 때…”
“그렇습니다. 전단지를 나눠주는 순간, 세종대왕 동상 아래 같이 쓰려졌었지. 그나저나 우리 다온이를 본 적이 있습니까?
"강다온?"
다시 한번 전단지를 본 희성은 놀란 눈으로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강다온의 아버지란 말씀입니까?"
"우리 딸을 안단말입니까?"
그때 다온이 희성에게 달려왔다.
"오라버니! 어? 이분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남성이 익숙한 다온의 얼굴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다온아! 아빠다. 네가 어찌 여기에 있느냐? 10년 동안 얼마나 찾아다녔는데."
"아빠? 진짜.. 아빠 맞아요?"
어린 나이에 헤어졌고 아버지의 현재 모습이 남루하고 야위어서 잠시동안 못 알아봤지만 금세 옛 기억을 떠올렸다.
그 장면을 멀리서 지켜보던 한 남자가 서서히 다가왔다.
검은 갓, 깊은 눈매.
강진묵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다온의 아버지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 그대는 뉘시오? 어찌 나의 딸과 같이 있단 말이오?”
"딸이라고요? 제가 다온이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
"아버지, 10년 전에 이곳에 떨어졌을 때 저를 거두어주신 집현전 부제학 강진묵 대감님이십니다."
"뭐? 강 진묵 대감님? 혹시 진주 강 씨 맞으십니까? 저는 진주 강 씨 강 선욱입니다. "
"맞소 내가 진주 강 씨 강 진묵이오."
다온의 눈이 커졌다.
“그럼… 양아버님이 저의 조상님이라는 것입니까…?”
“운명의 장난일지 모르지만…
조선에서 이렇게 후손을 만나다니, 기이하오.”
다온은 친 아버지를 찾았다는 기쁨과 양아버지가 조상이라는 사실에 다온은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한편으로 기뻤다.
희성은 장영실과 성삼문을 찾아 한자리에 모였다.
그간의 고마움과 고생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소주를 대접하기 위함이다.
"대감. 이것은 제가 살던 곳에서 아주 유명한 소주라는 것이옵니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마시는 술이지요. 그래서 두 대감님들과 함께 마시려고 왔습니다."
두 사람은 처음 보는 유리병에 '까각' 하는 듣도보도 못한 뚜껑 따는 소리에 놀랐다.
"대감들과의 조선 생활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옵니다. 혹시 대감님들은 저를 잊으실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어허. 내가 어찌 네놈 같은 괴짜를 잊을 수가 있겠느냐. 전하와 대화할 때도 눈하나 깜짝 안 하는 네놈 말이다.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술이 한잔, 두 잔 들어가며 취기가 오른 세명은 점점 마음속의 대화를 하며 두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미래 세계에는 나이가 많으면 형(兄). 나이가 어리면 동생이라 하옵니다. 저는 후대 사람이니 두 분께 형이라 부르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동생이라. 부르기 좋은 이름이로다. 희성 동생."
감격의 눈물이 뚝뚝 떨어지자 희성은 컨디션 음료와 함께 백팩 안에 들어있던 손수건으로 둘의 눈가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그 순간,
[미션 완료. 귀환 준비]
바름이의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다음날 이도와 작별의 순간이 왔다.
"전하 저는 이제 제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사옵니다. 이곳에서의 추억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옵니다."
"돌아갈 방법이 있다면 가야지. 다온이도 같이 간다지? 다온이 부친도 여기까지 따라왔다 들었다. 허허 아비의 마음이 느껴지는구나."
돌아갈 준비를 마친 희성과 다온 부녀는 이도 앞에 마지막 작별인사를 준비했고 장영실과 성삼문은 배웅인사를 하러 나왔다.
희성은 조심스레 이도에게 청을 하기 시작했다.
"전하 괜찮으시다면 장영실, 성삼문 대감을 같이 데리고 가고 싶사옵니다."
"두 사람을 같이?"
"잠시 그 시대를 구경시켜 드리고 다시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요구에 당황한 이도는 두 사람에게 의견을 물었다.
"잠시나마 갔다 오는 거라면 다녀올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옵소서. 그 시대의 언어와 생활 풍습을 잘 보고 오겠나이다."
“그대들 안에 담긴 신지식이 조선을 뛰어넘어 먼 시대까지 연결되길 바라노라”
[복귀 준비 완료! 즉시 귀환 합니다.]
희성은 처음 술 취했을 때의 기분으로 조선의 땅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