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18화. 광화문의 이방인들

오백 년을 건너온 큰절, 그리고 10년 만의 집밥

by 유블리안



드디어 2025년. 희성, 다온, 성삼문, 장영실, 강선욱.
다섯 사람은 서울의 심장, 광화문 광장에 다시 섰다.

"이것이... 정녕 사람 사는 세상이란 말인가?"

낯설고도 눈부신 세상. 졸지에 600년을 건너뛴 장영실과 성삼문은 숨을 삼키듯 주위를 둘러봤다.

수많은 이들이 짧은 머리를 하고, 손에는 낯선 사기그릇 같은 반짝이는 물건을 든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것을 홀린 듯 들여다보며 걷는 모습은 흡사 도깨비에게 홀리거나, 단체로 주문에 걸린 사람들 같았다.

게다가 머리카락 색이 노랗고 붉은, 키가 장승만 한 외국인들이 무리를 지어 지나가는 풍경은 조선 선비들에게 이질적인 충격을 넘어 공포에 가까웠다.

"무어냐, 바름이가 손에 하나씩 다 있구나...? 사람들이 다 저것만 보고 걷는구나."

두 사람은 당황한 표정으로 허공을 향해 몇 번이나 손을 내저었다.
그때— 그들의 눈에 들어온 건, 광장 중앙에 우뚝 솟은 황금빛의 거대한 동상이었다.
그 아래엔 그토록 그리워하던 글씨가 선명히 박혀 있었다.

[세종대왕]

성삼문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입술을 달싹였다.

"전하의 용안... 분명... 분명 닮아 있소."

장영실은 동상 옆에 놓인 혼천의와 측우기를 보고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저것은 내가 밤을 새워 만든 물건이오. 저 칠정산의 배치를 보시오. 틀림없소... 전하시다."

그 순간,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차가운 보도블록 위에 무릎을 꿇고 넙죽 절을 올렸다.

대낮에 도포와 갓을 쓴 두 남자가 땅바닥에 엎드려 통곡하는 기이한 광경. 광장을 지나던 시민들의 시선이 일제히 꽂혔다. 누군가는 킬킬거리며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고, 누군가는 친구에게 속삭였다.

"야, 저거 봐. 영화 촬영인가 봐. 완전 리얼하다."

희성은 당황하여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는 황급히 두 사람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형님들, 일단... 일어나세요! 제발요! 여긴 그런 데가 아니에요! 다들 쳐다본다고요!"

겨우 두 사람을 진정시킨 희성은 다온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온아. 어머님께 먼저 인사를 드려야지. 집에 가서 같이 뵈어야지?"

다온은 10년 만에 밟는 서울 땅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했으나, 희성의 말에 다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다들, 우리 집으로 가요."


몇 분 후.
어느 아파트 현관문 앞. 다온아빠는 떨리는 손으로 도어록 비번을 눌렀다.

삑, 삑, 삑, 삑. 띠리릭—

거실은 10년 전 그 시간에 멈춰 있었다.

낡은 소파 위엔, 다온이 열 살 생일 때 선물한 곰돌이 쿠션이 주인을 기다리며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현관 너머로,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찾았다... 다온이... 이제 진짜 집에 왔구나..."

다온 엄마였다. 수척해진 얼굴의 그녀가 현관으로 달려 나와, 꿈에 그리던 남편과 딸을 와락 끌어안았다.

"엄마... 보고 싶었어. 흑흑..."
"다온아! 여보! 이게 꿈은 아니지? 정말 돌아온 거야?"

엄마는 딸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남편의 어깨를 확인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조선에서 겪었던 10년의 부모에 대한 그리움.

세 가족의 울음소리가 거실을 가득 메웠다.
그때, 등 뒤에서 눈치 없는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크흠. 천륜의 상봉에 끼어들기 민망하오나... 소인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것이오? 아니면..."

성삼문이었다. 여전히 도포 차림에 갓을 삐딱하게 쓴 채, 현관 턱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아이고, 정신이 없었네. 어서 들어오세요! 다온이 은인 분들을 문밖에 세워두다니."

강선욱은 눈물을 훔치고 반갑게 손님들을 안으로 들였다. 다온 엄마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여보, 우리 다온이... 그 험한 조선 땅에서 지켜주신 귀한 분들이야."

강선욱이 지갑을 찾으며 말했다.

"잠깐. 지갑 어딨어? 내가 얼른 나가서 삼겹살이라도 사 올게. 두껍게 썰어서!"

그러자 다온 엄마가 남편의 등짝을 찰싹 때리며 웃었다.

"삼겹살이라니? 다온이를 찾았는데, 삼겹살로 되겠어? 소고기 등심 사 와야지! 오늘은 당신 카드 긁어! 제대로 대접해야 해."


강 씨 부부가 고기를 사러 간 사이, 거실에 모인 다섯 사람은 TV 앞에 앉았다. 마침 뉴스에서는 한글날을 맞아 세종대왕의 업적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있었다.

"우리가 모신 전하께선 훗날 '세종(世宗)'이라 불리시고, 백성들에겐 '대왕(大王)'이라 칭해지셨습니다."
"'세종대왕'... 그리하여 글자를 만든 위대한 임금으로 영원히 기억되고 있지요."

성삼문은 TV 화면 속 근엄한 세종의 어진을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전하께서... 나오시는구려. 이렇게 백성들을 사랑하는 임금님을 오백 년 후의 세상에서 다시 뵙다니. 참으로 감회가 새롭고 송구할 따름이오."

"제가 뵈었던 전하는 정말 훌륭한 분이 맞죠. 다시 뵙고 싶네요."

다온은 지난 시간 동안 곁에서 지켜본 인간 이도, 세종대왕의 따뜻했던 모습을 이야기했다. 장영실과 성삼문은 놀라움과 감격이 섞인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슴 한켠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잠시 후, 강 씨 부부가 양손 가득 장을 봐서 돌아왔다.

"이것이... 소고기라는 것입니다. 조선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지글지글. 불판 위에서 고기가 익어가는 소리와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장영실과 성삼문은 신기한 표정으로 붉은 살점이 갈색으로 변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성삼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물우물... 이, 이 감칠맛은... 대체... 입안에서 녹아내리는구려!"
"이게 전통 된장이에요. 뭐, 저희 집에서 담근 건 아니고 마트표지만, 맛은 확실하죠!"

강 씨는 종이컵에 소주를 콸콸 따르며 말했다.
"자, 한잔 받으십시오. 양반이시든 역사책에 나오는 위인이든 간에, 제겐 그저 내 딸 다온이 살려준 고마운 분들이십니다."

"역사책이라? 그것이 무엇이오?"

"대감님들처럼 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 백성을 위해 헌신한 분들을 기록하여 후대에 알리는 서책입니다. 조선에는 서당이 있듯, 현대에는 학교라는 곳에서 아이들에게 두 분의 업적을 가르치고 있지요."

장영실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소주를 단숨에 털어 넣었다.

"캬아-! 이 술맛, 어디서 맛본 듯하오. 목 넘김이 아주 짜릿하구려."
"기억나십니까? 제가 마지막에 호형호제할 때 마시던 술입니다. 저음 여기에 떨어지던 날도. 그 술 덕에 다온이도 찾고, 전하의 용포도 만졌지요. 하마터면 역적으로 몰릴 뻔하다가 황희 정승께서 살려주셨지만요."

희성은 쓱 웃으며 장영실의 빈 잔을 다시 채웠다.


배가 부르고 술기운이 오르자 식사 분위기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때, 희성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백성을 향해 품었던 그 애틋한 마음... 저 역시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이가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희성에게 집중되었다. 다온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발그레해졌다. 희성은 다온의 손을 잡으며 강 씨 부부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버님, 어머님... 다온이를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서로의 마음은 이미 같고... 저는 가능한 한, 빠르게 합치고 싶습니다."

강선욱은 놀란 얼굴로 소주잔을 든 채 멈칫했다.

"자네, 또 과한 술이 들어갔구만... 우리 처음 만난 날도 인사불성이더니 또 헛소리를..."

그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려 했으나,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그때 다온 어머니가 남편의 팔을 툭 치며 조용히 웃었다.

"글쎄요, 여보. 이번엔 생각 좀 진지하게 해 보셔야겠어요. 우리 딸 목숨 걸고 찾아준 사람이잖아요. 관상도 저만하면 듬직하고."

역시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였던가. 그 말을 들은 장영실이 소고기를 입안 가득 넣으며 한술 더 거들었다.

"암, 그렇고말고! 내 조선에서부터 두 사람을 지켜봤는데,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아주 심상치 않았소. 꿀이 뚝뚝 떨어지더이다. 허허!"

와하하! 웃음이 터지고, 눈물과 행복이 피어나는 밤.
그날 저녁 식탁은 조선과 현재가 함께 둘러앉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밥상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밤이 깊었다. 희성은 장영실과 성삼문을 자신의 자취방으로 모시기로 했다. 다온이네 집은 좁기도 하거니와, 오붓한 가족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셋은 택시를 잡아탔다.

"우와아아! 이 가마는 왜 이리 속도가 빠른 것이냐! 창밖이 휙휙 지나가는구나!"

장영실이 창문에 코를 박고 소리쳤다. 성삼문은 손잡이를 꽉 잡은 채 사색이 되어 중얼거렸다.

"어떻게 사람이 끄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움직인단 말인가... 정신이 하나도 없구나..."

택시기사가 백미러로 힐끔거리며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두 사람을 이상하게 쳐다봤다. 그러더니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뭐야, 코스프레하고 술 마셨나? 말하는 게 왜 저래?"

희성은 기사님과 눈이 마주치자 멋쩍게 웃으며 둘러댔다.

"아, 하하... 외국인 관광객분들인데, 한국 사극 체험하고 술이 좀 과하게 취하셔서요. 신경 쓰지 마세요."

졸지에 '술 취한 외국인 관광객'이 된 두 이방인은 서로를 보며 껄껄 웃었다.

"희성 동생이 처음 조선 땅에 떨어졌을 때, 딱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허허."

드디어 희성의 자취방에 도착했다. 좁지만 아늑한 방이었다. 이불을 펴고 잘 준비를 하는데, 성삼문이 반짝이는 눈으로 희성을 불렀다.

"희성 동생, 아까 강 씨가 이야기했던 그 '역사책'이라는 거... 혹시 지금 볼 수 있나? 내 기록이 어찌 남았는지 궁금해서 잠이 안 올 것 같네만."

"형님, 날이 너무 늦었습니다. 500년을 건너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일단 주무시고, 날 밝으면 서점에 모시고 가겠습니다."

희성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닥에 머리를 댄 두 사람은 코를 골기 시작했다.

"드르렁~ 푸우~"
"크허억~ 컥!"
"허, 참. 빠르기도 하셔라."

희성은 이불을 덮어드리며 피식 웃었다.

"피곤하셨겠지. 시차 적응도 아니고 시대 적응을 해야 하니. 그나저나... 다온이가 벌써 보고 싶네."

진심은 언젠가는 통한다고 했던가. 같은 시각, 다온도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었다.

"오라버니는 잘 들어가셨나? 잠버릇 고약한 조선의 손님들 감당하실 수 있으려나."

과연 내일은 또 어떤 좌충우돌 에피소드가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 채 2025년 서울의 첫 밤이 깊어갔다. 두 사람의 우렁찬 코골이 소리와 함께.

이전 17화[3부] 17화. 귀환의 조건 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