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원칙이 시대를 보지 못할 때

훈민정음을 끝까지 반대한 원칙주의자, 최만리

by 유블리안

최만리는 청백리로 이름을 높인 인물입니다.


맑고 곧은 관리로 기억되지만, 동시에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서는 끝까지 반대의 뜻을 굽히지 않으며 부정적인 이름 또한 함께 남겼습니다. 그래서 최만리라는 인물은 한쪽 얼굴만으로는 쉽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청렴한 사람이었지만, 그 청렴함이 언제나 시대의 변화와 같은 방향을 향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조직 안에서도 바른 소리는 늘 필요합니다.


누군가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때 질문을 던져야 하고, 누군가는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원칙을 말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 바른 소리가 정말 더 나은 방향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익숙한 질서와 기존의 논리를 놓지 못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 구분하는 일입니다. 최만리는 바로 그 경계에 서 있던 인물입니다.


그는 분명 소신이 뚜렷한 사람이었습니다.


권력에 기대어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끝까지 붙드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그런 인물은 대개 존중받습니다. 실제로도 최만리는 청렴함과 강직함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소신이라는 것은 늘 아름답게만 남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 단단함이 시대를 읽지 못하게 만들고,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훈민정음 창제는 단순히 글자를 하나 만든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말과 지식, 그리고 기록의 권한이 소수에게서 더 넓은 사람들에게로 옮겨가는 일이었습니다. 세종이 새 문자를 만든 이유도, 백성들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최만리에게 그 변화는 반가운 혁신이라기보다, 오래 유지되어 온 질서를 흔드는 일로 보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어떤 사람에게 변화는 희망이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 변화는 불안입니다.
특히 기존의 질서 안에서 원칙과 체계를 중요하게 여겨온 사람일수록, 급격한 변화 앞에서 더 강하게 반응하기도 합니다. 최만리의 반대 역시 단순한 악의라기보다, 자신이 지켜야 한다고 믿은 기준과 세계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에서 나온 목소리였다고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최만리를 생각하면 늘 이런 질문이 따라옵니다.


바른말은 언제나 옳은 것인지,
반대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지만, 그 반대가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인지까지는 끝내 따져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질문 말입니다.
조직에서도 비슷한 장면은 자주 반복됩니다.


누군가는 원칙을 말합니다. 절차를 말하고, 전통을 말하고, 기존 방식의 안정성을 이야기합니다. 그 말들은 틀리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듣고 보면 꽤 논리적이고, 쉽게 반박하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말들이 늘 앞으로 가는 방향과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맞는 말이 변화를 가장 늦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최만리가 남긴 인상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는 틀린 말을 하는 사람이라기보다, 시대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청렴했고, 나름의 논리가 있었고, 스스로는 나라를 위한 충언이라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반대는 백성의 삶을 넓히는 길보다, 익숙한 체계와 기득의 언어를 붙드는 쪽에 서고 말았습니다.



이 대목에서 최만리는 단순한 악역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현실적인 인물입니다.
조직 안에서도 이런 사람은 늘 있기 때문입니다. 평판은 좋고, 생활은 반듯하고,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중요한 변화의 문 앞에서는 가장 먼저 반대편에 서는 사람. 그 반대가 사적인 욕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의 원칙과 확신에서 비롯되기에 더 설득력 있고 더 완고한 사람 말입니다.


그래서 최만리라는 이름은 불편합니다.
그를 완전히 나쁜 인물로 몰아붙이면 오히려 쉬워집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면 놓치는 것이 생깁니다. 한 사람의 청렴함과 바름이, 언제든 시대의 흐름과 어긋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늘 옳은 방향에 서는 것은 아니고, 깨끗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늘 더 넓은 미래를 보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그는 보여줍니다.


어쩌면 최만리는 이런 말을 남기는 인물인지도 모릅니다.
원칙은 사람을 빛나게도 하지만, 때로는 시대를 보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그리고 반대의 목소리 역시 필요하지만, 그 반대가 끝내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반드시 돌아봐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세종이 위대한 이유는 새 문자를 만들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반대와 저항을 알면서도 끝내 밀고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최만리가 오래 남는 이유는, 그 반대의 상징으로서 우리에게 여전히 묻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지키고 있는 것은 정말 원칙인가, 아니면 단지 익숙한 질서인가.
최만리는 시대를 읽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으로만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우리가 더 자주 만나게 되는 현실적인 얼굴로 남아 있습니다.


바른말을 하지만,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막아서는 사람.
그렇기에 최만리는 역사 속 한 인물이면서도, 오늘의 조직과 사회 안에서도 낯설지 않은 이름입니다.

최만리는 바른말을 했던 사람이지만, 그 바름이 끝내 시대의 방향과 만나는 데는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