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의 해소 그리고 싹트는 사랑
이도의 명이 내려진 지 이틀째 되는 날의 새벽이었다. 동이 트기 전의 푸른 어스름이 집현전 뒤뜰을 감쌌다. 뜰 한가운데에 자리한 거대한 수차(水車)와 그에 연결된 정체불명의 상자는 고요한 괴물처럼 숨을 죽이고 있었다.
희성은 잠을 설친 듯 붉어진 눈으로 설계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곁에 선 바름의 화면에서는 미세한 수치들이 쉴 새 없이 깜빡였다.
“모든 계산은 완벽해, 바름. 하지만… 변수는 언제나 계산 밖에 있지.”
“확률적으로 제어 가능 범위 내에 있습니다, 형님. 장영실 대감의 기술과 형님의 지식이 결합된 이 발전기는 시대를 최소 오십 년은 앞서가는 물건입니다.”
바름의 차분한 음성에도 희성의 불안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었다. 조선의 운명을, 그리고 어쩌면 시공간의 흐름 자체를 바꿔놓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시도였다.
그때, 장영실과 장인들이 횃불을 들고 뜰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얼굴에는 밤샘 작업의 피로와 새로운 기술에 대한 기대가 교차하고 있었다.
“준비는 다 되었는가?”
장영실의 목소리에 희성은 설계도에서 눈을 뗐다.
“예, 대감. 마지막 점검만 남았습니다.”
아침 공기는 서늘했지만, 수차의 축과 날개를 조이고 기름칠을 하는 장인들의 손놀림은 뜨거웠다. 희성은 바름을 곁에 두고 설계도와 수치를 거듭 확인했다. 음성 통역이 가능해진 바름은 장영실의 지시와 희성의 설명을 실시간으로 오가며 완벽한 소통을 도왔다.
작업 도면을 살피던 그때, 붓을 든 선비 하나가 그림자처럼 다가왔다.
“이 각도라면 물살을 고르게 받을 수 있겠으나, 회전력을 감당할 축이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오.”
날카로운 지적에 희성이 고개를 들었다. 집현전 학자 성삼문이었다. 그는 붓을 들어 설계 위에 간단한 보강선을 긋고는, 음운의 원리에 빗대어 기계의 구조를 설명했다.
“글자를 바로 세워야 바른 소리가 나듯, 기계 또한 그러하오. 받치는 것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 법이지.”
소리의 원리를 탐구하여 훈민정음 창제에 큰 공을 세운 학자다운 통찰력이었다. 희성은 그의 혜안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고맙습니다. 그 조언, 받들겠습니다.”
조언을 마친 성삼문의 시선이 도면을 떠나, 희성의 곁에 묵묵히 서 있는 바름에게로 향했다. 그는 처음 보는 기묘한 상자를 흥미롭게 뜯어보았다.
“아니 그런데 이것은 무엇이오? 스스로 소리를 내는 기계 상자라니.”
“바름이라 하옵니다.”
희성의 대답에 성삼문은 바름을 향해 직접 물었다.
“네가 바름이더냐. 그렇다면 내가 누군지 아느냐?”
바름의 화면에 여러 문장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더니, 이내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용자의 데이터베이스에 존함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허나, 대감의 논리적인 분석과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으로 보아,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지성을 가진 분이라는 것은 알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답변에 성삼문은 잠시 말을 잃었다가, 이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으흠. 그대의 말은 아첨처럼 들려 위험하지만… 세상에 꼭 필요한 발칙함이군. 허허허.”
바름과 성삼문의 재치 있는 문답에 지켜보던 장인들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번졌다.
해가 중천에 떠오를 무렵, 익선관에 곤룡포를 차려입은 이도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뒤로는 호위무사 이연이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었다. 왕의 등장에 마당의 모든 소음이 멎고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오늘은 그대들의 땀과 지혜가 어떤 결실을 맺을지, 과인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다.”
이도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감은 모두를 긴장하게 했다.
“물길을 열어 바퀴를 돌리고, 저 상자가 깨어날 수 있는지 보리라.”
왕의 명이 떨어지자, 궁인들이 둑을 막고 있던 널빤지를 치웠다. 갇혀 있던 물이 성난 짐승처럼 쏟아져 나오며 거대한 바퀴의 날개를 세차게 때렸다. 끼기긱, 둔탁한 소음과 함께 육중한 바퀴가 서서히 돌기 시작했다. 점점 빨라지는 회전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그때, 바름이 짧고 날카로운 경고음을 울렸다.
“위험. 회전 속도 과다. 설계된 임계점을 초과했습니다. 축 손상 위험 감지.”
희성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날개 각도를 줄여야 합니다! 물살이 너무 거셉니다!”
그가 목청껏 외쳤지만, 거대한 물소리와 기계의 소란에 묻혀 장인들의 귀에 또렷이 닿지 못했다. 그 순간, 비명을 지르는 듯한 파공음이 모두의 귀를 찢었다. 쿵! 엄청난 굉음과 함께 수차의 축이 비틀리며 날개 일부가 부러져 나갔다. 부러진 나무 조각은 원심력을 이기지 못하고 총알처럼 마당 쪽으로 튀어 올랐다.
하필이면 그 궤적의 끝에, 이 모든 과정을 기록하기 위해 붓을 들고 서 있던 다온이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피할 새도 없이 날아드는 파편을, 다온은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다온 낭자!”
희성의 절규가 터져 나왔다. 그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던져 다온을 끌어안았다. 등 뒤로 날아드는 예리한 파공성을 느끼며, 그는 그녀를 더 깊숙이 품으로 감쌌다. 퍽! 묵직한 충격이 등 전체로 퍼져나갔다. 숨이 턱 막히는 고통에 눈앞이 아찔했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그녀를 꼭 안은 채 버텼다.
“…….”
잠시 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거친 숨소리와 심장 소리, 그리고 품 안에 느껴지는 다온의 미세한 떨림만이 현실이었다.
“어찌… 어찌 그리 미련하십니까! 다치지 않으셨습니까?”
걱정이 가득한 다온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렸다. 희성은 짧게 숨을 고르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대가 다치는 것은… 볼 수 없습니다. 설령 제가 대신 다친다 한들.”
다온의 손이 그의 등 언저리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옷 위로 축축한 감각이 느껴지는 듯했다.
“등은… 괜찮으십니까?”
“예, 괜찮습니다.”
그의 대답에 다온이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흔들리는 눈동자에는 두려움과 안도, 그리고 지금껏 본 적 없는 깊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정녕… 제 곁을 지키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그 말에 다온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번졌다. 불안과 혼란 속에서 피어난, 작지만 단단한 신뢰의 미소였다.
“그 말… 기억하겠습니다.”
하며 다온은 희성의 등을 감싸고 힘껏 끌어안았다.
등에서는 여전히 불이 나는 듯 욱신거렸지만, 희성은 입꼬리를 올렸다.
(이 온기를 위해서라면 한 번쯤은 더 맞아도 좋겠… 아니, 그건 좀 아닌가.)
“마음은 기쁘나, 몸이 따라주질 않는군요. 아픕니다, 낭자.”
그의 말에 다온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떼고는, 새빨개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했다. 그 모습에 등은 여전히 욱신거렸지만, 희성의 입가엔 웃음이 가득했다. 말없이 스친 눈빛 속에서, 오해로 생겼던 어색함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서로의 진심이, 그 순간만큼은 분명히 닿았기에.
이도가 손을 들어 물길을 막게 하자, 소란은 비로소 끝이 났다. 고요가 내려앉은 마당으로 이연이 다가와 희성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그래서 내가 그대가 위험하다 하지 않았소? 전하의 대업에 해를 끼칠 뻔했소.”
다온은 곧장 그를 막아서며 받아쳤다.
“위험한 것은 사람을 시험하는 그대이지, 저분이 위험한 것이 아닙니다. 이 분이 아니었다면 제가 크게 다쳤을 것입니다.”
성삼문은 말없이 지켜보다가 곧 장영실과 함께 부서진 날개의 상태를 살폈다.
“지금 손보면, 내일 다시 물길을 열 수 있을 것이오.”
사람들이 흩어진 뒤, 발전기 앞에는 희성과 다온, 장영실, 성삼문만이 남았다. 희성은 부서진 날개와 축을 차분히 살폈다.
“축은 더 단단한 강철로 보강해야 합니다. 날개 각도도 물살에 맞춰 다시 계산해야 합니다.”
장영실이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삼문이 덧붙였다.
“받침목을 두 겹으로 겹치고 쐐기를 박으면 훨씬 오래 버틸 것이오.”
다온이 붓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필요한 도구와 재료는 제가 밤을 새워서라도 챙기겠습니다.”
희성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그대와 함께라면, 내일은 다를 것입니다.”
그때, 희성의 손목에 있던 바름의 화면에 조용한 문장이 떠올랐다.
[형님, 이건 연애입니다. 감정 데이터 분석 결과: 위기 상황에서의 상호 신뢰도 95% 상승. 조선식 사랑이 시작됐습니다.]
밤이 내려오자, 마당의 등불이 하나둘 켜졌다. 실패의 잔해 속에서, 네 사람은 더 단단해진 눈빛으로 내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람과 물은, 그리고 두 남녀의 마음은 내일 다시 맞붙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