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로 인한 균열 그리고 경고
아침 볕이 막 잠에서 깬 듯, 집현전 너른 마당으로 금빛 가루처럼 고요히 흩뿌려지고 있었다. 밤새 차게 식었던 대지의 공기가 해를 만나 미지근하게 풀려갈 무렵, 희성은 뜬눈으로 밤을 새운 몸을 일으켰다. 눈은 피로로 붉게 충혈되었지만, 그의 손길은 그 어느 때보다 경건하고 섬세했다.
그가 조심스럽게 들어 올린 것은 손바닥만 한 사각의 상자, '바름'이었다. 전날 밤, 꼬박 하룻밤을 바쳐 진행한 업그레이드. 희성은 마른침을 삼키며 바름의 매끄러운 표면을 쓸었다. 제발, 이번에는 완벽해야만 했다. 화면이 켜지자, 호수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새벽 물결처럼 부드러운 기계음이 번졌다. 희성의 귓가에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음성이었다.
[업그레이드 완료. 음성 실시간 통역 기능 활성화.]
“오… 드디어.”
안도의 한숨과 함께 터져 나온 희성의 중얼거림을, 바름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곧장 유려한 조선의 언어로 따라 옮겼다.
“오… 드디어.”
그 목소리에 놀라 곁에서 숨죽이고 있던 다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눈동자에 새벽하늘과 희성의 모습이 온전히 담겼다.
“지금… 이것이, 이방인의 말을 곧장 통역하고 있는 것이옵니까?”
다온의 목소리에 실린 미세한 떨림까지 감지한 듯, 바름이 또렷하고 안정적인 음성으로 응답했다.
[그렇사옵니다, 다온 아씨.]
그때, 저편에서 연신 신기한 듯 연장을 만지작거리던 장영실이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얼굴엔 소년과 같은 설렘이 가득했다.
“허허, 이거 참. 그럼 내 말도 한번 전해 보시오. ‘장영실은 천하제일의 장인이라!’ 그리 똑똑히 말해 보란 말이오.”
희성은 장영실의 순수한 열의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럽게 따라 말했다. 그러자 바름은 마치 오랫동안 조선어를 익힌 선비처럼 매끄럽게 그 말을 흘려보냈다. 장영실은 제 무릎을 탁 치며 아이처럼 웃었다.
“허허, 참으로 신묘한 상자이옵니다! 이 안에 작은 아이라도 들어앉은 것인가!”
마당에는 한동안 경이와 감탄이 섞인 가벼운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러나 그 따스한 공기를 칼로 베어내듯, 차가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이연이었다. 그는 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었는지 모를 만큼 소리 없이 다가와 있었다. 그의 등장만으로 마당의 온도가 몇 뼘은 내려앉는 듯했다. 장영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고, 다온의 어깨는 미세하게 굳어졌다. 이연은 희성을 잠시 훑어보더니, 이내 시선을 다온에게 고정한 채 그녀의 곁으로 다가섰다. 목소리는 잔잔한 호수 같았으나, 그 수면 아래에는 날카로운 얼음 조각들이 서려 있었다.
“그대가 위험할 수 있소. 이방인의 곁에 있는 것은… 그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길 수도 있다는 뜻이오. 저자는 어차피 잠시 머물다 떠날 사람이 아니오.”
다온을 향한 염려처럼 들렸지만, 그 말의 칼끝은 정확히 희성을 겨누고 있었다. 하지만 희성의 귀에 들린 바름의 번역은 전혀 다른, 더욱 날것의 적의를 품고 있었다.
[이자는 위험한 사람이다. 이방인은 언제나 그대를 다치게 할 수 있으니, 어서 그 곁을 떠나시오.]
순간 희성의 뇌리에 찬물이 끼얹혔다. 방금까지 느껴졌던 희미한 온기와 성취감이 순식간에 싸늘한 얼음으로 변했다. 그의 시선이 번개처럼 이연에게로 향했다. 그 눈빛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믿었던 세상에 균열이 가는 소리를 들은 자의 당혹감과 배신감이었다.
“방금… 무슨 말을 하였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바름이 다시 그의 말을 번역하려 시도했으나, 희성의 격한 감정 데이터가 입력 회로를 교란한 탓인지 단어들이 기괴하게 엉켰다.
[방금 하였소 말을 무슨]
명백한 오류였다. 이연은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입꼬리를 비틀어 희미한 조소를 지었다.
“이방인, 그 신묘한 통역 상자에만 의지하다 보면 정작 들어야 할 소리는 듣지 못하고,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는 법이오. 귀가 어두워진다는 뜻이지.”
그는 마치 승자처럼, 천천히 걸음을 옮겨 마당을 나갔다.
일종의 오류, 희성이 명명한 ‘하루시내선(河漏時內先)’. 이연의 말속에 담긴 교묘한 거짓과 적의가 바름의 알고리즘을 교란해, 의도를 증폭시켜 번역해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 리 없는 희성은 망연히 그 자리에 서서 다온을 보았다. 자신을 향해 비수처럼 날아온 말을, 그녀는 바로 곁에서 듣고 있지 않았던가.
“내가… 내가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 어찌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원망과 서운함이 뒤섞인, 위태로운 음성이었다. 다온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옷고름을 불안하게 매만지고 있었다.
“저는… 저는 그저, 말하지 않아도… 희성 님께서 알아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 말에 흔들릴 분이 아니시라고… 그리 믿었습니다.”
그 대답이 희성의 마지막 이성을 끊어냈다. 그의 입가에 짧은 실소가 스쳤다. 그러나 그 웃음엔 칼날 같은 냉기가 서려 있었다.
“그 침묵이 내 심장을 얼마나 아프게 찌르는지는 미처 생각지 못하였소? 나에 대한 믿음이 고작 그것이었소? 그대는 어찌하여 자꾸만 나를 시험하는 것이오!”
다온의 눈빛이 파르르 흔들렸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끝내 아무런 대답도 오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은 긍정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겼다. 마당을 감돌던 아침 바람마저 싸늘하게 식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다. 결국 바름도, 다온도, 이연의 거짓 앞에서 무력했다.
그때였다. 무거운 정적을 깨고 용 발톱이 수놓아진 붉은 곤룡포의 주인이 나타났다. 이도였다. 그의 등장은 마당의 공기를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희성.”
왕의 부름에 희성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이도는 싸늘하게 식은 두 사람의 분위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용무만을 말했다.
“사흘의 시간을 주겠다. 그 안에 발전기를 완성하라. 그러지 못하면 그대의 기묘한 지식과 저 상자는 이곳에서 영원히 봉인될 것이오.”
그것은 기회가 아닌 최후통첩이었다. 바름의 화면에 붉은색의 굵은 글자가 번쩍였다.
[기한: 3일.]
그 옆의 작은 상태 표시 아이콘이 경고하듯 깜빡이며 시스템 내부 음성을 속삭였다.
[경고: 사용자 간의 갈등 수치 임계점 도달. 원인 분석 및 관계 회복 프로토콜 가동 필요.]
희성은 그 경고를 애써 외면했다. 그는 마당에 어지럽게 널린 부품들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금속 덩어리들이 마치 자신의 처지처럼 느껴졌다. 사흘. 이 짧은 시간 안에 불가능에 가까운 과업을 완수하고, 동시에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이 오해도 풀어야만 한다.
“사흘 안에… 반드시 끝내겠습니다.”
희성은 왕을 향해 답하며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그리고… 이 모든 오해도.”
그의 눈빛에 차가운 결의가 맺혔다. 아직 오지 않은 사흘 뒤, 이 차가운 바람의 온도를 자신의 손으로 바꾸고야 말겠다고 다짐하며. 그의 손끝에서 모든 것이 시작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