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 뒤에 숨어있는 오해와 갈등
집현전 뒤뜰.
가을빛이 서서히 깔리던 아침, 희성은 발전기 부품을 챙겨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이도가 희성을 위아래로 훑더니 짧게 한마디 던졌다.
“어허, 이런 촌스러운 복식으로는 곤란하구나. 보는 눈이 몇인데.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게 하라. 머리는 또 왜 그리 짧은 것이냐? 가발이라도 씌워야 하겠군. 허허허.”
옆에서 다온이 웃음을 삼키며 접어 두었던 보따리를 풀었다. 햇빛을 곱게 머금은 청색 도포, 흰 속저고리, 그리고… 용도를 짐작하기 어려운 기다란 끈 두 줄. 희성은 그 끈을 집어 들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어디에 감으라는 거야?”
하며 자연스럽게 허리에 갖다 댔다. 다온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대답했다.
“그것은 벨트가 아니라 대님입니다.”
“벨트? 대님? 잠깐, 벨트라는 말을 어떻게…”
희성이 놀란 얼굴로 묻자, 다온은 말없이 끈을 가져가 그의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그녀가 허리에 끈을 매기 시작하자, 어느새 둘의 거리는 성큼 가까워졌다. 당황한 희성은 괜히 시선을 돌렸지만, 훅 끼쳐오는 은은한 먹 향기에 목덜미가 슬그머니 달아올랐다. 멀찍이서 지켜보던 장영실이 껄껄 웃으며 외쳤다.
“허허, 이 사람아! 허리에 왜 두르나? 그건 머리에 묶어야지!”
장영실의 호언장담에 희성은 더욱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허리와 머리를 번갈아 만져보았다. 그 모습에 옆에서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던 다온과 다른 학자들이 결국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그 끈은 장영실의 말처럼 망건도 아니었고, 대님은 발목에 매는 끈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순진한 이방인을 놀리는 재미에 푹 빠진 조선 사람들 중에 진실을 알려줄 이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그때, 희성의 스마트한 조력자 바름이 조용히 속삭였다.
“착용법을 검색 중입니다… 결과 없음.”
희성은 대님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아, 진짜… 내비게이션이 필요한 옷이네.”
마당을 나서려던 순간, 이도가 다온을 불렀다.
“다온, 그대의 눈은 오래전부터 세상을 두 번 본 자의 눈이로다.”
다온은 미묘하게 숨을 고르고 고개를 숙였다.
“오래 살다 보니 눈이 밝아진 것뿐입니다, 전하.”
이도의 미소는 짧았지만, 거기엔 서로만 아는 오래된 비밀이 스며 있었다.
한쪽 마당에선 장영실이 새로 만든 바퀴 날개를 점검하고 있었다. 희성이 옆에서 각도를 맞추자 장영실이 감탄했다.
“이 각도면 물살이 더 세게 받겠군요. 이방인치고 손이 야무집니다.”
다온은 작업 내용을 붓으로 옮기면서 곡선 대신 직선 격자를 그려 도면을 정리했다. 그걸 본 희성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도면 감각이… 현대의 CAD처럼 체계적인데?’ 그때 이연이 다가왔다. 발소리는 조용했지만 공기를 가르는 기운이 차가웠다. 그는 주변을 한번 쓱 훑어본 뒤, 다온의 귓가에 들릴 듯 말 듯 낮게 속삭였다.
“다온, 그대는 저 이방인을 너무 믿는 것 같소. 믿음도 정도가 있지. 그대는 모르는 것 같군. 저 이방인이… 전하의 허락도 없이 그 글자를 외부에 보이려 했다는 걸.”
순간 다온의 심장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가 보여주었던 순수한 열정이, 그저 자신을 이용하기 위한 기만이었단 말인가? 아니면 이 또한 전하의 시험이란 말인가.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붓끝이 종이 위에서 잠시 멈췄다. 멀리서 돌아온 희성이 다가와 물었다. "무슨 얘기하시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닌, 어색한 미소뿐이었다. 다온은 아무 말 없이 붓을 다시 움직였다. 방금 전까지 함께 웃던 그녀와 나 사이에 투명한 유리벽이 생긴 것만 같았다. 그 웃음이 거짓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이유를 나만 모른다는 것을 직감했다. 희성은 답답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다온의 감정을 확인했다. 바름의 화면에 작은 글씨가 떴다.
“상대방의 감정: 주저, 불안.”
희성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말을 들은 거야… 왜 갑자기 이렇게 변한 거지?” 오후, 발전기 부품들이 마당에 가지런히 놓였다. 장영실이 나무 축을 돌려 보며 속도를 계산했다.
“물살이 약하면 바람개비를 넓히고, 강하면 좁힙니다. 축은 단단히 매고, 물방울이 닿지 않게 하는 게 좋지요.”
희성은 현대의 수력 발전 원리를 떠올리며 간단한 스케치를 더했고, 다온은 그걸 조선식 글과 표기로 유려하게 옮겼다. 잠시 전의 불편한 공기가 공동의 목표 아래 조금 옅어지는 듯했다. 작업을 마무리할 즈음, 이도가 걸어왔다. 그의 걸음은 느렸지만 한 걸음마다 무게가 있었다.
“희성, 오늘부터 그대의 시험이 시작된다.”
“시험이요?”
이도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말했다.
“발전기를 완성하는 것, 그리고… 이곳의 신뢰를 지키는 것.”
곁에서 이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방인의 손끝에서 나오는 게 바람일지, 폭풍일지… 나는 아직 모릅니다.”
희성은 대꾸 대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날 밤, 희성은 낮에 얻은 설계와 측정 데이터를 바름에 입력했다. 바름의 화면이 깜빡이고 기계음이 울렸다.
“언어 패턴 분석률 61%… 음성 실시간 통역 가능성 27%.”
희성이 미소 지었다. “좋아, 조금만 더.”
바름이 부드럽게 알렸다.
“업그레이드 모드 진입. 다음 접속 시… 새로운 기능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희성은 알았다. 곧, 조선에서의 대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질 거라는 것을. 그리고 그전에 마음속에 생긴 작은 균열을 먼저 메워야 한다는 것도. 그 시각, 희성이 떠난 작업장을 뒤로하고 궁으로 향하던 이도와 이연이 달빛 아래서 조용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전하, 저 자는 위험합니다.”
이연이 먼저 침묵을 깼다. 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그의 지식은 이 땅의 것이 아닙니다. 어디서 왔는지도,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도 불분명합니다. 저런 통제할 수 없는 힘은 질서를 어지럽힐 뿐입니다.”
이도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의 시선은 멀리 어둠에 잠긴 도성의 지붕들을 향해 있었다.
“그래서 시험이 필요한 것이다, 이연. 그가 가진 힘이 위험하다는 것을 나라고 모르겠느냐. 허나, 고여 있는 물은 썩는 법이다. 때로는 세찬 비바람이 내려야 연못에 새 물이 차는 법이지.”
“하오나 전하, 비바람은 옥석을 가리지 않습니다. 애써 가꾼 곡식까지 모두 쓰러뜨릴 수 있습니다.”
“그 비바람의 방향을 트는 것이 바로 우리의 역할이다. 희성의 시험은 단지 그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의 지식을 우리가 감당할 그릇이 되는지, 그 위험을 다스려 백성을 위한 이로움으로 바꿀 지혜가 우리에게 있는지를 시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두려워 마라. 나는 폭풍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폭풍을 다스릴 바람을 원하는 것이니.”
이연은 이도의 말에 뭔가 자신이 모르는 비밀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지만, 모른 척 넘어가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알게 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희성에 대한 경계심은 여전히 날카로웠고 자꾸만 희성과 가깝게 지내는 다온에게도 서운함이 묻어나 있었다.
"희성과 다온, 무슨 비밀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반드시 찾아내어 전하께 고하리라. 그전에 스스로 고백하는 게 나을 것이오!"
이도의 마지막 말은 밤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희성에게 주어진 시험의 무게가 실은 조선 전체의 명운과 맞닿아 있음을 아는 이는 아직 많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