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글은 극 소수만 알고 있는 글이었다. 의심의 씨앗
집현전 깊숙한 곳, 오직 몇 사람만이 아는 비밀 공간의 아침은 먹물을 머금은 듯 조용했다. 겹겹의 창호지를 뚫고 스며든 햇살만이 유일한 손님이었다. 가느다란 빛줄기는 잠든 거인의 숨결처럼 방바닥을 느릿하게 쓸어내렸고, 그 끝에 닿은 한쪽 구석의 검은 판(板)이 희미한 빛을 깜빡였다. 미래의 물건, '바름'의 밥상이었다.
유희성은 익숙하게 판의 각도를 한 뼘쯤 틀어, 잠에서 덜 깬 햇살을 더 깊숙이 끌어들였다. 그의 움직임에는 소리가 없었으나, 그를 지켜보는 강다온의 세상에서는 세상 모든 것이 소리치고 있었다. 다온은 희성의 옆에 종이와 벼루, 작은 물그릇을 그림처럼 정갈히 놓았다. 물그릇을 내려놓는 그녀의 손끝이 희성의 손등에 스칠 듯 가까워졌다가, 놀란 새처럼 파르르 물러났다. 그 찰나의 순간, 둘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처음 만났을 때의 경직된 어색함 대신, 옅은 안개 같은 미묘한 기류가 감돌았다. 희성이 부드럽게 웃자, 그 미소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바름의 작은 불빛이 선명하게 켜졌다.
다온은 잠시 망설이다 붓을 들었다. 그녀의 마음속 질문은 너무 많아 오히려 한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붓끝에 먹물을 적신 그녀가 하얀 종이에 조심스럽게 적었다.
[ 그대는 어찌하여 이리 많은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까? 그대의 세상에서는 이것이 당연한 일인지요. ]
희성은 그녀의 글씨를, 그리고 그 글씨에 담긴 망설임과 호기심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는 바름의 화면에 천천히 글자를 새겼다. 곧이어 바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묵향 밴 방 안을 따스하게 감쌌다.
“나는 이곳의 글자를 해석하려 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그대의 마음이 먼저 번역되고 말았소.”
다온은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뜻을 완전히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심장이 작게 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이번에는 종이에 쓰지 않고, 큰 결심을 한 듯 입술을 열었다. 목소리가 작게 떨려 나왔다.
“그대의 말은… 아득히 낯설지만, 이상하게도 내 마음은 자꾸만 그 말을 따라가고 있네요.”
바름은 그 말을 곧장 현대의 언어로 옮겼다. 희성은 번역된 소리를 들으며 안심한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말은 서툴게 서로를 비껴가지만, 눈빛과 숨결이 먼저 길을 내고 있었다. 오늘의 일은, 어제보다 조금은 더 쉽겠구나. 둘은 말없이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때였다. 굳게 닫힌 문이 미세하게 움직이며 서늘한 아침 공기를 끌어들였다. 방 안의 온기가 순식간에 날아갔다. 묵직한 용포의 옷자락을 끌며 들어선 이는 이도였다. 그의 눈빛은 북극성처럼 견고했으나, 두 사람을 바라보는 입가에는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줄기 같은 미묘한 온기가 서려 있었다.
“희성. 어젯밤 그대가 내게 보여주었던 바퀴와 날개의 그림을 다시 보았다. 기이하고도 흥미로운 발상이더구나. 이는 필시 손으로 만져보아야 그 이치를 알 수 있겠다. 장영실이 보아야만 해. 여봐라, 속히 그를 불러오라.”
왕의 명령은 짧고 단호했다. 잠시 후, 분주한 헛기침 소리와 함께 장영실이 종이뭉치를 아기처럼 품에 안고 나타났다. 그의 손끝에는 미처 다 털어내지 못한 나무 가루가 묻어 있었고, 눈은 어린아이의 것처럼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그는 방 안의 낯선 기물들을 둘러보다가, 스스로 빛을 내는 바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전하, 이… 이 신기한 상자가 바로 그 그림의 주인입니까? 허면, 이 물길이 저 커다란 바퀴를 돌리고, 그 힘이… 저 작은 상자를 깨우는 것이란 말씀이시옵니까?”
장영실의 질문에 바름이 상냥하게 응답했다.
“예. 물이 흐르면 힘이 생기고, 그 힘이 모여 글과 빛을 움직입니다.”
장영실은 제 허벅지를 탁 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허, 물시계만 재밌는 줄 알았더니, 이 상자시계는 한술 더 뜨는 재미가 있사옵니다, 전하!”
그 순수한 감탄에 다온이 입을 가리며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이도 역시 잠깐 눈가를 접으며 옅은 미소를 보였다. 이날로 ‘물과 바람 모임’, 시대를 앞서 전기를 만들려는 비밀스러운 계획이 시작되었다. 희성은 종이 위에 둥근 바퀴와 그 옆에 놓일 작은 ‘심장’을 그렸다.
그는 “구리선”과 “자석”이라는, 이곳 사람들에게는 주문과도 같은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낯선 낱말이 허공에 흩어지자, 다온은 그것을 붙잡아 정갈한 비유의 옷을 입혔다. 붉은빛이 도는 가느다란 줄(구리선)에, 보이지 않는 힘을 끌어당기는 돌(자석)을 대면, 작은 심장(모터)이 두근거리며 상자(바름)가 깨어난다.
장영실은 다온의 기록을 읽으며 무릎을 쳤다. 그는 곧장 바퀴 날개의 각도를 이리저리 바꿔 그려보며 중얼거렸다.
“물살이 강할 때는 날개를 넓게 눕히고, 약할 때는 좁게 세워야 힘을 온전히 받을 것입니다. 돌림축은 무쇠로 단단히 매고, 저 작은 심장은 물방울 하나 닿지 않게 높은 곳에 함을 만들어 올림이 옳사옵니다.”
이도가 묵묵히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집현전 뒤편, 인적이 드문 창고를 비워 작업장으로 삼으라. 다온은 이 모든 것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희성은 생각을 내고, 장영실은 손을 내어 그 생각을 만져지는 것으로 만들라.”
왕의 명으로 모두의 역할이 정해지던 바로 그때, 문기둥 그림자 사이로 한 사람이 소리 없이 들어섰다. 칼같이 다린 옷의 매무새는 단정했으나, 서릿발 같은 눈빛은 방 안의 온기를 단번에 얼려버렸다. 사헌부의 감찰 이연이었다. 그는 둘러앉은 사람들을 차례로 훑어 내리다가, 그 시선을 낯선 사내, 희성에게 멈추었다. 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 자가… 전하께서 말씀하신, 우리가 모르는 글을 읽는다는 그 사람입니까?”
다온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이연은 아무 말 없이 그들이 그린 설계도와 낯선 판, 그리고 ‘바름’이라 불리는 상자를 번갈아 보았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깊은 경계심과 억누른 호기심이 동시에 떠올랐다. 작업은 뜻밖에 순조롭게 풀렸다. 집현전 뒤편 작은 물길을 막아 새로운 물레방아를 앉혔고, 장영실은 며칠 밤낮으로 나무를 깎아 축을 다듬었다.
그의 작업장에서는 경쾌한 망치 소리와 향긋한 나무 냄새가 떠나지 않았다. 다온은 붓끝으로 그 모든 것을 기록했다. 오늘의 물살 세기, 바퀴가 한 바퀴 도는 속도, 상자가 희미하게 깜빡이는 간격까지. 희성은 바름의 화면에 복잡하고 낯선 수치들을 남겼다. 그 숫자들 사이로 ‘가능성’이라는 단어가 조용히 자라나고 있었다.
해가 기울어 세상이 붉게 물들 무렵, 마침내 바퀴는 천천히, 그러나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람처럼 끈질기게 돌아갔다. 바름의 작은 표시등이 길게, 선명하게 반짝였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 빛을 바라보던 그때, 이연은 문득 바람에 나부끼는 종이 한 장에 시선을 붙들었다.
희성이 무심코 남겨둔 메모였다. 바른 획, 정갈한 모양. 낯선 듯하면서도 기묘하게 익숙한 형태의 글자들.
이연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그 소리에 모두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글… 어찌하여 여기에 있는 것이냐. 이것은 전하와 극소수의 신료들만 아는 비밀의 글자가 아니더냐.”
장영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글자는 그저 글자일 뿐인데, 거기에 무슨 비밀이 있사옵니까?”
이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으로 그 글자의 획을 한번 쓸어내리고는, 희성을 꿰뚫어 볼 듯이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묻고, 재고, 가늠하는 수만 가지 마음이 담겨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종이 위 몇 장의 메모가 살짝 들썩였다. 다온이 황급히 그 장을 손으로 붙잡았다. 그녀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제 이 비밀을… 그대와 내가 함께 지켜야만 하겠군요.”
희성은 그녀의 속삭임을 알아들은 듯, 바름에 글을 입력한 뒤 고개를 들어 다온을 바라봤다. 바름의 목소리가 그의 마음을 대신 전했다.
“네. 그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연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의 목소리는 단순한 질문이 아닌 경고처럼 울렸다.
“전하, 이 글이 밖으로 새어 나간다면, 이는 단순히 궁 안의 바람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나라의 숨이 달라지는 일이옵니다.”
그의 말은 충언처럼 들렸으나, 칼날 같은 위협을 품고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이도는 문득 웃었다. 그리고 손짓했다. 방 한쪽, 서가와 벽 사이에 있던 좁은 문이 굉음과 함께 열렸다. 먼지를 잔뜩 머금은 숨은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계단은 아래로 깊숙이 향해 있었고, 차갑고 묵은 바람이 그 아래에서부터 올라왔다. 오래도록 감춰졌던 공간의 냄새가 스며 나왔다.
“희성, 다온, 장영실, 그리고 이연. 네 사람은 나와 함께 내려가자.”
그들은 서로를 한번 바라보았다. 바름의 불빛이 그들의 얼굴을 비추며 한 번 더 길게 켜졌다. 계단 아래의 방은 작았다. 그러나 사방 벽에는 종이가 빈틈없이 가득 걸려 있었다. 익숙한 듯 낯선 획들, 아직 이름이 없는 새로운 모양의 글자들이 빼곡했다. 방 한가운데 작은 탁자 위엔 밀랍으로 단단히 봉인된 문서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이도가 망설임 없이 그 봉인을 풀었다. 조용히, 그리고 단호하게.
“이곳은 정음밀방(正音密房). 세상을 바꿀 글자를 만들고 지키는 이들의 방이다.”
이연이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장영실은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눈을 반짝였다. 다온의 손끝이 종이 모서리를 더듬었다. 이미 알고 있던 글자들이었지만, 이렇게 깊고 비밀스러운 곳에서 마주하니, 그 비밀의 무게가 갑자기 자신을 짓누르는 듯했다. 이도가 마지막으로 희성에게 물었다.
“묻겠다, 희성. 그대의 시대에, 이 글은 사람의 마음을 살리는가, 아니면 다치게 하는가.”
희성은 잠시 침묵하다 바름에 글을 입력했다. 그의 눈은 흔들림 없이 이도를 향해 있었다. 바름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둘 다입니다. 글은 칼과 같아서, 쓰는 이에 따라 사람을 살리기도, 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 바르게 불리고, 널리 알려져야 합니다.”
이도가 길게 고개를 끄덕였다.
“옳다. 내가 저 아이의 이름을 ‘바름’이라 불렀던 까닭을 이제야 진정으로 깨달았구나.”
그는 탁자 위 봉투 하나를 희성에게 내밀었다. 봉투 앞면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오늘 이후, 그대도 이 방의 사람이다.]
그러나 희성과 다온, 그리고 이연을 차례로 둘러보는 이도의 눈빛은 더 이상 온화하지 않았다. 그는 등불을 들어 어둠을 가르며 조용히 선언했다.
“이제, 시험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