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세종)와의 첫 만남

새로운 프로젝트의 준비

by 유블리안

다온은 희성이 건넨 작은 상자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손바닥만 한 검은 판. 종이도 아닌데 글이 떠오르고, 붓도 먹도 없이 문장이 빛으로 새겨졌다. 그 차갑고도 선명한 빛이 눈동자에 살짝 흔들리자, 그녀는 숨을 아주 작게 들이켰다. 얇은 떨림이 속눈썹에 걸렸다. 주변의 궁녀들은 저것이 요물인지, 서역 오랑캐의 기이한 장난인지 소곤거렸다.


그 속삭임들이 귓가를 스쳤지만, 다온은 오직 눈앞의 상자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아니, 이렇게 작은 상자에 붓과 먹도 없이 글씨를 새긴단 말입니까? 게다가 그림까지……. 참으로 기이합니다.”


주변 공기가 얕게 술렁였다. 궁녀들은 두려움과 호기심이 뒤섞인 눈짓을 주고받았고, 무관 하나가 창끝을 조심스레 들어 올리며 희성의 목을 겨눴다. 낯선 물건 앞에서 사람들의 표정은 신성한 계시를 본 듯한 경외감과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원초적 공포 사이를 위태롭게 오갔다. 희성은 그 모든 시선을 고요히 감당한 채, 화면 위로 손가락을 올렸다.


짧은 망설임 끝에 글을 입력하자, 사람의 목소리와는 다른, 고르고 차분한 목소리가 상자 속에서 흘러나왔다. 그 소리는 맑았으나 감정이 실리지 않아 오히려 더 기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저는… 아주 먼 훗날에서 왔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금 보시는 이 글은 훗날 ‘한글’이라 불리게 될 새 문자입니다. 옆의 그림은 ‘사진’이라 하여 빛을 잠시 빌려 남기는 그림입니다. 보이는 순간을 그대로 담아냅니다.”


그 말이 끝나자, 다온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었다. 무관의 창끝이 한 치 내려가고, 방 안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안도가 얇게 깔렸다. 희성의 시선이 잠깐 그녀의 손끝에 닿았다가 조용히 물러났다. 바람이 창호를 스치며, 낯섦은 조금 덜 낯설어졌다. 목소리가 멎자, 웅성거림도 잠깐 멎었다.


그 틈을 가르며 중년의 학자가 앞으로 나왔다. 손끝에 묻은 먹물 자국, 곧게 선 허리, 오래 글과 함께 산 이의 단단한 기운. 그는 다온을 잠시, 희성을 더 길게 보았다.


“아씨, 물러나십시오. 위험한 물건일지 모릅니다.”


다온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들었다. 눈은 흔들리지 않았고, 목소리는 필요 이상으로 단단했다.


“아닙니다. 이 사람, 글을 읽고 씁니다.”


그 한마디가 바람처럼 공간을 가로질렀다. 글을 안다는 것. 그것은 이 시대, 이곳 궁궐에서 가장 강력한 증명이었다. 학자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짧게 결론을 내렸다.


“전하께 아뢰어야 하겠습니다.”


그 순간, 무관의 창끝이 조금 더 들렸고, 희성은 본능적으로 다온 앞에 반걸음 나서서 선을 그었다. 다온의 시선이 잠깐 희성의 어깨에 걸렸다. 무관은 그 작은 움직임을 보고 창을 내렸다. 낯섦은 여전했지만, 위협은 한 뼘 물러섰다.


희성은 관리들에게 둘러싸여 경복궁 깊숙이 이끌려갔다. 기와의 유려한 곡선이 하늘을 떠받치듯 이어지고, 붉은 기둥 사이로 바람이 얇게 지나갔다. 낭하(복도)에 드리운 그림자는 길었고 막힘이 없어 선선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으며, 발밑 마루는 속삭이듯 삐걱였다.


코끝에는 젖은 흙냄새와 은은한 향 냄새, 소나무 송진 냄새가 섞여 있었다. 드라마 세트장에서 맡았던 인공적인 향과는 차원이 다른, 살아있는 시간의 냄새였다. 뒤에서는 조용한 발소리와, 더 조용한 속삭임이 따라왔다. 모든 장면이 희성에게는 ‘세트장’이 아닌 현실이었다. 그 사실은 차가운 금속처럼 손에 잡혔다가, 조금씩 살결의 온도로 변해갔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두려운가? 당연했다. 하지만 그 두려움 밑바닥에서부터, 역사의 심장부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는 기묘한 흥분이 피어올랐다. 이제 곧 만나게 될 사람. 이 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라 불리는 인물. 희성은 마른 입술을 적시며 마음속으로 계획을 되뇌었다. 과장하지 말 것, 아는 척하지 말 것, 그러나 명확히 보여줄 것.


문 앞에서 관리가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육중한 문이 열리며 안쪽의 응축된 공기가 시원하게 밀려 들어왔다. 짙은 향 냄새가 바람과 섞이고, 공간의 중심에서 한 사람이 희성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이도. 48세의 나이로 백발이 성성했지만 눈빛은 밤하늘처럼 맑고 깊었다. 말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이었다. 훗날 세종대왕이라 불리는 성군.


그의 존재감만으로도 방 안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도는 곁에 선 다온을 향해 명했다.


“저 자가 어디서 왔는지 물으라.”


다온이 붓을 들어 먹을 찍고, 부드럽게 종이 위를 미끄러졌다. 그녀의 손에서 단정한 필체의 질문이 피어났다.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희성은 종이를 읽고 화면에 글을 입력했다. 상자 속 목소리가 또렷하게 방 안을 채웠다. 이전보다 더 긴장된 침묵이 공간을 짓눌렀다.


[저는… 아주 먼 훗날에서 왔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거짓이 아닙니다.]


관리들의 표정은 얼어붙었고 몇몇은 저도 모르게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이도의 눈빛은 경계 대신 낯선 세계를 처음 발견한 탐험가의 호기심으로 기울었다. 그는 손짓으로 주변의 동요를 잠재웠다.


“미래에서 왔다… 허면 그대는 아직 오지 않은 세상의 글을 아는 자로다.”


다온이 그 말을 다시 종이에 옮겨 희성에게 건넸다. 희성은 문장을 읽고 조용히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에는 ‘이제부터 진짜 대화가 시작된다’는 안도감이 묻어 있었다. 다온의 손끝엔 먹이 살짝 번졌고, 그 작은 얼룩이 이상하게도 희성의 마음에 가깝게 느껴졌다.


장소는 집현전의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옮겨졌다. 두꺼운 문이 닫히자 바깥의 소란은 뚝 끊겼다. 오래된 종이 냄새와 먹 향, 바람에 넘겨진 흔적이 남은 책들, 반쯤 펼쳐진 초안 위로 비스듬히 떨어지는 햇빛. 고요한 것들이 모여 만들어낸, 뜨거운 집중의 온도였다.


이도가 손짓했다. 다온이 붓으로 질문을 옮겼다.


“그 작은 상자는 무엇으로 움직이는가? 요력인가, 주술인가?”

희성은 화면에 천천히 썼다. 상자 속 목소리가 침착하게 응답했다.


[전기입니다. 제 시대에서는 빛과 바람, 물의 힘으로 전기를 만듭니다.]


다온의 눈동자가 아주 조금 커졌다. 빛과 바람과 물. 늘 곁에 있는 자연의 힘으로 저 기묘한 빛을 만들어낸다는 말에, 그녀는 잠시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이도는 그 미세한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전기라… 보이지 않되 글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로군. 허면 그대의 상자는 그 힘이 없으면 잠들겠구나.”


희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배낭에서 납작한 천을 꺼냈다. 접힌 천을 펼치자, 검은 비늘 같은 판들이 이어졌다. 한 학자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이것은 무엇으로 만들었소? 옻칠을 한 것인가, 아니면 흑요석을 갈아 붙인 것인가?”


희성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햇빛 아래로 가져갔다. 햇빛이 닿자 판의 표면에 미세한 빛줄기가 흐르는 듯했다.


“태양빛으로 힘을 모으는 장치입니다. 식물이 햇빛을 받아 자라나듯, 이것은 빛을 힘으로 바꿉니다. 장마철엔 좀……. 게으르지만요.”


다온이 창호를 활짝 열었다. 햇살이 한 뼘 더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희성은 조심스럽게 태양광 판을 햇빛이 가장 잘 드는 자리에 올려두었다. 상자 옆의 작은 표시등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사람들은 숨도 크게 쉬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것이 실제로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가, 마치 신의 계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도가 다시 손짓했다. 다온이 붓을 들어 또박또박 적는다.


“해가 없을 때는 어찌하나?”


희성은 짧게 웃었다. 미래에서 온 자의 미안함과 자신감이 섞인 웃음이었다.


“물의 힘을 빌리면 됩니다. 연못이나 개천의 물길에 바퀴를 달아 돌리면, 구리선을 감은 작은 심장(발전기)이 두근거립니다. 그 맥박이 이 상자를 깨어 있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작은 심장’이라는 말에 다온이 무심코 자신의 심장께를 감싸 쥐었다가, 붓끝에 묻은 먹을 탁탁 털어내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도의 눈빛이 더 깊어졌다.


“그대가 말한 바퀴의 모양을 그려 보라.”


희성은 종이에 둥근 바퀴와 날개, 축과 작은 상자를 이어 그림을 그렸다. 손은 서툴렀지만 선은 분명했다. 다온이 그 선 위에 간결한 주석을 덧붙이고, 삐뚤어진 선들을 바로잡아 정갈하게 다듬었다. 단순한 낙서는 어느새 실현 가능한 설계도의 얼굴을 가지게 되었다. 바람이 종이를 한 장 뒤집을까 말까 망설였고, 햇빛은 새로 그은 선을 따라 얇게 미끄러졌다. 그때, 상자 속 목소리가 아주 조용히 말을 더했다.


“전하, 저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부르기 편한 이름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다온의 입술에 작은 웃음이 묻어 나왔다. 이도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다온이 다듬은 그림과 상자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책상 위, 아직 어떤 글자도 적히지 않은 새 종이 위에 손끝을 올리고, 마치 아직 태어나지 않은 글자를 더듬듯 낮게 속삭였다.


“지식은 널리 퍼져야 하나, 그 뜻을 잃지 않고 바르게 이끌어야 하느니. 그대, 앞으로 ‘바름’이라 부르겠다.”


상자 옆 표시등이 길게 한 번 깜빡였다. 마치 대답처럼.


“이름을 확인했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바름’으로 응답합니다.”


방 안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이름을 받은 것은 단지 물건이 아니었다. 미래의 기술에 과거의 철학이 깃드는 순간이었다. 이도는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다온은 종이에 ‘바름’ 두 글자를 또박또박 적고, 한 번 더 덧그렸다. 바르게, 그리고 부드럽게. 희성은 그 글자를 바라보다가, 문득 눈길을 들어 다온을 보았다.


다온의 눈길도 같은 순간에 올라왔다. 둘의 시선이 살짝 부딪히더니, 서툰 미소가 양쪽에서 동시에 번졌다. 한 학자의 헛기침 소리가 그 미소를 적당히 갈무리해 주었다. 이도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다온이 옮겨 적는다.


“그대, 내 곁에 머물러 이 모든 것을 함께 해 보겠는가?”


희성은 화면에 썼다. 이제 ‘바름’이 된 상자의 목소리가 조용히 방 안에 깔렸다.


“머무는 동안, 제가 아는 모든 것을 전해드리겠습니다. 햇빛이 부족하면 물을 빌리고, 바람이 도우면 더 좋겠습니다.”


이도는 짧게 웃었다.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다. 오늘부터 이곳의 바람과 물은 그대를 도울 것이다. 바름이 와 함께 애써주게.”


다온이 창호 가까이 태양광 판을 조금 더 당겨 놓았다. 햇빛이 한 뼘 더 깊어졌다. 표시등이 규칙적으로 깜빡였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살리고, 들리지 않는 것이 마음을 움직였다. 그 장면 한가운데에, ‘바름’이라는 이름이 작게 반짝였다.


문밖 어딘가에서 짧은 종소리가 지나갔다. 낯선 여름, 낯선 사람, 낯선 글자들. 그러나 오늘만큼은, 낯섦이 두려움의 이름이 아니라 희망의 서두처럼 느껴졌다. 희성은 몰래 다온을 보았다. 다온은 눈을 내리고, 붓끝을 가다듬었다. 선을 바르게 세우려면 손이 너무 떨려서 안 된다는 표정, 그러나 흔들리는 건 손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걸 본인만 모르고 있는 표정.


희성은 주머니 속 작은 손풍기를 더듬다가 멈추고, 그 대신 아주 작게 속삭이듯 미소 지었다. 바람은 이미 충분하다는 듯, 창호 사이를 스스로 드나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공간에 아직 펼쳐지지 않은 또 다른 글자가 있다.


아직은 아무도 모르는, 그러나 곧 세상을 바꾸게 될 어떤 모양. 그 모양은 바람을 닮았고, 물길을 닮았고, 두 사람이 마주 본 순간의 곡선을 닮았다. 다음 장의 바람이, 조용히 예고되고 있었다.